도서명: 토지 5부3권(15) 저자명: 박경리 출판사명: 솔출판사 토지 5부 3권 제 3 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6장 옛날의 금잔디 몸에 꽉 끼는 국민복을 입고 낡은 구두를 신은 홍수관은 작년보다 더 몸이 줄어든 것 같았다. 옷이 작아서 작게 보인다면 모를까, 몸이 줄어들었는데 몸에 옷이 꽉 끼었다면 그 연유는 알 길이 없다. 이순철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계는 잇고 있는 모양이지만 요즘에는 이순철의 사업도 개점 휴업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명색이 서긴데 별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어머님은 안녕하시지요?" 걸으면서 윤국이 물었다. "그럭저럭 이어가고 계신 셈이지." 기운이 없는 수관의 목소리였다. 윤국은 수관이한테 그의 어머니 안부를 물을 때마다 거의 어김없이 그때, 십 년 넘게 세월이 흘러버린 그때 일을 생각하게 된다. 학생들이 시위하는 대열을 쫓아오면서 수관아! 수관아! 하며 부르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일 간다며?" 수관이 물었다. "가야지요." "장가는 안 가고 안 가고? 혼자 살 건가?" "해방이 되면 가지요." "그게 언제일까..." 수관은 꿈꾸듯 말했다. "머지 않소." "나도 그런 생각은 하지만 때때로 그게 믿기지 않아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다." 체념하고 타협하고 귀 막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의 오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시절의 준수한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생활에 찌들리고, 어깨에 힘주고 거리를 누비는 자들 눈초리에 찌들리고, 보행조차 옛날처럼 단정치 못했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남의 집에 드난꾼으로 드나들면서 오로지 아들 하나 바라보며 졸업 후에는 월급쟁이가 될 것을 꿈꾸며 희망을 걸었던 그의 모친, 또한 두뇌가 우수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홍수관이 아니었던가. 광주학생사건의 여파가 진주에도 거세게 밀어닥쳐 학교마다 시위가 벌어졌을 때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고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취조관에게 대어들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목조목 따지던 홍수관이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징역살이를 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그에게는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는 가슴앓이의 지병을 얻었던 것이다. 윤국이 진주에 오면 대개는 수관을 한번 찾아보고 간다. 집에서도 윤국이를 통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윤국이 조금 전에 백화점을 찾았을 때 수관은 창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배를 채우기도 힘든 세상에서는 화급히 필요로 하지 않는 재고품들이었다. 마침 순철이가 나오다 말고 "윤국이 아니가?" 큰소리로 말했다. "형님, 그간 별고 없었습니까?" 윤국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야 그날이 그날이지 뭐. 언제 왔노?" "한 열흘 됐습니다." "아주 왔나?" "가야지요." "졸업 안 했던가?" "일년을 까먹고, 명년에 졸업입니다." "남들은 학부를 한 번 나오기도 힘든데, 하기야 뭐 농과 경제과 다 좋지. 수관아." "네." "윤국이 데리고 산홍이 집에 가거라. 나 좀 바삐 다녀올 곳이 있어서 나중 갈게." 순철은 서두르듯 말하고 나갔다. 수관은 민적거리듯 윤국을 쳐다본다. 기생집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순철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나가버렸으니. "형, 갑시다." "너는 그런 곳에 더러 가나?" "가본 일은 있습니다. 술 마시러 가는데 아무데면 어떻습니까?" 해서 수관과 윤국은 거리에 나온 것이다. "형수씨랑 아이들도 다 별일 없지요?" 뜸했던 말을 윤국이 이었다. "나야말로 결혼한 게 잘못이었어." "왜 그런 말을 합니까." "가장 노릇, 애비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노릇이나 구실은 뭘 두고 하는 말이지요? 지게꾼도 처자는 거느립니다. 하긴 말할 자격은 없지만." "차라리 그 편이 떳떳하지. 우리 어머니를 저리 사시게 한 것도 다 내 탓 아니겠나? 희생도 보람이 있어야지. 내가 뭘 했다고, 입놀린 것밖에 더 있나?" "그런 생각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다 산 것은 아니지 않소?" "글쎄... 그 미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미칠 것 같다니까.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목에 올가미를 씌우지 않아도 서서히 죽이고 있는 것 같다." "..." "물론 나만 그런거 아니라는 것은 알어. 억울한 게 아니다. 자기 경멸이지." 자기 경멸이라는 수관의 말에 윤국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참 걷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난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일을 해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척박한 땅에 사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사로잡혀서 사는 거야말로 수치다. 너는 내 종이다, 너는 나의 노예다, 배가 터지게 먹일 수도 있고 굶겨서 죽일 수도 있다, 노리개로 삼을 수도 있고 고혈을 빨아먹을 수도 있다, 너는 내 곳간을 채우기 위해 뼈가 으스러지게 일을 해야 하며 약탈과 살육을 위해 나팔 불며 일장기 휘날리며 진군할 때 너희 조선놈들은 총받이로 앞장을 서야 하고 화기를 위해 쇳물이 되고, 분쇄기에 넣어 가루가 되며 압축기에 넣어 기름을 짤 수도 있다, 가죽을 벗겨 군화를 만들 수도 있고 우리 속에 가두어 두었다가 화학전에 대비하여 실험 인체로 쓸 수 있다. 아니, 이미 실험 인체로 쓰이고 있다. 정액의 홍수 속에서 미치고 죽어가는 계집아이들, 아아 너희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이 짐승들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이 몽롱해 보였다. 윤국은 마음속으로 꿈결같이 외치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에 등을 보이며 둑길을 달음질쳐 사라지는 양현의 모습, 낮에 뜬 반달같이 서늘하고 허무한 그 뒷모습. "살아남아야지요. 형,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 그래, 그날이 오면 우리 저 남강물에 뛰어들어 목욕하자. 더러운 왜놈의 때 빡빡 밀어내는 거야." 수관의 얼굴에는 아주 엷은 미소와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옥봉 산홍의 집으로 갔다. 산홍은 성깔깨나 있어 뵈는 삼십대 기생이었다. "이사장은 안 옵니까?" 산홍은 윤국을 곁눈질해 보며 물었다. "좀 있다 오실 거요." 수관은 앞장서 방으로 들어가는 산홍의 뒤꼭지에다 대고 물었다. "니내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 아니겄소. 기생들이 몸뻬 입고 훈련받으러 나가야 하고 근로 봉사하러 나가야 하고... 옥봉에서도 장사하는 집 몇 안 돼요. 그놈의 나아리들 땜에, 흠! 반시국적 분자다, 입으로는 그러지마는 금주할 수 없는 높으신 나아리... 덕분에 이럭저럭 아직은 문을 안 닫았을 뿐이지요." 산홍은 수관을 믿고 말하는 것 같았다. 좁은 지방이어서 수관의 전력을 대개는 다 알고 있었으며, 그 무렵의 수관은 젊은 여자들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또 이순철이 산홍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기에 자연 산홍과 수관은, 터놓고 얘기한 바 없지만 마음으로는 서로 무관한 사이는 아니었다. 날라다 주는 요리를 상 위에 옮겨놓으면서 산홍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중학교에서 봉안전 앞에다가 똥 싸놨다는 소문 그게 정말이오?" "글쎄, 정말인지 아닌지." 수관은 덤덤하게 말했다. 윤국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수관을 쳐다보았으나 수관은 윤국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을 안했다. "쉬쉬들 하는 모양인데, 사실이라면 아이들 참 맹랑하지요?" "글쎄, 아이들이 했는지 어른이 했는지 모를 일이지요." "전에, 가정부에게 와서 군자금을 뺏어간 사건도 끝내 밝혀내지 못했는데 이번 일도 죄 없는 아이들만 많이 끌려가고들 한다는데...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그런 말이 요새 유행이라 합니다." "그때도 그 말이 유행어였지요." 하며 수관은 윤국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술 드십시오. 기생은 물러갑니다." 눈치 빠른 산홍은 분위기에서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일어서 나갔다. "봉안전 어쩌고 하는 그 말, 무슨 일이 있었소?" "그게 극비로 되었으나 태평양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겠고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비밀이 보존될 수도 없고... 아까 말한 대로 봉안전 앞에다가 누가 똥을 싸놨다는 건데..." "허어, 참 교묘한 발상이군요." 수관은 싱긋이 웃었다. 산홍이 앞에서 소극적이던 그가 윤국이 앞에서는 기정 사실로 인정한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소위 치고 빠지는 전법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 우리 때는 정공법이었거든." "..." "성과는 적고 희생은 크고." "그렇게만 말할 수 없지요. 정신적으로 심어준 것이 크니까." "그 일 아니라도 요즘 아이들 많이 잡아간다. 현행범은 없고 모두 심증범이지. 경찰서에서도 애를 먹는 모양이다. 딱 잡아떼니까, 나는 그런 일 안 했다. 보통 영악한 게 아니라는 게야. 고문을 해도 안 했다로 일관하니까." "소위 그 죄질이 뭔데요?" "알다시피 요즘 학생들 군사훈련 아니면 군수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노동자들 선동하기, 눈치껏 태업하기, 공장기구 파손, 변소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후미진 곳이라면 어디든 벽면에 낙서하기, 그 낙서의 종류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는 모양인데 조선독립만세서부터 귀축 일본 물러가라, 해방의 그날이 오면 너희들 모가지는 추풍낙엽이다, 친일분자의 모가지부터 비틀어 버리겠다 등등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다는 거고, 하는 수 없이 학교 당국에서는 호주머니 속에 백묵이나 연필 따위가 들어 있는지 조사를 해서 들여보내는데도 낙서는 줄지 않는다는 거다. 요즘 애들 결코 정면 대결은 하지 않아." "신통하군요." "그애들 보면 희망이 생겨, 옥쇄가 아니고 지속성이거든." "하여간 봉안전 똥 얘기는 걸작이군요. 참 교묘한 발상이오." "결국 철통 같은 일본의 치안도 구멍이 뚫렸다 볼 수도 있어." "한계에 온 거지요." "통제한다는 것은 치안 유지의 금과옥조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그만큼 인원을 동원해야 하고 요즘 같은 시기, 일본의 인적 자원의 고갈 현상에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죄수가 많으면 옥졸도 늘리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게 지금 일본은 어렵게 돼있거든. 참 자네 강병택이 알지?" "알지요. 나보다 한 반 밑이었지요." "지금 뭘 하는지 모르지?" "병택이가 지금 순사질을 하네." "네?" "믿기지 않아?"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필이면 순삽니까?" "법정전문학교를 나왔으니 뭘 하겠나. 법원의 서기 자리가 적격이지만 병택이를 위해 자리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하늘의 별 따기지. 집이 살 만하니까 그 동안 놀고먹은 셈인데 징용 문제가 급해졌거든. 끌려가지 않으려니 별 수 있겠나? 전문학교 출신의 신참 순사라니, 본인도 괴로울 게야. 기껏해야 보통학교 나온 졸때기 속에서 큰 눈을 꿈벅꿈벅하고 있을 병택이 생각을 하면 안쓰럽다." "형은 괜찮겠습니까?" "모르지. 그걸 어찌 알겠나. 순철형도 고민이 많아. 사실 바쁜 것처럼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바쁠 게 하나도 없어. 그냥 엉거주춤 만사가 그런 상태다. 그 사정이야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지만. 관공서도 늙다리만 남아서 목소리만 요란했지 거세당한 느낌이다. 순진파들이 신문 보도에 핏대를 올리지만 뭔가 가라앉고 있어. 결국 배급받아 먹는 것 이외 정열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나는 때때로 절망해. 일본은 어디까지 가서 끝을 낼 건가 싶어서..." "하기는 막판이 어렵지요. 얼마만큼 조선인들을 몰아낼 것인지... 어떤 경우에도 형, 징용만은 피해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형무소에 들어가는 편이 나아요. 여기서는 실정을 잘 몰라서 설마 하는 경향이 있고... 동경서 비밀히, 징용자들 실태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았는데 한마디로 지옥입니다. 매맞고 고문당하고 그런 차원을 넘어섰어요. 굶겨가며 일을 시키다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사람을 생매장하기 아니면 숲 속에 던져서 야수들이 뜯어먹게 하는 겁니다. 숨을 쉬는데 콧구멍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요." 수관은 몸서리 쳤다. 말하는 윤국이도 술잔을 들며 눈을 감았다. "형." 윤국은 술을 마시고 빈 잔을 수관에게 건네준다. 술을 부어주면서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뭔들 못하겠소. 살아남은 목숨 값은 해야겠지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음으로 지고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우리는 다 모아야 하며 다 느껴야 하며 사회주의로 가야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법칙입니다." 윤국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째서요?" "나는 민족주의다." "사회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니란 말인가요?"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계급투쟁은 이 민족을 분열시킬 거야." 하는데 밖에서 기척이 났다. "많이 기다렸지?" 방문을 여는데 순철이 혼자가 아니었다. 경방단장 김기성이 동행했던 것이다. 방안의 두 사람도 놀랐지만 김기성도 깜짝 놀란다. 김기성 등뒤에 서 있는 이순철이 두 사람을 향해 강하게 눈짓을 했다. "들어가게." 순철이 기성을 떼밀었다. "내가 올 자리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 하나. 오늘 여기서 동창회 하자 안 했던가? 모두 동창인데 꽁무니 빼서 쓰나." 순철은 넋빠진 듯 앉은 채 올려다보는 윤국과 수관에게 "너희들 뭘 해?" "..." "버릇없이, 선배를 대하는 그 꼴이 그래 되겠나? 일어서서 깍듯이 인사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겠고." 그러고는 심하게 인상을 쓰고 눈짓을 여러 번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 네." 두 사람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선배, 오래간만입니다." 하고는 꾸벅 절을 한다. 김기성의 마음은 두 갈래였다. 수관하고는 동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껄끄럽기는 했으나 윤국이하고는 합석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김기성의 허영심 때문이다. 최윤국, 그가 누구인가. 최참판댁 둘째아들, 귀공자라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세상이 다 아는 수재요, 진짜 제대로 명문대학의 학부를 마쳤으며, 뿐인가 또 다른 대학에서 다른 분야를 전공하고 있으니, 말로는 대학이라 하지만 전문부 아니면 예과를 다니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하나도 난감한 학사를 두 개나 따게 생겼으니 그 점에서 윤국이 기성에게는 별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기성의 입장은 아버지 김두만의 경우와 다소 다르기도 했다. "앉게. 뻗장나무같이 서 있지 말고, 후배들이 환대하는데 선배의 도리가 있지, 앉자, 앉어." 기성을 잡아끌어 앉힌다. 순철은 요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앙숙이던 김기성과 좋게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수관도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순철이 까닭 없이 덤벙대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요리상이 들어왔다.. 순철이나 깆성도 다 같이 산홍의 단골이며 봉이다. "참말, 김단장은 오래간만이에요. 왜 그리 얼굴을 볼 수 없을까? 제가 뭘 섭섭하게 했습니까?" 산홍이 슬쩍 기성의 신경을 건드려본다. "바빠서 그래." "그게 아닐 겁니다." "무슨 소리." "섭섭해서 그러셨지요? 하지만 우리 잘못 하나도 없습니다. 월화가 그리 된 것 정말 우리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무슨 얘길 하나?" 순철이 궁금한 듯 묻는다. "글쎄 월화 아시지요?" "알지." "그애가 김단장 아버님 소실로 들어갔지 뭡니까?" "이거 보통일 아니군 그래." 기성은 쓰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집에만 매여 있는 애도 아니겠고 그리 된 연후에 우리도 알았어요. 정말 그러지 않아도 오해가 있으면 어쩌나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에 월화를 만났지요. 신색이 훤하더군요. 그때도 부디 본댁한테 잘하라고 누누이 타일렀습니다. 본시 심성은 괜찮은 아이니까." 간들간들 간드러지게 약을 올리는 건지 위로를 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눈웃음을 치며 산홍은 말했다. 본댁이란 서울네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성의 생모, 강제 이혼을 당하고 독골에서 시모랑 함께 사는 기성네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때문에 집안이 쑥밭이 됐다. 골치 아파서."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았지만 그러나 기성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소실 둘 나이도 됐지 뭐. 재력을 보나..." 순철은 어물쩍 넘기려 한다. "그럼 이사장도 나이 들면 소실 두겠네요?" 옆구리를 찌르듯 산홍이 말했다. 그는 김기성과 순철의 만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거야 세대가 다르지 않는가." 따근따근하게 데운 정종이 든 주전자를 산홍이 들었다. "그거 이리 내놔." 순철은 사기주전자를 산홍으로부터 받아든다. "오늘 밤은 우리 동창들의 모임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하니 산홍이는 좀 비켜주는 것이 어떨까?" "네, 네 그렇게 하옵지요. 한데 다른 젊은 아이들도 들여보내지 말까요, 이사장님?" 농치듯 말했다. "필요없어. 후배들 앞의 선배 체통이 있지." "네, 네 알아서 기겠습니다." "저 늙은 여우." 산홍이가 나가자 대신 술을 따르려는 수관의 손을 밀어내고 순철은 자신의 술을 부었다. "자아 그러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건배하자." 순철은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멋쩍은 듯 앉아 있는 기성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술잔을 들라는 시늉을 한다. 수관과 윤국은 엉겁결에 술잔을 들었다. 어색한 건배가 끝나자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서로 등지고 지낼 까닭이 뭐 있겠나. 우리 모두 오 년 동안 잔뼈가 굵은, 빛나는 역사의 진주중학교 동창들 아닌가, 수관이는 사불여의하여 졸업은 못했지마는, 지금이 어느 때고? 전쟁중이다. 언제 적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할지 모르는 비상시국, 내일이 어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서로가 협심을 해서 살아도 아쉬움이 남을 세상인데 하잘것없는 감정 때문에 서로 원수 보듯 해야겠나? 안 그런가? 기성아." "내가 뭐 어쨌기에." 볼멘 소리다. 그 목소리에는, 너희들이 나를 깔보았고 너희들이 나를 소외했으며 날건달로 치부하지 않았느냐, 아비 돈으로 이름 없는 전문학교 나왔다 해서 빛나는 너희들 수재놈들, 나를 둔재라 하지 않았더냐, 나도 오기는 있는 놈이다,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서도 우등생 되라는 법 없지, 홍수관의 꼬라지를 보아, 그런 투의 항의가 있었다. 하기는 그랬다. "뭘 어쨌다기보다 서로 소원했던 것은 사실이고, 나이가 가르친다는 말도 있듯이 이제는 그래서 안 되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네나 나나 명색이 동경 유학생 아니었나. 그리고 좁은 지방이지마는 그래도 우리 조선인 사회에서 먼저 깼다 할 수 있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만큼 전후좌우를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안 그런가, 기성아." "..." "똑똑한 후배 충고도 들어줄 줄 아는 아량과 어려운 후배 도와줄 줄도 아는 의리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또 후배는 후배대로 어려울 때 선배를 떠받쳐주는 힘이 되어야 하고 상부상조, 독불장군으로는 못 사네. 너희들도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선배는 선배인 게야. 너희들이 선배를 존경하는 것은 즉 너희들 자신의 힘이다. 이끌어주고 떠받쳐주고 그래야 뭔가 돼도 되지 않겠는가. 그게 사람 사는 게 아니겠어? 지난 일이야 어떻게 되었든 그건 다 지나간 일이고 또 그것은 부모들 세대의 일이니까 우리가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방식이 있어. 내 말이 틀렸나?" 부모들 세대의 일이란 자신과 기성과 윤국의 집안이 얽혔던 지난 날의 가정부 군자금 강탈 사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윤국은 순철의 저의를 깨달았는지 "네, 그렇습니다. 순철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동의를 하고 나섰다. 기성은 좀 의외란 듯 윤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희들 말만 그러지 말고 선배 술잔 비워두고 왜들 그러고 있나." "네." 이번에는 수관이 기성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사실 김기성이 날건달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허영심이 강하고 한편 단순한 면도 있었다. 그것은 그의 성장 과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서울네가 본가로부터 남편과 아들 둘을 떼어내어 독점하기 위한 책동 중 하나가 기성과 기동을 회유하는 일이었다. 생모 막딸이 보잘 것 없고 무식하며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두 아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물론 환심을 사기 위해 아이들 요구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으며 결국 자기 중심의 이기적 성품으로, 인내심 없고 나태하며 인생을 향락적 시각으로 보는 방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생모를 경멸하며 어떤 위기에 섰을 때도 생모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기성은 그러나 서울네에 대해서 애정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형식이었을 뿐 그에 대한 마음은 차가웠다. 아버지 김두만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옛날 주종 관계였다 해서 그 열등감 때문에 까닭 없이 최참판댁에 증오심을 갖고 있는 두만과 달리 기성은 그런 것은 없었다. 자신이 무시당하며 최씨네 우수한 형제들에 비하여 열등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것은 이순철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디 두고보자는 심보였던 것이다. 내면적으로 사실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동경 비슷한 것이 없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이해 상관 때문에 열렬한 친일파 행세를 해온 김두만에 대해서도 역시 기성은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는 아비가 모은 돈을 쓰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의식이 희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충성하여 앞길을 열어보겠다는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방단장은 아비가 따내준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기성은 거들먹거리고 다니면 되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고생하고 계시다며?" 기성은 윤국에게 뭔가 말을 해야겠다 생각한 것 같다. "네." "거 참 큰일이다. 시국이 이러니 쉽게 나오시지도 못할 거구." 서로간에 쌓여있던 것이 일시에 풀릴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일단 내딛고 보니 기성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순철의 사람 다루는 솜씨는 기성보다 한 수 위였고 윤국이나 수관은 나름대로 다 세파를 겪었기 때문에 역시 감정의 절제는 훌륭했다. "자네 동생은 지금 어디 있나." 순철이 물었다. "부산에." "취직은 했고?" "음 철도국에 있어." "그거 괜찮군." "그럭저럭인 셈이지 뭐." 기성은 동생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아까 듣자니까 산홍이가 극구 변명을 하던데 월화는, 혹 자네가 찍어놓은 아이가 아니었던가?" 화제에 궁했다. 해서 구차하게 꺼낸 말이었다. "예키! 순, 별 망측스런 소릴 다 듣겠네." 기성은 화를 내는 체했으나 슬그머니 웃었다. 그러니까 그런 관계는 아닌 모양이다. "집안에 분란이 생기니까 산홍이 그러는 거지. 하여간 골치가 아프다. 사실 아버지가 소실 두는 것을 좋아할 아들이 어디 있겠나."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소실 아닌가." "그거는 사정이 좀 다르지. 호적도 버젓이 돼 있고 소실이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생모는 아니지 않은가." "몰라, 그따위 일 생각하는 것만도 귀찮아. 육친, 흠... 육친에 대한 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거 습관 아닐까?" 밋밋하게 생긴 기성의 얼굴에 희미했으나 죄의식 같은 것, 회환 비슷한 것이 떠돌았다. "습관이라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씨가 생기면서부터 그건 변하지 않았던 습관이다." "하지만 자랄 때 환경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 어쨌거나 그거는 부모들의 책임이고 우리는 희생자야." "그럴까? 아무튼 쌍바람이 불었다. 아버지는 늦바람, 아들은 올바람." 윤국과 수관이 씁쓸하게 웃었다. 기성의 여자 행각은 유명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나야 뭐 소문만 요란했지 별 실속도 없지만 아버지 경우는 문제다." "어째서?" "백팔십 도로 변했거든." "아직 환갑 전이시지?" "음." "허무해서 아마 그러실 거다. 돈이 많아도 쓸 곳이 없고." "허무해서 그렇다는 말엔 나도 동감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업은 올스톱, 돈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부동산 매매나 된단 말가, 땅에서는 공출로 몽땅 나가버리니, 전쟁은 불리하고... 현재를 실감하는 데 여자밖에 더 있어? 나 역시 그래. 마음 붙일 곳이 있어야지. 나는 출발에서부터 야망 같은 것 없었으니까, 자네들 수재하고는 형편이 달랐어. 한 순간, 순간을 즐기다가 가는 거지 뭐. 어차피, 땅속에 들어가 썩을 몸 아닌가." 윤국은 그들 말을 귓가에 흘리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양현의 모습이 다가오기도 했고 송영광의 우울한 얼굴이 다가오기도 했다. "형님." 수관이 순철을 불렀다. "왜?" "내일 윤국이 떠나는데 이쯤하고 우리는 가야겠습니다." "내일 떠나나?" 기성이 윤국에게 물었다. "네." "일본의 사정은 어떤가?"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소문으로는 소개가 시작됐다 하던데?" "더러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시골로 가는 모양이더군요. 그러나 아직 소개 명령이 내린 것은 아닙니다." "만일 소개 명령이 내린다면 자네도 동경에 머물기가 어려워질텐데..." 경방단장인만큼 그런 정보에는 빠른 것 같았다.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아야겠지요." "그나저나, 지금 일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순철이 기성을 보며 말했다. "생각이라니?" "이태리는 이미 항복을 했고 독일도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항복했으며 북아전선의 독일군 역시 그러니 전세를 만회하기는 어려울 게야. 독일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고들 있는데, 일본도 역시 철퇴, 전멸, 전황이 그러하니... 만일의 경우 일본은 본터에서의 결전을 각오하고 있는지, 각오를 하고 있다면 대책은 있는 건지." "본토에서까지 미군이 상륙하게 될 경우 그건 일본 국민 전원의 옥쇄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얘기가 그렇게 되자 수관은 서둘러 일어섰다. "형님, 우리는 그만 가볼랍니다." "그래, 그럼 가보아." 수관과 윤국은 작별인사를 하고 나갔다. "자, 우리끼리 더 마시자." 하고 순철은 산홍을 불렀다. "이젠 선배 체면 안 차려도 되겠네요." 산홍이 웃으며 왔다. "술 떨어졌어." "술도가도 아닌데 술이 무진장 있습니까? 어디," "술도가도 바닥났어." 기성이 말했다. "아주 폐업을 했습니까?" "폐업 직전이지 뭐." "그래도 그 동안 많이 벌었으니까, 그렇지요? 김단장." "못 벌었다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건 아버지 소관이니까 난 잘 몰라." "한땐 김단장이 맡았다는 소문이던데요?" "그거 다 빈말이고 아버지가 나한테 맡길 것 같아? 오죽했으면 독골 땅을 팔아서 썼을까? 삼촌하고 육박전까지 하면서, 그 일 땜에 나는 독골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됐다." "추옥이한테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지요?" "지난 얘긴 왜 해." "지난 얘기는 김단장이 먼저 했습니다." "하긴 다 돼 가는 세상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리. 그래 추옥이는 잘산다 하든가?" "네애, 영감님이 신주단지 위하듯 한답니다." "그게 젊은 나를 마다하고 늙은 것을 따라갔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늙기는 했어도 그 어른 풍류를 알지요." "그러면 나는 풍류를 모른다 그 말인가?" "압니까?" "모르지, 허허어 헛헛헛..." "풍류가 뭐야?" 순철이 물었다. "멋이지요." "멋? 멋이라...멋." "동경유학생들은 그런 것 몰라요. 신식이지요." "그러면 기생은 구식을 좋아한다 그 말이로군." "그렇지는 않아요. 멋이란 신식 구식을 다 꿰뚫는 거랍니다. 일본에는 멋이란 게 없다 하더구먼요. 해서 일본 기생은 몸을 먼저 팔고 조선 기생은 마음을 먼저 판다는 것입니다." "유식하군. 제법 유식해." "저도 들은 풍월이지요." "그러니까 얘기를 하자면 진주 기생은 논개다?" "황진이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그 말은 맞다. 일본에는 관기라는 게 없어. 관기란 무엇이냐, 따지고 보면 선비 상대가 아닌가. 칼잽이들하고는 다르지. 하핫핫핫... 기성아, 말 되지?" "그렇군." "우리 동경유학생들이 칼잽이 밑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멋이 없다. 그 말인 게야."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노닥거리다가 산홍의 집을 나온 두 사람이 서로 거머잡고 비틀거리다가 헤어진 것은 열두 시가 지나서 였다. 집으로 돌아간 기성은 그냥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보소, 보소! 일어나이소." 아내 금옥이가 흔들어 깨우는 것을 "왜 이래?" 손을 뿌리치고 기성이 돌아눕는데 "큰일났어요." 비로소 기성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는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안방에 가보이소. 아버님이 어머님이, 칼부림이 났습니다." "뭐?" 기성은 벌떡 일어섰다. 마당에 나갔을 때 사방은 뿌옇게,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날 죽여! 죽여라! 이 개상놈아!" 쇳된 서울네 목소리가 귀청을 뚫고 지나갔다. "이년이 푼수를 몰라도 유만부동이지, 어디다 대고 쇳바닥을 함부로 놀리나. 니 푼수에 안방마님?" "망태 메고 이집 저집 빌어먹으러 다니던 목수놈이 뉘 덕에 오늘이 있어? 내죽고 니죽고 함께 죽자!" 놈을 붙이며 막나가는 것이 오늘 처음은 아니었다. 패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기성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엌 식칼이 저만큼 나동그라져 있었고 두만이와 서울네는 한덩어리가 되어 방안에서 구르고 이었다. "남부끄럽게 와들 이러십니까! 길게 이럴라면 차라리 갈라서이소!" 하면서 기성은 뜯어말렸다. 산발을 한 서울네는 작은 마귀 같았다. 두만이는 곰 같았다. 비대해진 몸에 숨이 가빠서 허우적거렸다. "내 일생이 허사구나! 이렇게 배반을 당하다니 내가 죽어도 이 원수는 갚고 말 거야. 그냥 물러설 내가 아니다! 갈라서라고? 이 놈 기성아! 감히 그 말이 너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느냐! 내가 너희 형제들을 어떻게 키웠다고, 갈라서라고? 왜 내가 갈라서노. 이 목을 쳐죽일 놈들! 너희들 빈 몸으로 나가라! 나가아! 피알 하나도 다 내 것, 너희들 게 뭐 있어!" "남산 쇠가 웃겄다. 저년이 아주 미쳤구마." "미쳤다고? 그래 미쳤다! 미쳤어! 거리 거리를 미쳐서 쏘다니며 저주할 거야! 아아, 아아, 정말 이대로는 못 살아! 불을 지를 거야! 모두 함께 죽어야 해!" 서울네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분노가 충천하여 그의 조그마한 몸뚱이도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완전한 타인이었다. 삼십 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아온 남자와 여자의 정의는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두만은 월화집에서 자고 새벽녘에 돌아왔다. 밤새도록 이를 갈며 눈 한번 붙이지 않았고 식칼을 옆에 두고 기다리고 있던 서울네는 방으로 들어서는 두만을 보는 순간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우람한 남자의 손은 서울네의 손목을 비틀었고 칼은 방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서울네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서울네 없는 오늘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진실이다. 김두만이 서울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울네가 진주서 쪼간이 비빔밥이라는 음식점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서울네 말대로 연장망태 짊어지고 과거 윤보가 그랬듯이 목수로 방랑했을지 모른다. 오늘 김두만의 부는 그 기틀이 서울네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만큼 서울네는 전횡을 했고 유별나게 가족으로 똘똘 뭉쳐 있던 김씨일가에서 김두만을 잘라내었으며 부모와는 등졌고 조강지처 막딸과는 기어이 호적을 팠으며 공부시킨다는 명목 아래 진주로 데려온 아들형제도 자식 없는 그 자신을 위해 독점하고 말았던 것이다. "네년이 나한테 칼을 들이대 놓고서도 그 자리가 온전할 것 같나? 독사 같은 년, 내가 그거를 모리고 이날까지 살았제. 만정이 떨어진다." 서울네는 새우같이 등을 꾸부리고 앉아서 눈을 치뜨고 두만을 노려본다. 힘이 다 빠져서 입도 몸도 뜻대로 놀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래가지고는 어디 마음놓고 집이라고 찾아오겄나? 저년은 서방 밥그릇에 비상 타고도 남을 년이다. 생각해보믄 저년으로 인해서 부모형제하고 등졌고 죄 없는 제집 민적까지 파고 자식놈은 저모양..." 새우처럼 꾸부리고 있는 서울네 등이 튀듯 움직였다. 전등빛을받고 서 있던 기성이 "지금 와서 그런 말씀 하시면 뭐합니까." 볼멘소리로 말했다. "이마작해서 이런 말 하는 나를 내가 생각해봐도 가소롭다. 내가직일 놈이제. 눈에 명태 껍데기 붙이고 살았는갑다. 돈이 있이믄 뭐 하노. 전쟁이 쳐들어오믄 그거 다 소앵이 없는 기라, 내 맘이 갈바를 몰라 설령 바람을 피웠기로, 소실 하나 얻었기로 그기이 무신 큰 죄고. 세상에 저리 흉악한 년이 어디 또 있겄노. 남정네 말이라카믄 죽는 시늉도 하는 제집 본색이 저러크럼 흉악할 줄은 차마 몰랐다. 저년이 지 탓으로 내가 오늘 이리 됐다고 말말이 들고나오는데 그까짓 음식점 해가지고 이리 됐단 말가? 그거야 새발의 피, 제년이 눈먼 돈 몇 푼 가지고 떠돌아댕깄이믄 못된 놈한테 걸리서 돈털리고 버림받고 지 신세가 어찌 되었일꼬? 안방 차지하고 눈에 뵈는 사람이 없는 오늘을 누맀일까? 생각할수록 푼수 모리는 제집이다. 설령 내가 소실을 얻었다 하더라도 제년같이 월화가 안방 넘볼 기든가. 다 지 한 간이 있어서 저 지랄이제." 순간 서울네는 용수철같이 튀어올랐다. 그리고 비호같이 달려들어 두만의 머리칼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년이!" 기성이 뜯어말린다. "저울에 달면 한품도 차가 없겠습니다. 아무리 막돼먹은 자식이지만 부모의 체면이 있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렇게 실랑이를 해가 돋을 때까지 했다. 결국 조반도 못하고 김두만과 기성이 나가버린 뒤에야 안방은 흐느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을 뿐 조용해졌다. 집안이 좋다는 조건 하나로 데려온 며느리 금옥은 말없이 찬모와 함께 아침준비를 했고 밥상을 안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어머니 아침진지 드시이소." 하고 웅크리고 있는 서울네 앞에 밥상을 내려놓는다. "목구멍에 밥이 내려가겠느냐."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좀 드셔야지요. 어젯저녁도 안 드싰는데." "거기 좀 앉아라." "네." 금옥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아가." "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말할 사람은 너뿐이니... 이렇게 적막강산일 수가 없다. 내 살아온 걸 어느 누굴 보고 다 얘길 하겠니?" 실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오늘을 이룩했는가 귀에 목이 박이도록 며느리에게 얘기해왔다. "그걸 아버님이 모리실 리 없십니다. 화가 나믄 마음에 없는 말도하게 되니까 어머니께서 이해하십시오." 노리끼하고 잔주름이 모인 서울네 얼굴이 한때 멍하니 금옥을바라본다. '저러다가 미치기라도 하믄 오짤꼬?' 금옥은 서울네 시선에서 얼른 비킨다. "어떻게 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시간이 지나면." "변했다. 변해도 기막히게 변했어.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곧이듣던 사람이 어째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살고 싶지가 않아.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이런 걸까. 세상에 이런 배신이 또 어디 있겠니. 내 죄라면 자식 못 낳은 그것밖에 더 있어? 생각하면 기성이 그놈도 괘씸하다.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고 공부를 시켰는데, 지 에미야 낳았다뿐이지 아무 한 것이 없다. 그놈이 지 아버지한테 말 한 마디 하는 법이 없고, 뭐 갈라서라고?" "자기 행실도 그런데 아버님보고 머라 카겄십니까."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키운 공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오리새끼 물로 간다더니." "독골에 발 끊은 지가 언젠데요. 처자 생각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다 소용없네. 나만 혼자, 나만 혼자 신다 버린 짚세기 꼴이 되었구나. 누굴 믿고 살꼬, 나한테 자식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억울하고 서럽지는 않을 게야." 서울네는 또 흐느껴 울었다. "옛날에는 나 없이 하루도 못 살것처럼, 내 말이라면 천도 복숭아도 따올 것처럼, 돈벌 때는 둘이서 밤 가는줄 모르고 일했으며 누가 내 마음에 거슬리기라도 할 것 같으면 대천지 원수로 삼던 그 사람이... 어이구 나는 못 산다 못 살아. 이제 와서 부모형제하고 등진 것도 나 때문이며 제집하고 민적 판 것도 나 때문이며 자식까지 잘못 길렀다고? 나 아니었으면 시골 구석에서 보리죽도 못 먹을 주제에 내 덕에 실컷 보고도 눈엣가시처럼 내 마음에 응어리를 심었고 그까짓 추물, 나 아니라도 데리고 살았겠어? 애당초 정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날 원망해? 정말 이대로는 못 죽는다. 아 이고!" 흐느끼다가 자기 머리를 쥐어 뜯는다. "어머니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시이소. 이래봐야 어머니만 상하십니다. 이럴수록 잡술 것 다 잡숫고 냉정하게 생각하셔야제요. 지사 뭐 하도 당하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오는가부다, 나가면 나가는가부다, 그런께 오히려 심관이 편하더마요." "어째 너 경우와 내 경우를 함께 생각하나. 내 집에 기르던 강아지한테 물려도 유만부동이지. 아아, 정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천하의 사내들이 다아 첩질을 해도 자기는 못 그런다, 아암 못그러고 말고! 내가 그만 월화 그년부터 죽여버릴까? 눈에서 피눈물 나는 꼴을 못 보고는 나 눈을 못 감는다! 옛날 김목수, 그 무지랭이 시절로 되돌려놓지 않고는 나 떠날 수 없어." 하면서도 서울네는 오늘 지금의 자기 처지가 믿어지지 않았다. 호적상 정식으로 마누라가 된 후 서울네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엊그제 일인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앞길을 가로막을 그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부모 형제에 대한 원망도 김두만이가 더 많이 했고 막딸이와의 인연을 저주했던 것도 서울네보다 두만이 쪽이 강경했다. 물론 그것은 다 서울네의 입장을 생각한 때문이다. "나가보아. 너하고 얘길 한다고 속이 풀리겠느냐?" "진지 좀 드시지요.?" "아니다. 먹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거라." 하다가 "아가." 새삼스레 불렀다. "너 혹시 월화 그년하고 살림 차린 집 아느냐?" "지가 우찌 알겄십니까?" "됐다. 어서 상 들고 나가." 며느리가 나가자 서울네는 방바닥에 쓰러지듯 눕는다. 비로소 온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꿈도 아니었고 현실도 아니었다. 서울네는 자기 자신이 한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보따리 하나 끼고 삼가람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보기도 했다. 아득한 옛날 김두만을 만나기 전의 자기 모습이었던 것이다. 비아냥거리는 시어머니의 얼굴이 지나가고 노려보는 시아버지의 모습도 지나갔다. 말을 걸어도 대답 안 하던 시동생의 얼굴도. 그야말로 적진 속에 갇힌 자기 자신을 서울네는 보았다. "아아, 못산다. 못살아!"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들이 일제히 자기 자신을 향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달도 차믄 기우나니, 남한테 몹쓸 짓 하고 죽는 날까지 영화를 누릴 줄 알았던가?' 그들은 일제히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일어나 앉아 보아도 다시 드러누워 보아도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흐느껴 울어도 보고 울부짖고 넋두리를 해보아도 서울네에게 보이는 것은 캄캄한 절벽뿐이었다. 쌓아올린, 삼십 년 가까이 쌓아올린, 철통으로 믿었던 성이 무너졌다는 실감 이외, 한줄기 희망의 빛도 볼 수 없었다. 처음 두만이가 어떤 나이 어린 기생과 바람을 피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울네는 새파랗게 질려서 두만에게 따졌다. "어째 그런 소문이 돌지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제가 알아듣게 당신이 해명을 해보세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손발이 닳게 두만이 빌어도 서울네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사내가 바람피는 것,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따지나." 뜻밖에 두만은 냉담하게 말했다. "지금 뭐라 했습니까? 제가 혹 잘못 들은 것은 아닙니까?" "삼 십 년 동안 죽어라고 돈을 벌었으니 이자는 나도 숨구멍 좀 터 보자. 머 그게 크게 잘못된 일가?" 두만은 주저하는 빛도 없이 뇌까렸다. 어이구, 사람의 탈을 쓰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 혼자 돈을 벌었어요? 혼자서 재산을 만들었어요?" "누구한테 눈을 흡뜨고 달라드노! 머?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이면 그짓 못할 거예요." 했으나 서울네는 허둥지둥 이었다. 이런 사태가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도 사람이니께 그런다 와? 사내로 태어났이니께 그런다, 우짤래? 흥, 언제까지 제집 밑깔개가 되어서 살 줄 알았더나?" 서울네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응수하려다가 기가 넘어서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두만은 나가고 집에 없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바람을 피운 것도 그렇지만 사람이 그리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조금 전의 일이 과연 생시였던가 의심스러웠다. 서울네는 그 후 두만이 집에 들기만하면 싸움을 걸었다. 믿어지지 않아서, 확인하기 위하여 싸움을 걸었다. 억울하고 분하다 하며 땅을 치고 통곡을 했으며 때로는 애원도 해보았지만 김두만의 식어버린 마음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한달 가량을 서울네는 지옥과 같은 속에서 발버둥치며, 결국 행동도 언어도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으며 그 자신 옛날과는 전혀 다른 여자로 변해갔던 것이다. 예사로 놈자를 붙이며 욕설, 육박전을 하고 발광을 했다. 외박을 한 것은 어젯밤이 처음이었다. 서울네는 위협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진정 두만이 나타나기만하면 죽이리라 마음먹었다. 식칼을 놔두고 기다린 긴긴 밤, 그것은 사랑을 잃었다는 절망감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유에 대한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소유를 위하여 서울네는 긴 세월을 걸어 왔다. 한 남자를 소유하기 위하여, 남편을 소유하기 위하여, 아들 둘을 소유하기 위하여, 재물을 위하여, 남들보다 우월하며 남들에게 군림하기 위하여, 그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김두만이 아니었어도 그랬을 테니까. 하여튼 그 모든 것을 얻었건만... 서울네는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집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이미 오래 전에 팔아버린, 비빔밥으로 유명한 쪼깐이 집이었다. 그것을 인수한 여자가 기생 출신이었고 오가며 인사는 하고 지내는 처지였다. 서울네는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주인여자를 불러내었다. "우짠 일입니까?" "좀." "하여튼 들어오시이소." 주인여자는 마음속으로는 '니나 내나 다를 기이 뭐 있노? 돈푼 있다고 갈롱을 피운다마는 니 근본을 누가 몰라서?' 했으나 겉으로 반색을 했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추세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어쨌든 부잣집 유지의 마누라가 아닌가. "들어갈 거는 없고, 나 뭣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말심 하이시소." "혹 월화라는 기생르 아는지." "알지요." "어디 사는지 그것도 알아요?" "무신 일 땜에 그럽니까?" 주인 여자는 그간의 사정은 도통 모르는 눈치였다. "만나볼 일이 있어서... 어디 사는지 그걸 알아야겠는데."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 참 그 아이 오라비가 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고 있는데 거기 가서 물어보시이소." "글세 어쩔까?" 하다가 "사정이 있어서 부탁을 하는데, 누구 심부름시켜서 알아올 수 없을까요?" "그야 어렵지 않십니다. 우리집 아아들 시키지요." "한데, 내가 그러더라는 말은 말고 댁이 물어보는 것으로, 그래 주었으면 좋겠는데." 주인여자 얼굴에 의혹의 빛이 돌았다. "부탁이오. 까닭은 묻지 말고..." 찜찜해하는 것 같더니 "그러지요." 겨우 승낙을 했다. "고맙소. 나 보답하리다." "하여간 아이를 보낼 테니까 들어와 기다리시이소." "아니 걱정 말아요.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주인 여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심부름꾼을 내보내는 것 같았다. 서울네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이를 갈았다. 월화를 만나 어떻게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다. 무조건 달려가는 그런 심정이었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나를! 이게 내 공로에 대한 보답이란 말인가' 이윽고 주인여자가 나타났다. "저기 술도가 뒤에 있는 기와집이라 합니다. 기와집이 두 채 있는데 큰 기와집이랍니다." "알았어요. 한번 날 찾아와요." 서울네는 휭하니 돌아섰다. '술도가 뒤라고? 뻔뻔스럽게, 지척에다 숨겨두었구먼.' 저녁도 굶고 아침도 굶었는데 서울네는 기운이 펄펄 나서 달리듯 걸어간다. '온종일 거기 쳐박혀 있었구먼! 벼락맞을 놈의 인사! 어떻게 하면 이 분을 다 풀까.' 김두만이 월화에게 사준 기와집은 아담하고 조촐했다. 품에 옴싹 들어오는 계집같이 간드러져 보이기도 했다. 서울네는 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루에는 보자기로 싸놓은 물건이 두개 있었고 어디 나갈 채비를 하는지 남치마에 옥색저고리를 입은 월화의 됫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일하는 계집아이가 물었다. 그때 뒤돌아선 월화는 몹시 놀란다. "여기가 김두만이 집이냐?" 월화를 노려보며 서울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월화는 눈을 내리깔았다. 결코 녹녹해 뵈는 여자는 아니었다. "하면은 너는 누구냐!" "아시고서 오신 모양인데 새삼스럽게 묻기는 왜 묻습니까." 항상 노리끼했던 서울네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누구 허락받고 김두만의 집에 들어왔지?"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지요? 영감께서 들라 해서 들었습니다." "아아니 이년이!" 달려들어 월화의 치맛자락을 잡는 순간 치맛말이 터져서 치맛자락이 흘러내렸다. 월화는 그 손을 착 뿌리치면서 "점잖지 못하게 왜 이러시오!" "뭐 어쩌고 어째? 네년은 점잖아서 늙은 영감 첩살이하냐?" "지난날, 독골 본댁에서도 당신께서 이러셨던가요?" 나이 스물일곱, 김두만의 팔자가 그러했는지 월화도 몸집은 작았다. 모습은 연연해 보였지만 아주 당차다. "이 주리를 틀어서 죽일 년이 뉘 앞에서 감히." 했으나 이미 약세였다. "기생 팔자 남의 첩살이하기 예사 아니겠소? 불만이 있으면 영감한테 말할 일이지, 저보고 따질 이유 없습니다. 혹, 독골의 본댁이 그러신다면 모를까, 나도 남사스럽지만 댁도 얼굴에 철판 깐 행실이오. 이치가 안 그렇습니까?" "나는 호적에 오른 정처다! 그걸 몰라 하는 소리냐!"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민적 파라는 말은 안 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기생생활 십여 년, 수작에는 이골이 나 있는 월화에게 서울네는 적수가 아니었다. 이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몸집이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삼십대쯤의 사내가 뛰어들었다. 그는 서울네를 째려보다가 "뭐가 우찌 됐다 카노." 하고 월화에게 물었다. "독골에 갈려고 막 나서려 하는데 저분께서 오셔서, 뻔한 일 아니겠어요?" "엉겁결에 집을 가르쳐주고 이상하다 싶어서 비빔밥집에 갔더니." 하다가 월화오라비는 뻗장나무같이, 거의 넋을 잃고 서 있는 서울네한테 시선을 보낸다. "뭐하러 오셨어요. 장사 안 하고." 월화 말에는 대꾸없이 사내는 "기생 누이를 두었으니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겄지마는, 이보시오, 피차 남사스러운께 그만 돌아가소. 월화가 잘한 것도 없지마는 묵고 살자니 할 수 없고 들내놓은 노류장화, 따진들 무신 소용이 있겄소?" 월화오라비는 일단 온건하게 나온다. "댁도 월화를 면박할 처지가 아니지 않소. 월화를 나무라기보다 돌아가서 영감 맘을 돌리놓는 것이 상수 아니겄소?" "독골은 왜 가나!" 울부짖듯 말했는데 서울네 목소리는 피리 소리 같았다. "도리 아니겠소? 내일 모레가 추석인데 소실은 소실의 도리가 있는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한마디로 비참했다. 그것을 느꼈는지 월화오라비 얼굴에서 도전적인 빛이 사라진다. 그가 달려온 것은 작당을 해서 월화에게 폭행을 하고 살림을 때려부수고, 그러는 줄 았았기 때문이다. 치맛말이 뜯어진 것으로 보아 다소 실랑이가 있었던 것은 짐작이 되지만 일대 일이라면 젊은 월화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가 다 팔자 기박해서 이런 지경이 된 것 아니겄소. 오기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닌 기라요. 그만 돌아가시이소. 월화 니도 같은 여자 입장이니 풀세게 그럴 거 없다. 전사야 우떻게 되었든 그거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니나 내나 주제넘는 짓이고, 다 그거는 남정네 하기에 매인 일 아니겄나. 기왕지사 일은 이렇게 됐으니 월화 니가 굽히는 기이 순서일 것 같다. 월화는 오라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서울네는 멍청히 서 있었다. 발광을 하다가도 멍청해지곤 하는 것이 요즘 서울네의 버릇이었다. "독골에는 갈 것 없다. 가만히 들어푸리 있거라. 당을 만들어서 머할 기고? 영감하고 천년 만년 살 기가? 기영머리 마주 풀고도 갈라서는 기 기생 팔자..." 하다가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서둘러 붙여문다. 가난한 것이 죄지, 장바닥에서 월화오라비는 사리 밝은 사람으로 통해 있었다. 오라비로서 누이를 기생으로 내보낸 것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멍청하게 서 있던 서울네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아니, 가부렸네?" "오빠가 오니까 봉변당할까 봐서 갔겠지요 뭐." 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버리면서 "월화야." "왜요?" "아까는 머한다꼬 독골 가느니 어쩌니, 그런 말을 했노." "구데기 무서버서 장 못 당구겠소." "그렇게 말하는 기이 아니다. 그 여자 처지나 니 처지가 다를 거머 있노? 넘한테 적악하기로는 매일반 아니가. 오히려 니야 공로없이 영감 덕에 호강하는 셈이고 그 여자는 그럴 만도 하다. 그 여자가 피나게 벌어서 오늘 그 집안이 일어선 거를 진주서는 모릴 사램이 없다. 예사 잘되고 보믄 시기심에서 못한 것만 들추게 매련인것이 인심 아니겄나? 그만 알 듯 모르듯 독골에 다니오믄 되는 긴데 그거를 이봐란 듯 그 여자 앞에서 나뵐 것은 머 있노? 그거는 잘한 짓 아니다." "오빠는 참." "하기야 기생 오래비가 입이 열 개라도 무신 할말이 있겄노. 내가 집안 처리를 잘했이믄 니가 기생이 되었겄나." 오누이간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집안도 정적에 싸여 있었다. 빨간 벽돌로 야트막하게 담을 산 장독가에 철늦은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나 갈란다." 월화오라비가 일어섰다. "오빠." "..." "영감이 장터 가게 하나 비면 오빠한테 주겠다 하데요." "그런 소리 마라. 지금 난전에서도 우리 식구 입에 풀칠을 한께, 니 장래나 생각해라. 항상 젊나?" 하고는 대문을 열고 나갔다. 월화는 마룻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독골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었다. 어젯저녁, 밥상을 물린 뒤 식곤증에 빠졌는지 비스듬히 누워서 숨가빠하는 김두만에게 독골 다녀오겠다 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쩔까?' 오라비의 충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네가 와서 야료를 부려기분이 상한 탓도 아니었다. 서울네가 오기 전부터, 준비해둔 것을 마루에 내어놓고 옷을 갈아입을 때 월화는 망설였던 것이다. 독골에는 달포 전에 한번 다녀온 일이 있었다. "우리하고는 인연 끊어진 지가 오래인데 각시가 그 몹쓸놈의 인사하고 어떤 사인지 모르겄지마는 찾아올 까닭이 없고 절 받을 까닭도 없제." 백발이 성성한 두만의 모친은 월화의 절을 받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 "어무이도 참, 여까지 왔는데." 기성네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의 머리도 반백이었다. 늙어서 더욱더 체구는 조그맣게 되어 었었으며 얼굴빛은 몹시 검었다. 며느리 말에 다소 누그러진 두만의 모친은 "그 숭악한 인사가 각시 자네보고 가보라 하든가?" 역시 궁금하기는 했던지 물었다. "아닙니다. 제 자작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도리일 것 같아서." "도리를 아는 사램이 남의 소실로 들어왔나?" 아픈 곳을 찔렀다. "가세가 곤궁하다 보니...기생 팔자를 어쩌겠습니까?" 하는데 월화는 그 순간 목이 메었다. 두만의 모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기성네는 점심을 먹고 가라고 권했다. 돌아오는 길은 나룻배를 타지 않고 걸었다. 걷다가 월화는 짙은 노을을 바라보며 사람 없는 강가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도리를 아는 사람이 남의 소실로 들어왔느냐, 그 정도의 수모, 비난은 밥먹듯 받아온 신세, 새삼스럽게 눈물이 흐를 이유도 없겠는데 월화는 울었던 것이다. 얼굴이 새까맣고 반백이 된 중늙은이, 본댁 티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낯가림하는 아이처럼, 그리고 수굿했던 김두만의 본마누라, 그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월화는 가슴 아프게 느꼈던 것이다. 호적이야 어찌 되었건 귀밑머리 마주 풀고 일부 종사한 여자의 당당함을 월화는 느꼈던 것이다.. 늙고 못생겼으며 난쟁이같이 볼품없는 체구 그 어디에선가 풍겨나는 당당함, 인생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어머니 후광 속에 있던 그, 이웃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시동생, 손아래 동서 그리고 조카들에게 떠받침을 받고 있는 기성네 처지는 견고한 성만 같았다. 그것이 부러웠다. 자기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자존심인 그것. 아무나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 서로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묶이어 그늘에서 숨어 사는 것도 아니며 돈이 많아 호강은 한다지만 늙은 영감 수발이나 드는 소실 신세가 서러워 월화는 울었던 것이다. 결국 월화는 치맛말이 뜯어진 남색치마 대신 검정치마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초행 때보다 두만의 모친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못 이기는 체 절을 받기도 했다. 처음 냉대로써 며느리나 동네사람들에게 체면은 섰다 생각한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보고 마을왔던 이웃집 노친네가 말했다. "하모,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초행 때도 그랬지만 동네 사람들이 월화를 배척하지 않고 은근히 호의를 보내는 것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서울네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어디 세상에 서울년 그년같이 모질고 독한 년이 있일까, 기성 아배 발걸음 끊은 지가 몇 해고?" "그거사 머, 문전에 발 딜이놓기만 하믄 내 죽는 꼴 볼 기라고 했인께." 죽일 놈 살릴 놈 했으나 역시 어미의 마음, 천하 악독한 불효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고, 폭력으로 이혼장에다 며느리 지장을 찍게했을 때는 두 번 다시 아들과 상면하지 않으리라 두만의 모친이 결심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도 세월이 흐르니 잊혀졌고 내심으로 설명절 제사 때가 되면 혹시 아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리기도 했으니 월화의 출현이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 반갑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자식된 도리, 발걸음을 끊다니 말이나 되는 일이든가." "우리 고향의 석이어매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들 소식도 모리고 십수 년을 살고 있구마는. 품안의 자식이제, 흠, 자식 없는 중이 사까?" "이자는 작은각시를 보내는 거를 보이 기성아배도 길 털라꼬 작심을 한 모앵이요." "누구 마음대로?" "길을 두고 뫼로 가나? 부모자식이 우떤 인연인데, 역절질을 해도 오믄 받아야제." "그런 말 마소. 민적 도로 가지오기 전에는 어림없구마." "그 제집이 다른 거는 다 그만두더라도 우애 천륜을 끊는단 말고. 각시도 그 뽄만은 봐서는 안 될 기구마. 본처 맴을 달래놔야 작은집 살림도 편한 법, 본처 눈에 피눈물나게 해서 잘되는 것 못 봤인께. 사내들이란 과부나 여염집 제집하고 오입질을 하믄 본처 박대하기가 일쑤라 카고, 화류계 제집하고 오입질을 하믄 개심을 하여 본처한테 돌아온다는 말들이 있는데 그것 다 각시 하기 탓인 기라 안 그렇소? 기성할매." 마을온 노친네 말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월화는 "어머니 이거 받으십시오." 하고 보따리를 내밀었다. "멋꼬?" "옷감입니다." 하고는 허리를 굽혀 보따리를 푼다. "치수를 알았으면 지어서 가져왔을 건데 몰라서." "그거사 무신 작은며느리 손끝이 야물아서 옷 맨드는 거사, 득달 겉이 해 내놓을 긴데." 노친네가 두만의 모친을 대변하듯 말했다. "이거는 어머니 것입니다. 쑥색은 형님, 분홍색은 작은댁 동서 거구요." "옷이야 머 기럽나. 늙은 기이 입고 나갈 곳도 없고." 하는데 또 노친네 "그런 소리 마소. 늙을수록 옷은 잘 입어야 대접을 받는 기요. 참좋네. 이런 것을 어이서 샀을꼬?" 노친네는 부러운 듯 옷감을 만져본다. 쑥색과 분홍색의 옷감은 호박단이었다. 흰색은 하부타에 라는 천인데 일본서 만든 고급 견직물이었다. 포근포근 하고 눈이 부시게 흰 천이었다. "요새도 이런 감 파는 데가 있나?" 궁금한듯 노친네는 또 물었다. "포목점에서 피륙을 팔기나 합니까? 전에 끊어다놨던 것이지요." 월화는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그러믄 그렇지. 광복 몇 마 배급받는 것도 꿈자리가 좋아야 애댕기는 세상 아니가. 혼사를 할라 캐도 예단감 구하기가 그리 어렵단다 . 오새 나오는 갈창겉이 엷은 비단도 달라는 것이 값이고 그것도 솔옵을 알아야 천신을 한다 카이, 없는 놈들 찬물 떠놓고 예를 올리는 핑계가 돼서 좋기는 하다마는, 요새 이리 좋은 감이사 어디서 구하겄노. 참 좋네. 기성이할매는 복도 많소." "그런 말 마소. 복이 많아서 자식하고 담쌓고 사요?" "그래도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덮더라고 진주 김두만의 모친이라 카믄 어누 누가 하시하겄소." "속 모르는 소리 그만두소." "와 속을 모릴꼬. 못사는 자식이 하나나 있어야제. 여수 사는 딸만 해도 안 그렇소? 철철이 친정어매 옷을 해서 안 보내나, 명절 때 제사 때는 개기며 제수 비용까지 보내주고, 효성이 지극해서 그러겄지마는 그것도 없이 살믄 그럴 수 있겄소?" "그거는 그렇지마는." 처음으로 두만의 모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수의 우리 그 아이는 키울 때부터 실겁었고. 시집을 갔다 한 연에 는 복덩이 들어왔다고 시부모가 오금덩겉이 위했고, 아닌게아니라 그 아이가 들어가고 부터는 시가 살림이 불티겉이 일었인께. 하지마는 살림보다, 무엇보다 복 많은 거는 시부모를 잘 만나 일이요. 딸 사위보다 사돈네 일이라 카믄 어른들이 먼저 챙긴께." "그러니 그것 다 기성할매 복 아니겄고? 모진 시에미 만나서 친정에 울고 오고 울고 가는 딸을 봐야 하는 어매, 골병드는 사램이 얼매나 많다고." "내 평생 여수의 우리 가아 거겅은 안 했거마는." 평소 수다스럽게 자랑 같은 것 하는 성미가 아니었는데 딸 선이 얘기를 할 때는 두만의 모친 얼굴에 만족과 자랑스러움이 떠올랐다. "뿐이건데? 작은아들 기완애비는 우떻고? 그런 효자 없제. 형수한테 하는 거만 보아도 그런 시동생 없일 기고 밤낮으로 일해서 사람은 곱돌겉이 튼튼하니 무신 걱정이 있겄소. 성이사 그러거나 말거나 등 댈라 안 카고, 마아 아니할 말로 진주 나가서 성한테 비비대믄서 거들먹거리고 댕길라 카믄 못 그랄 것도 없제. 하야간에 기성이할매는 대복을 찌고 나온 기라요. 동네 사람들이 얼매나 불버라 하는지 아요? 그러고도 한 가지 근심이 없다믄 그거는 재앙을 부르는 일 아니든가배?" 노친네의 입담이 여간 아니다. "그래도 머니머니해도, 딸은 출가외인이요. 기완이애비는 제금을 나갔이니, 젯상 받들 사람이사 기성에미 아니겄고? 뿐만 아니라 기성에미는 우리 집 살림밑천이요. 고생도 많이 했고, 내사 마, 민적파가든 그날을 생각하믄 지금도 눈앞이 캄캄해지오." 그말은 월화 들으라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그거사 머 두말 하믄 잔소리제.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 눈앞에 안보요? 서울네 이자는 쭉지 뿌러진 신세 아니든가? 내가 벌써부터 머라 캅디까? 아무리 그래싸아도 오리는 물로 간다고, 서방 뺏고 자식 뺏고 그래봐야 말짱 허사라 안 했소? 오다가다 만냈이믄 자식이나 있든가, 자식이라는 거물장도 없는 처지 늙으믄 뻔한 신세라 말했는데 바로 그렇기 됐제. 기동이가 부산으로 간 것도 서울네 꼴보기 싫어서 그랬다믄서요?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세월이 잠깐이라요." "기성이 그놈은 틀렸어. 그놈은 사람 되기 글렀제." "그래도 경방단의 머라 카든고? 웃대가리라 하더마." 두만의 모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 기동이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장가를 들어 아이도 하나 낳았는데 명절에는 식구들과 함께 독골로 돌아왔고 어미를 위로했으며 부산에서도 안부 편지를 종종 보내오곤 했다. 노인들의 얘기가 길어지는 것이 지겹기도 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드는 것도 민망하고 어색하여 월화는 얘기가 끊어지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 또 오겠습니다. 오늘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갈라꼬?" 이번에도, 두만의 모친 대신 이웃 노친네가 말했다. "네." "요다음 올 때는 기성이아배하고 함께 오니라." "무신 소리 하요?" 두만의 모친이 가로막듯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내쫓기는 한이 있어도 와야제." 기성이아배와 함께 오라는 이웃 노친네 말은 월화를 당황하게 했다. "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한 밖의 일이었지만 우물쭈물 대답한 뒤 두루 인사를 하고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에서 몸을 감추듯 월화는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실데없이 와 그런 말을 합니까?" 두만의 노친은 노친네한테 화를 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구, 깨소금겉이 꼬시다. 이 사람들아 안 그렇나?" 동네 사람들이 와글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기성이아배도 바람필 날이 다 있든가배." "그게 어디 바람피는 정도가. 아주 딴살림을 차린 거 아니가. 허참, 피어나는 꽃봉오리 겉은 기생첩을 두었으니 서울네가 얼마나 복장을 칠꼬. 밤에 잠이나 오겄나. 내 원수는 남이 갚는다 카든 옛말이 하낫도 그른 거 없다." "와 아니라. 올바람은 잡아도 늦바람은 못 잡는다 안 하든가배? 젊은것한테 푹 빠지믄 서울네 신세, 눈먼 구렁이 갈밭에 든 기지머." "그러기, 사람이 너무 뺏독시럽게 해굴어도 신앙에 해롭은 기라. 엊그제 지가 남한테 한 짓을 오늘은 남한테 지가 당하니 입이나 어디 한분 뻥것 하겄나. 그기이 다 정한 이치제. 꽃도 피믄 지는 법이고 달도 차믄 기우는 법이고." 월화가 떠나자마자, 말을 못해서 입이 근질근질하던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신명을 내고 있었다. 그새 기성네는 베밑콩 따겠다 하며 소쿠리를 들고 밭으로 나가버렸다. 어른들이 있는 앞에서 동네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을 당돌한 성격도 아니었지만 일을 낙으로 살아온 그의 일상은 항상 그랬으니 특별한 것도 없었고 동네 사람 역시 그러려니,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두만이 모친은 아까 노친네 말에 기분이 언짢아 있었고 동네 사람들 입방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사람들아 대강 해라. 무신 경사가 났다고 야단이고." 하며 타박이었다. "서울네 따문에 인병이 들어서 주야로 탄식을 하더마는 그라믄 기성할매는 속이 씨원하지도 않다 그 말입니까? 남인 우리도 삼년 묵은 체증이 내리간 것 맨치로 씨원한데 말입니다." "못할 짓 하믄서 남의 앞(소실)이 되어 사는 제집들이사 그년이 그년, 뭐가 다를 기고. 내가 셋째년보고 치하라도 할 줄, 너거들은 그리 알았더나? 삼간 오두막 다 타도 빈대 타죽는 것 좋아라, 날보고 그러라 말가." "아이참 그러지 마이소. 괜히 맘속으로는 좋아하심서, 고분고분 찾아와서, 인사도 하고 이바지도 하는 거를 보믄 머지않아 기성이아배도 안 오겄고? 제집 소나아 지아무리 죽네사네 해싸아도 돌아눕으믄 남 아닙니까. 오두막이 불타서 없어지지도 않을 기고 아무나가 기생첩을 거나리건데? 다 그럴 만한 성시가 된께 그러제요. 초년 고생이 노년의 낙이라 카더마는 기성네도 이자는 괜찮을 깁니다." "하모요. 괜찮고 말고, 이자는 오금 박아감서 기성할매나 기성네 큰소리치믄서 살게 될 깁니다. 다 심덕 탓으로, 기성네가 그렇기 시부모 공양함서 참고 살았는데 공든 탑이 무너지겄고? 사람은 노리가 좋아야, 참말로 기성네 고생 많이 했제요." 한소끔 요란하게 떠들어대던 동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을 때 영만이 내외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장독가에서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던 기성네는 무안해하듯 히죽이 웃었다. "형님, 그 여자가 또 왔따믄서요? 와보고 접었는데 기완아배가 말리서 못 왔십니다." 기완네는 치맛자락을 걷고 쭈그려앉으며 함께 김칫거리를 다듬으며 말했고 영만이는 그런 여자들을 외면하듯 모친이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친주서 여자가 왔다 믄서요?" 영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음." "머하러 왔든가요?" "추석이 가까워온께 인사하러 온 모앵이더마." "망쪼 들었구마요. 기생첩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거는 그렇다." 두만이 모친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안 한다 하더니 집안꼴 자알 돼갑니다. 하기야 넘같이 담쌓고 사니께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마는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기가 맥힙니다." "제집이 심성이 나빠 뵈지는 않더마는 사람 속을 누가 알겄노." "심성이 좋고 나쁘고 간에, 부자가 함께 그 살림 결딴내겄소." "그거야 누가 아나. 하도 제집이 독한께 정이 떨어져서 한눈을 팔았는지. 지도 나이가 든께..." "여자 나무랄 것 뭐 있십니까. 성이 집안 처리를 잘못했인께 그런 거지요. 형수 보기 민망합니다." 한참 말이 없다가 두만이 모친은 "나도 그렇기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일로 해서 니 성이 조맨치라도 맴이 달라져서 집에 오고... 함께 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니 형수를 본댁으로 대접한다믄 다행 아니겄나? 하니 그 젊은 아이를 박대해서 오기를 돋굴 것이 아니라 살살 구슬러서 일이 좋게 됐이믄 싶다." 영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다고 제 버릇 개 주겄소." 영만은 조금치도 기대를 하고 있지 않는 표정이다. "그렇기만 몰아세울 것이 아니라, 사램이 나이 들믄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네라. 그까짓 재물이사 있건 없건, 옛날겉이 우리 식구 화목하게 사는 것을 보아야... 내가 살믄 앞으로 얼매나 살겄노." "..." "내사 니 성 돈 많다고 너무 입질에 오르내리는 거 싫구마. 그때 가정분가 하는 데서 돈을 털어갔일 직에도 내사 마, 세상 보기가 부끄럽었다. 부자믄 뭐하노? 한끼에 밥 열 그릇 묵을 기가? 이밥도 입에 쓸 때가 있고 깡보리밥도 입에 달 때가 있제. 사람 사는 기이 그런 것 아니다." "..." "그러니 기완이애비 니도 성을 내치지만 말고 옛날겉이 성지간에 잘 지낼 수는 없는 기가? 내 살인데 우쩔 기고? 에미사 뭐라 카든지 간데." "누가 그러고 접지 않아서 안 그랬십니까? 저거들 재산 넘기다볼까 싶어서 미리 똥을 싸는데, 앵이곱고 디러봐서 지도 자연 성질이 났지요. 한마디로 성은 졸장부요. 돈이야 벌었는지 모르지마는." "그거 다 서울네 농간 아니가. 답대비, 두만이 가아는 귀가 여린기이 병이다. 밤에 잠이 안 오고, 이일저일 생각을 해보믄 후회가 될 때도 있네라. 그만 그때, 윤복목수 딸리서 서울로 보내는 거 아니었는데 싶기도 하고, 요새는 왜 그런지 자꾸 지난일 생각이 난다." "그리 안 했으믄 그때 어울리서 산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리지요." "그럴 인야나 되건네?" "다 팔자소관 아니겄소." "니 아부지 살아 생전 부끄럽기 생각한 일이 꼭 하나 있었네라." "산에 안 가신 것 말이지요?" 두만이 모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만이가 돈을 벌어서 진주로 나오기는 했다마는 니 아부지 고집에 그 일만 아니었다믄 고향 버리고 떠났을 리가 없다. 나 역시도 그렇고, 살아도 살아도 뜨내기 겉은 생각, 나이들수록 그곳 생각이 난다. 그때가 좋았제. 어디로 가도 내 나온 고향보다 좋은 곳은 없다." "지난 일 생각하믄 뭐합니까. 만리 타국에 가서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선이 시집보낼 때 일이 엊그제만 같고 타작마당에서 굿판 벌이던 일, 함안댁 성님이 살구나무에 목을 맨 일도 눈앞에 생생하다." 영만은 그러는 모친을 근심스럽게 바라본다. "그런 기막힌 일을 겪었는데 한복이 가아는 고향에서 안 사나? 얼굴이 딸바가지가 돼가지고 달구지를 타고 어돈 그눔아아, 이자는 옛말이고 살제... 애당초 잘못한 기라." "뭐가요?" "니 아부지 세상 버맀일 직에 뫼를 평사리에다 쓰는 건데 잘못했다." "..." "그때는 어마도지해서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오새 와서 곰곰이 생각한께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네. 그랬이믄 나도 함께 고향에다 뼈를 묻은 긴데." "아부지는 생전에 그런 말씀 안 했습니다. 기색으로 나타낸 일도 없었고요." "이녁 입으로는 차마 말 못했일 기다, 마음에는 있었어도." 하는데 모친의 눈이 순간 젖었다. "정 그렇다믄 이장하지요 머." "그기이 어디 쉬분 일가." "어려불 것도 없십니다." "산소는 함부로 건디리는 기 아니다. 그랬다가 집안 망한 경우가 흔히 있었인께... 그냥 내 맴이 그렇다 그 말 아니가." "평사리 김훈장댇 양자도 만주서 김훈장을 이장해왔다 카든데요?" "그 말은 나도 들었다. 양반의 법도가 참 무섭구나 생각했제." "어무이가 정 원한다믄 못 할 것도 없십니다." "아니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고, 보나마나 니 성은 길길뛸 기다. 우리 근본 얘기만 나오믄 자다가도 방맹이 들고 나올 사람 아니가. 어림없는 일이다." "성을 참니시키지 않으믄 안 됩니까." "그렇게는 못한다. 그거는 그렇고 영민아." "야." "세상이 우찌 된다 카노?" "야?" "우리 동네서도 보국대로 뽑히간 사람이 수울찮은데, 연방도 뽑아간다 카든데 우리 집 아이들은 괜찮겄나?" "직장이 있은께 아직은 별일 있겄십니까. 그러나 앞일이야 모리지요." 영만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큰아들 기완은 사범학교를 나온 뒤 거창 산골, 국민학교 교사직에 있었고 둘째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우편국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징용에서는 일단 안전권에 있다 할 수 있겠으나 둘째 기태는 호적이 잘못되어 실제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로 되어 있어서 징병에 걸릴 위험은 있었고 스무 살 난 막내딸 기숙의 남편은 같은 독골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처지였으나 징용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보래, 영민아." 갑자기 모친의 음성이 낮아졌다. "만일에 말이다, 일본이 싸움에 져서 손을 든다믄." "누가 그런 말을 하든가요?" 영만은 긴장했다. "와? 촌구석에 있다고 아무것도 모리는 줄 알았떠나? 늙어서 귀도 먹고 눈도 멀었는줄 알았더나?" "그런 게 아니고 함부로 말했다가는 무신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에미가 함부로 말할 사람가?" "..." "그런께, 만일에 그렇기 되는 날이믄 니 성이 우찌 될꼬?" 영만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니 성을 친일파라 안 카나. 또 그때 돈 뺏겼을 직에도 니 성이 좀 야단을 했나? 사람들 입질에도 오르고 인심 많이 잃었제. 천방지축 모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찍어넣고... 기성이 그놈도 안 그렇나? 경방단장인가 먼가, 그것도 큰 흠이 될 것 겉은 생각이 든다." 소싯적부터 대범하고 지혜로운 모친이라는 것은 잘 아는 일이지만 그런 것까지 깊이 생각하고 있을 줄은 영만이 미처 몰랐다. 아닌게아니라 요즘 영만이 자신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영만의 국량이기도 했으나 사돈뻘 되는 장연학의 영향도 컸다. 부친의 장례식이 끝난 그날 밤 소동을 영만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두만이 군자금 강탈 사건의 범인으로 어릴 적 친구였던 송관수를 지목하며 흥분해 날뛴 데서 사건은 발생되었고 드디어 영팔 노인하고 시비가 붙었던 그날 밤, "예끼 순! 이 나쁜놈아,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을 깨지 마라 했는데 니 말대로 하자믄 관에서 쬐끼댕기는 놈이 날 잡아주소 하고 진주에 왔겄나? 종무소식,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리는 사람을 두고." 처음에는 영팔노인도 그 정도로 말했다. "흥! 초록은 동색이라 카더마는 다 그렇고 그런께 편역 들고 나서는 거 나도 압니다. 의병인지 동학인지 옛날에는 다 한통속인 거를 누가 모립니까." "뭐 우째?" "울 아부지가 산에 안 들어갔다고 후회를 했다고요? 어림 반푼어치 없는 말 하지도 마소. 의병질을 했건 동학당을 했건 만주 가서 독립군을 했건 그거는 아저씨 소관이지 울 아버지가 와 후회를 합니까. 누구 망해 묵을라꼬 한단 말입니까." "말 다 했나?" 그때 영팔노인은 분노에 차서 벌떡 일어섰다. "이노오음! 이 불가사리 겉은 놈아! 그래, 니 말이 맞다. 나는 동학당도 했고 의병질도 했고 만주 가서 독립군도 했다! 우짤라노? 내 이 늙은 모가지에 썩은 새끼줄 감아서 왜놈한테 끌고 갈라나? 끌고 가믄 상 많이 탈 기다! 다 산 목심, 내 그기이 무서브믄 성을 갈겄다. 이 천하 무도한 놈! 지 뿌리 짤라묵고 사는 놈!" 모두가 뜯어말려서 영팔노인을 영만의 집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두만이 모친도 그때 가만 있지 않았다. "니 아부지 숨을 거둘 때 뭐라 카싰는지 벌써 잊었더나? 남의 가심에 못박지 마라, 그 말을 벌써 잊었나? 별말 할 거 없다. 판술아배, 판술어매, 그라고 니 에미꺼지 모두 끌고 가서 까바치라. 그라믄 상금 많이 줄 기고 축간 돈 아귀가 맞일 거 아니가." "기가 차서." "기가 차는 거는 나다. 아무리 돈이 좋기로,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해도 되는 기가? 니 아부지 땅에 묻고 날도 안 밝았다. 피알 하나 안 속이고 살아온 아부지 겉은 노인을 모함해?" "모함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고." "관수는 와 들먹이노? 못하는 친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식 키우는 놈이 사람을 사지로 몰아?" 모친은 그때 두만의 역살을 잡았다. 십여 년 전 그날 밤 일이 엊그제처럼 영만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영만이도 형을 비난했다. 평소 못마땅하기도 했으나 군자금 강탈 사건 후 진주서 비등하는 여론을 모르지 않았고 순철의 부친을 칭송하는 대신 두만을 멸시하는 인심도 영만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형에게 충고하리라 마음억고 있었던 참이었다. "성, 성은 자기한대만 살고 말 생각이오?" "..." "자기 한대만 살고 말라 카믄 마음대로 하소." "무신 말고?" "나는 내 자식 자손대까지 살아주기를 바라는 맴이니께 이렇게 되믄 성하고 남이 되든지 해야겄소." "좀더 알기 쉽게 말해봐라." "그라믄 내가 묻겄소. 성은 왜놈이 천년 만년 우리 백성을 누르고 살기라 믿소?" "..." "우리 백성이 천년 만년 왜놈의 종으로 살 기다, 성은 그렇게 믿고 있소?" "나중 일을 누가 알꼬." "모리지요. 나도 모리요. 하지마는 한 가지 틀림없는 일은 만일에 나라가 독립한다믄 성은 역적이 된다, 그것만은 틀림이 없일 기고 삼족을 멸한다믄 조카 두 놈에 우리 새끼들은 우찌 될 기요?" "야아가 무슨 소리를 하노?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이 개명천지에 삼족을 멸할 기라꼬? 자다가 꿈 겉은 소리 하네." 그러고도 형제는 한참 동안 말씨름을 했다. 이러한 시시비비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장연학이었다. 시종 말이 없었던 그는 송관수의 이름이 나오자 긴장했고 두만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묘수로 생각해낸 것이 일종의 협박이엇던 것이다. 연학이 "그런 일로 안 잽힌 경우가 별로 없지요. 그것이 또 가정부서 정말 그랬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차라리 강도한테 당했이믄 후환이나 없을 긴데." 하고 말했을 때 "후환이라니?" 퉁기듯 두만이 되물었다. "첫째는 경찰에서 시끄럽고 혹시 내통하지 않았나 의심을 한께." "그, 그 점은 나도 생각했고 이도영이 그 사람도 그것 때문에 오라가라 했던 모앵인데..." 그때 두만의 눈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두번째는 반대로, 그 사람들이 잽히는 날이믄, 또 친일파로 지목을 하고 그랬다믄은 물귀신맨크로 끌고 들어갈 수도 있는 일 아니겄소." 그것은 무서운 말이었다.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신양에 이로울 것이라는 뜻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어쨋든 그때 일은 돈 기천 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두만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이들 김씨네 일가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뭔가 생채기 같은 흔적을 남긴 것만은 틀림이 없다. "실데없는 걱정 마이소. 왜놈이 그리 쉽기 손들 것입니까." 영만은 그 문제를 밀어버리듯 모친에게 말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속에서 낳고 니는 동기간이니께... 그만 남 사는 대로 살믄 될 거로, 돈이 원수다." "돈 벌라꼬 친일도 한 거 아닙니까." "그러이 돈이 원수라 안 하나." "코앞에 닿은 근심도 많은데 먼 앞날 걱정은 그만 두이소. 가볼랍니다." 영만은 일어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두만이 모친은 며느리 둘을 불러들였다. "우쨌거나 가지고 온 기니께, 자아 너거들 몫이다." 하며 두만이 모친은 월화가 가져온 옷감을 나누어준다. 기성네는 묵묵히 받아들었으나 기완네는 얼른 펴본다. 천을 만져보는 그의 눈이 황홀하게 빛났다. "성님, 옷감이 참 좋네요. 요새 이런 것 눈 닦고 볼라캐도 없십니다." "내사 뭐 입고 갈 데나 있나?" "성님 것도 구겡 좀 합니다." 기성네가 옷감을 내밀었다. "기생이라 눈이 다르거마는. 성님 나이에 알맞게 쑥색, 참 좋네요." "동서 자네 주까?" "무슨 말씀을 그리 합니까." "와? 분홍은 기숙이 주고 싶고 쑥색은 자네가 입으믄 꼭 좋겠제?" "참, 우찌 남의 마음을 그리 잘 압니까." 기완네는 까르르 웃는다. 시어머니 앞에서 기성네보다 기완네가 훨씬 임의롭게 굴었다. "실데없는 소리 말고, 옷감을 본께 추석치레보다 설치레다. 올 설에 해입어라." "어디 갈 데가 있어야 해입지요." 기완네 말에 "와 갈 데가 없노. 산소에는 안 갈 기가?" "엎어지믄 코 닿는 곳인데요." "맘묵고 가지온 기니까 자식들 줄 생각 말고 해입어라." "맘묵고 가져왔다 카시지마는 이거 다 아주버니 호주머니서 나온 건데요 머." "그라믄 더욱 좋고, 기성에미 평생 처음으로 남정네 덕을 보이." "참 그렇네요. 어무이 말씀을 듣고 보이, 성님." "..." "오래 살면 이런 일도 있는 모앵이제요? 그 감 이리 주이소. 지가 온갖 정성 다 해서 지어디리겄십니다." 하며 기완네 기분이 썩 좋은데 밖에 누가 온 모양이어싿. "아무도 없나?" "뉘요?" 방문을 열고 내다본 기완네가 "아이구 구야할무이." 하며 황급하게 마루로 나갔고 기성네도 얼른 따라나간다. "우짠 일입니까." 기성네가 물었다. "그냥 와봤다." 구야할매는 비시시 웃었다. 늙어서도 깔끔한 차림이었다. "성님 기시나?" "나 여기 있네." 며느리들이 대답하기 전에 두만이 모친은 방안에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아이구 성님!" "운냐." "괜찮십니까?" "올라오기나 해라." "야." 하고는 "댜아들아, 이거 받아라." 신문지에 싼 것을 구야할매는 내밀었다. "멉니까." 기완네가 받았다. "소개지다." "이리 귀한 거를 우찌." "성님 국 끓여디리라." 방으로 들어오는 구야할매를 올려다본 두만이 모친은 "앉거라." "야." "무신 바람이 불었노?" "구야애비가 어이서 소개기를 좀 구해왔기에 앞가림 삼아서, 성님도 보고 접고 해서 왔십니다. 좀 우떻십니까? 신색은 좋아 뵈는데." "갈 때가 지났는데 이리 살아 있이니 욕이지 뭐." "그런 소리 마시이소. 기성네가 누구를 믿고 사는데." "그거는 그렇다. 내 지금 눈감아도 아무 걸리는 기이 없거마는, 기성에미 하나가 내 가심에 박힌 못이다." "이자부터는 안 괜찮컸소? 말년은 좋을 깁니다. 자식들만 돌아오믄." "와, 무신 얘기 들었더나?" "좀 들었습니다." "우떻게?" "쌈이 잦다 카데요. 부모형제 인연 끊은 것도 조강지처하고 민적판 것도 다 서울네로 인하여 그랬다 캄서... 기성아배가 후회를 하는 갑더마는." "기성이댁네, 친정어마니가 우리 이웃에 삽니다. 성님하고 우리하고 가까운 거를 알고 그런 말을 한 모앵이라요." "..." "이웃에서 보믄 사람이 엄전하고 본바 있고, 함부로 말할 사람은 아닙니다. 살림이 빠져서 생활은 넉넉잖은 형편이지마는..." "실개 빠진 놈, 죽자 사자 은앙새,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듣는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노. 그놈이 후회를 해서 그런 말 한 줄 아나? 새 제집한테 빠져서 그러제. 개과천선할 놈이 아니다." "성님도 참, 자식한테 우찌 그렇게 매력꿎게 말을 합니까." "자석 질엎은 부모가 아네라. 키울 때도 그랬네. 그 불쌍한 한복이, 쪼맨할 때지. 함안 외갓집에서 그 어린기이 걸어서 평사사리에 왔을 직에, 풀모기에 물리서 얼굴이 딸바가지가 돼가지고 그 애인한 성상을 우찌 말로 다 하겄더노. 영만이는 그기이 불쌍해서 우짤줄을 모르는데 두만이놈은 샐인죄인 자손 우짜고 함서 돌린 기라. 내가 야단을 쳤제. 아무래도 천성은 타고 나오는 모앵이더마. 그 아이는 애비 에미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인께." "사람은 열 번 변성한다 카는데, 애비 에미 자식, 에미 안 닮고 뉘 닮겄소." "모리거든 말 말아라." 두만의 모친은 역정을 냈다. "제집 나무랄 거 뭐 있노? 다 손발이 맞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제집 탓을 해? 천하의 못난 놈, 지가 사내자식이믄 못 그란다. 정말 개과천선을 했다믄 제 발로 걸어와서 사죄하는 기이 옳지, 새 제집 얻었다고 죽자 사자 은앙새였던 제집을 하루아침에 몰아세워? 아무리 내가 서울네를 미버라 하기로, 내 자석 옳고 그른 것 분별 못 할까." "이치로는 그렇소." "사람이 몇백 년을 사나. 남의 눈에 피눈물 내감서 와 그리 살아야 하노. 내가 내 며느리라꼬 역성을 드는 거는 아니다. 우리 기성네를 보고 있이믄 긴긴 세월을 하루같이 남 원망하는 일 없고 남 해꼬지하는 일없고, 두 가지 맘 쓰는 일없고 일이 낙이라, 말이나 더분더분 한단 말가. 불쌍하고 간이 아프다. 모두 희희낙락 할때 일하고, 가장과 함께 오손도손 얘기할 때 지는 등잔불 밝히감서 바느질 하고..." 두만이 모친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는다. "심란키 생각지 마이소. 그런께 기성네 아입니까. 누가 와서 그 자리를 흔들 깁니까. 기완아배도 형수를 엄첩게 생각하고." "그나저나 너거들 추석에는 평사리에 갈 기제?" "야. 성님은 우짤랍니까." "우리는 못 가지." "하기는 그렇겠소. 기성이 할배 산소가 여기 있인께." "지난 한식 때 기완이애비가 평사리에 갔다왔네라. 그것도 내 살아 생전이다. 나마저 없어지고 나믄 고향 떠나 있는 자석들이 조상산소 찾아가서 벌처하고 사초하고 그기이 어디 쉬운 일이겄나. 청물이야 떠놓겄지마는, 자네는 그래도 작은아들이 남아 있인께." "그러시... 성님." "와." "무신 심산인지 모리겄소. 만고에 편하고 아들이나 며느리가 다시 없이 하는데 와 이리 갑갑증이 나고 심란한지, 태산 겉은 농삿일, 날이 날마다 동동걸음으로 밭에 가랴 논에 가랴, 지금 와서 생각한께 그때가 호시절이었소." "..." "심장이 상해도 호밋자루 하나 들고 밭에 나가믄 시름도 잊고 노래를 부르니 누가 뭐라 하나, 또랑물에 얼굴 씻고 일어서믄 살 것 겉앴는데 여기서는 심장 상할 일이 머 있겄소. 조석 걱정을 하나, 아무 근심이 없는데 와 평사리 생각만 자꾸 나는지, 철만 바뀌어도 눈앞에 들판이 선하게 떠오르고 바람난 제집겉이 갈 발을 잡을 수 없고." 두마이 모친은 웃는다. "그거 다 일에 넋이 들어서 안 그렇나." "일에 넋이 들다니요?" "바느질쟁이 삯일 놓고 있으믄, 또 도부꾼이 도붓길에 나서지 않으믄 여기저기 삭신이 쑤시고 아파서 못 젼디는 법이라, 번걸증이 나고, 그기이 다 일에 넋이 들어서 그런 기다." "일 땜에 그렇겄소? 아입니다. 산 설고 물 설고 사람들이 낯설어서 그럴 깁니다. 하루믄 갈 수 있느 고향을 두고 내 맴이 이런데 영팔노인은 만주꺼지 가서 수삼 년을 우떻기 살았이까요." "죽도 사도 못해서 살았겄제. 판술네 말이 많이 울었단다. 추석때가 되믄 우리 부모 묏덩이 우묵장성 풀에 덮여서 돌아가도 묻힌 곳이나 찾을란가, 어느 누가 벌초를 해주겄나 함서 판술아배 대성통곡을 했다 안 카나. 요새 사람들이사 어디 그렇더나? 고향 떠나 부리믄 그만이제. 하기사 떠나고 접어서 떠난 사램이 어디 있겄노. 또 돌아올 형편이 못 된께 돌아오는 기고, 윤보목수 자네 알든가?" "알고말고요. 용수골에 있일 적에 우리 집 까대기도 지어주었소. 근동에 윤보목수 모릴 사램이 어디 있겄소. 빡빡 얽은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 하요." "장개도 한 분 못 가보고 사시사철 발 닿는 대로 돌아댕기믄서 목수질을 하다가 몽다리구신 됐다마는, 명절이나 부모 제삿날이믄 돌아오더니라. 그래서 김훈장한테 수틀리믄 달라들고 하는 윤보목수를 김훈장은 엄첩게 생각했제. 산으로 들어간 그 사람은 죽었고 함께 갔던 김훈장도 만주로 달아났다가 만리 타국에서 돌아가싰지, 모두 엊그제 일 같다마는... 자네만 그런 줄 아나? 낯설기로는 나도 매일반이다. 옛사람은 하낫도 없고... 우리도 그 일만 없었이믄 멋하로 고향을 떴겄노. 아무리 두만이가 성공을 했다 하더라 캐도 평사리를 등지지 않았일 기다. 그기이 또 생전의 두만아배 한이었고." "그 일이라 카믄." "최참판댁의 조준구를 직이고 물자를 탈취해서 산으로 들어갈 낌새를 알고 두만아배는 사돈댁으로 피했네라. 그라고 참판댁 애기씨가 곤욕을 겪었을 때 우리는 아무 한 일이 없었다." 두만이 모친은 탄식하듯 말했다. "흉년에 조준구가 나누어주는 쌀도 받아묵었고, 그기이 어디 예사 쌀이든가? 편가르는 쌀이었제." "그때 우리는 용수골에 있어서 자세한 거는 모리겄소만 어디 그기이 성님네 혼자뿐이겄소. 강약이 부동이라꼬." "만 사람이 그래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었던 기라, 최참판댁이 누고? 애기씨는 우리네 상전 아니더나. 면천해준 은공도 있었고 자식 없는 가난이 바우 두 양주를 위해 제우답으로 참판댁 마님께서 닷마지기나 떼어주싰고, 그것도 조준구가 걷어가버맀지마는." "그거는 와 주싰지요?" "그 양주는 마님을 위해서 공이 많았인께 다 같은 종이라 할 수 없었제. 우리하고는 촌수가 멀어도 인척인께 맽기신 기다." "언젠가 제우답 얘기를 들었지마는, 그기이 바로 그 얘기구마요." "아날꺼지 기일에 물은 떠놓고, 영만이가 평사리에 가믄 벌초도 하네라." "지난 일 다 잊어뿌리이소. 다 살기 위해 그랬는데 우짤 깁니까." "하기사 그때 산으로 따라갔으믄 죽었일지도 모르지. 식구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성환이 할매도 그때 당했다 카더마요." "석이아배는 아무것도 모리고 어디 갔다가 돌아오이 그 일이 벌어졌제. 사람들은 산으로 간 뒤였고. 있었이믄 그 성질에 따라 갔일기다.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조준구 그놈이 석이아배를 죽게 했다." 순결과 고혈 1장 만산은 홍엽 이로되 엉성하게 만든 널평상에 한 다리는 세우고 한 다리는 늘어뜨린 채 곰방대를 물고 붕어같이 입을 버억버억 벌리듯 담배를 피우던 강쇠는 연기가 나지 않자 성냥을 그어댄다. "니 댁 네는 코가 삐뚤어졌나? 와 안 오노." 하고 강쇠가 말했다. 축담에 걸터앉아 있던 몽치는 "절색은 아니지마는 코는 안 삐뚤어졌소."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라믄 와 안 오노." "염치가 있인께 그러제요." "염치가 있었다믄 애시당초 총각을 물긴 와 물었는고?" "지가 물었지 그 앤네가 물었소?" "하여간에 봇장 하나 알아주겄다." "그거 없었이믄 벌써 옛날에 지리산 흙이 됐일 깁니다." "말말이 저렇게 나오니, 대키 순! 해도사가 대체 머를 우떻게 가르칬길래 저 모양이고. 하기사 피장파장이기는 하다마는." "그런 말심 마시이소. 다른 거는 모리겄소만 인물 하나는 맨들어 놓으싰지요." "허허어, 자칭 천자네." "야, 지는 그렇십니다. 그렇기 살 기니께요." "기떡이 맥힌다. 이놈아! 머를 믿고 니가 그러노." "지리산 신령을 믿제요. 마음묵기 나름 아니겄십니까?" 하다가 뭉치는 낄낄 웃었다. 부엌에 나뭇단을 들어다주면서 휘는 이들 수작하는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코가 삐둘어졌느냐고 물은 여자는 다름아닌 모화였다. 지난 봄부터 그들은 동거 생활로 들어갔는데 모화는 같이 산다 했고, 뭉치는 장가들었다고 했다. 숙이가 울고불고 야단이 난 것은 물로, 영호도 드물게 친동생 대하듯 당장 갈라서라 호통을 쳤으며 여선주 부자도 몹시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뭉치는 오불관언이었다. 산에서는 가타부타 소지감은 말이 없었고 해도사는 "팔자다. 네놈이 말린다고 말 들을 놈인가." 반쯤은 찬동하는 듯 말했다. 그러나 강쇠는 "우떻게 된 계집인데 남의 새 총각을 돔비 갔노. 그래 계집은 또 그렇다 치자. 만고에 미친놈 아니가. 혼비가 없는 것도 아니겄고 시집오겄다는 처자가 없는 것도 아니겄고 어디가 벵신이가? 자식새끼 딸린 헌계집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가." 분개를 했다. "좋은 거를 우짭니까. 여자는 별 인물 볼 것 없고 성칼도 대단한 모앵인데 경우가 바르고 비루한 짓은 죽어도 못하는 성민갑더마요. 몽치 가아가 보통내깁니까. 다 지 생각이 있을 깁니다. 그냥 모르는 척 내비리두시이소." 중재하듯 하는 휘의 말에 "내비리두라니, 내가 그놈아아 애비가? 지 누부 말도 안 듣는 놈인데." 슬그머니 후퇴를 했다. 다만 몽치를 이해하는 사람은 평사리의 한복이었다. 영호와 그 형제들의 생모요 자신의 마누라인 영호네는 하동 저잣거리에서 비럭질하던 계집아이였었다. 그 과거사를 생각하여 한복은 몽치를 이해했을 것이다. "불쌍한 사람끼리 만내서 서로 아끼고 의지하믄 되는 기지, 형제 된 입장에 욕심이야 와 없겄노마는, 못 만났거나 죽었으믄 그런 동생도 눈앞에 못 볼 거 아니가. 애기 니가 맘을 풀어라." 며느리 숙이에게 타일렀던 것이다. 몽치는 어제 저녁때, 마른 생선을 수월찮이 짊어지고 추석을 쇠기 위해 산에 돌아왔다. 휘는 그보다 훨씬 앞서, 그러니까 지난 초여름, 통영의 생활 터전을 걷어버리고 산에 돌아와 있었다. 모두 살기가 각박했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시인 만큼 소목일을 맡기는 사람들도 드물었지만 징용이라는 위험 부담이 있어서 그곳을 원했고 특히 해도사는 신중한 태도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하다시피 했다. 옛날과 같이 휘는 숯을 굽고 화전을 넓혀 농사도 지었으나 네 식구가 늘어난 산 살림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통여서 벌어온 돈이 있어서 그나마 지탱이 되는 형편이었다. 영선은 국미낙교에 다니던 선아를 산으로 데려오지 않으면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을 못내 아쉬워했다. 어쨌든 추석을 하루 앞둔 산에서는 그런대로 추석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올 추석, 도솔암은 시끌벅적하겄다." 강쇠는 곰방대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와요" 몽치가 물었다. "서울서 손들이 많이 왔인께." 강쇠는 더 이상 설명르 않고 곰방대를 허리춤에 찌르며 문밖으로 나간다. "교장선생님 가족들이 오신 기라." 휘가 덧붙여 말했다. "헌 생이틀 겉은 그 양반." "제발 그놈이 말버릇좀 고치라. 언제까지 그럴 기고." "성이야말로 서울서 똥깨나 뀌는 사람이라꼬 쩔쩔매는 기요?" 휘는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오장육부 사람은 다 매일반인데 그래싸을 것 없소, 보아하니 늙은네가 곧 죽어감서도 개화장에 양복 걸치고, 신식 배우니라고 부모 재산깨자 축냈을 성싶더마요, 우리네 고학파하고 안 맞일 것 같애서 별 재미없소." "얼싸구? 그 양반이 지리산 몽치 장군을 만내로 오기라도 했단 말가? 허파에 바람든 소리 그만해 두어라." "지감스님이나 도사 선생님은 모두 우리 구역 사람 아니오?" "태산 깨는 소리 하네, 몽치야." "말하소." "그 따우로 풍을 치다가는 산에 발 딜이놓기도 어렵게 될라?" "무슨 소리요?" "산의 형편이 전과 같은 줄 아나?" "별 희한한 소리 다 듣겄소. 영문이나 압시다." "지금 징요을 피해서 도방사람들이 많이 숨어들고 있다. 모두 죽기 아니믄 살기로 독이 오른 사람들인께 잘못했다가는 봉변당할 기다." "이 내가요?" "함부로, 대나깨나 시부리지 말라 그 말이다." "객이 주인을 내친다 그 말인가 본데 언제부터 성이 그리 곤장 해졌소? 통여에다가 실개를 빼놓고 왔소?" "미친놈, 그나저나 니 형편은 우떻노?" "그거야 두고 보아야제요. 기름도 어구도 딸리는 판국이니 배 띄우기가 수울찮고 뱃놈이라고 언제꺼지 그냥 놔두겄소? 아무튼 지랄 겉은 세상이요." "큰일이다." "얼마 전에 왜놈 간장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는 사람이 떼여가는 거를 보았는데 산월이 다 된 댁네가 목을 놓고 울더마요. 왜놈해구는 꼴을 보이 간장 안 맨들어도 좋다, 개기 안 잡아도 좋다, 가자, 그 쪼더마." "..." "그거는 그렇고 산에 숨어든다는 사람들은 뭐 묵고 살 기요?" "식량 댈 만한께 들어왔겄지, 없는 사람들이야 어디 피신이나 할 형편가. 배급 통장이 발을 꽉 묶어놨는데 하기야 뭐 먼지 죽는가 나주엥 죽는가 그 차이 아니겄나. 그래 니는 언제 갈라노." "내일 일찍 산소에 갔다가 평사리에 들리서." "생각 좀 해봐라." "생각하나마나요." "그런 소리 말고 니도 산으로 돌아와야 할 기다." "그거는 안 되요." "와 안 되노." "하야간에 그 바닥에서 나는 비비대볼랍니다." "각시 땜에 그러는갑네?" 휘는 빈정거리듯 말했고 몽치는 눈을 희뜨며 노려보다. "나 실개 빼놓고 사는 놈 아니오." "말이사?" "이판사판, 당할 때는 당하더라 캐도 숨어댕기는 거는 싫구마요. 가깝해서 못 사요." "미련한 놈이나 하는 짓이제. 니 눈에는 세상이니 손바닥 위에 있는 거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거는 풋내기라서 그런 기다. 지 심만 믿는 놈치고 어리석지 않은 경우는 드문께." "인명 재천이라 했소."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쏫아날 구멍이 있다 했소." "그렇고말고. 네놈만 쏫아날 구멍이 있긴 있일 기다. 지리산 신령을 믿은께." 휘의 집에서 점심을 먹은 몽치는 해도사 거처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몽치는 아비 산소에 갔다. 쓰러져 죽은 그 자리에 아루멇게나 묻어놓고 해도사가 표지만 해놨던 조그마한 봉분이었다. 그 동안, 그러니까 몽치가 산을 떠난 후 그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는 평사리 시댁에 추석을 쇠러 온 숙이가 무덤을 찾았고, 해서 비교적 손질은 잘 되어 있었다. "아부지, 저 왔소." 초라한 제수를 차려놓고 술을 부은 뒤 몽치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절을 세 번하고 반절도 한번하고 무덤에 술을 끼얹는다. 그리고 무덤가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이었다. 그 동안 날이 가물어서 그랬는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건조했다. 선명하게 물들기 시작한 잡목숲, 나무잎새들도 종이 잎새같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메마르게 들려왔다. 풍성한 가을 산이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르는가 했더니 맞은 편 숲속에서는 지치지도 않고 소쩍새가 울었다. 몽치는 술병을 들고남아 있는 술을 마신다. 그리고 북어포를 찢어서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세월을, 한을 씹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아부지, 와 그렇기 어리석게 살았십니까? 싫다며 도망간 여자를 찾아서 머할라 캤십니까. 자식들 끌고 유리걸식, 결국 이곳에 묻힐라꼬... 아부지!" 도망간 여자, 그는 그의 생모였으며 몽치는 한번도, 마음속에서 나마 어머니라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첩첩산중, 첩첩산중... 어린것 하나 놔두고 눈을 감을 수 있던가요? 아부지! 산소에 오면 언제나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나는 세상 그렇기는 안 살 깁니다. 그렇기 못나게는 안 살 깁니다. 천지간에 낯선 곳에 떨어진 목심, 누부나 내나 살아남은 기이 천행이었제요. 죽은 사람 원망해서 머하겄소. 하지마는." 병을 기울여 또 술 한 모금을 마신다. 몽치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아버지는 산속으로 들어왔느냐는 그것이었다. 죽을 생각이었다면 마을, 사람 사는 곳에 아이를 버렸으면 될 것을, 누이를 주막에 맡긴 것 처럼 할 수도 있었는데, 사람을 찾아서 산에 들어왔는지 아니면 화저이라도 일구어 살아볼 요량으로 산에 들어왔는지, 그러다가 갑작스레 병이 나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몽치는 한번도 그날 밤을 잊은 적이 없다. 시신을 곁에 두고 차디찬 이슬에 젖으며 쭈그리고 앉아서, 산발한 듯 숲이 바람에 울부짖고 산짐승들이 울부짖던 그날, 그 칠흑 같은 밤을 그는 결코 잊지를 못했다. 산소에서 돌아온 몽치는 해도사와 지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휘와 해도사에게 나누어주었기에 훨씬 양이 줄어든 마른생선 꾸러미를 들고 평사리를 향해 산을 떠났다. 도솔암에는 명희와 그의 올케 백씨, 그리고 여옥이 와 있었다. "스님, 언젠가 한번 만나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여옥이 물었을 때 지감은 빙그레 웃었다. "여수서, 두 번이었지요." "노상에서 한 번, 그리고 부둣가에서 한 번." 지감은 여옥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뜻밖입니다." "전도부인께서 절에 오셔도 되겠습니까?" 다소 비아냥거리듯 지감은 말했다. "산중인데 그러면 우릴 쫓아내시겠습니까?" 여옥도 스스럼없이 말했다. "원래 절에서는 기식을 거절하는 법이 없소이다." 명희는 엉거주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여옥은 완전히 건강이 회복되었고 임명빈은 거동에 불편이 없을 만큼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그는 여자들이 셋이나 몰려온 것을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좀 내려가면 여자들만 있는 암자가 있는데 거기 가있는 게 어떻겠느냐 권하기도 했다. 사실 산에 있는 동안 이곳 형편도 다소나마 알게 되었고 산사람들의 기질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속에서 얼마나 그들이 강건하게 살고 있는가, 물론 조용한 산사의 분위기를 어지럽히다는 생각도 했으나 서울 부르주아들의 유람 행각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 점이 염려되었다. 모두 양식이 있는 여인네들이지만 차림새에서부터 산사람들은 예사롭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심들이 보통이 아닌 해도사나 지감 그리고 강쇠에 대하여 켕기는 구석이 없지도 않았다. 그들 입에서 무슨 독설이 튀어나올지 조마조마한 심정이기도 했다. 실은 백씨와 명희는 추석을 산에서 혼자 쉴 명빈을 생각하여 음식이며 밑반찬을 장만하고 겨울 옷가지, 불전등을 준비하여 조용히 다녀가려 했다. 그랬는데 공교롭게도 여옥은 여수의 최상길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며 내용이 추석 다음날 자기는 지리산 도솔암으로 갈 터인데 여옥이더러 내려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해서 여옥은 명희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심산 유곡이지요." 점심을 먹고 난 뒤 여자 셋은 밖으로 나왔는데 계곡의 개울길을 따라 올라가며 백씨가 말했다. 그는 한번 이곳을 다녀간 일이 있었지만 명희와 여옥은 초행이었다. 슬랙스에 운동화를 신은 명희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걸으면서 "나도 이런 곳에 와서 살았으면, 세상만사 다 잊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오빠 같은 환자는 정양하기 위해서지만 아무리 좋다 해도 첩첩산중, 아무나가 살 수 있나요?" 하는데 여옥은 "그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예요." 하고 말을 가로막았다. "서울서 왔다는 그 암자의 여자도 십 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중이잖아. 여기 살고 싶지만 중이 될 생각은 없어. 하긴 언니 말이 맞아요. 아무나가 살 수 있는 곳은 아닐 거예요." 명희는 생각을 철회하듯 말했다. "그 여자는 중옷만 입었다뿐이지 제대로 된 중은 아니래요. 서울서 알만한 집안의 따님이라 하고 지감스님의 이종누이라 하든지... 어딘가 좀, 정상이 아닌 것 같더군요. 전에 한번 왔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왔더군요. 지감스님은 영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뭔지 하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고, 그런가 하면 스님한테 따지듯 맹랑한 면도 있구, 그리고는 자기 암자에 놀러오라 하며 일어섰는데 돌아서서 하는 말이 자기는 이 산말고는 갈 곳이 없다, 그 말을 들으니까 어째 가슴이 찡하더구먼." 명희는 지나날 그 남쪽 바닷가에서의 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느 　ㅅ 같았던 그곳, 두번 다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째 이곳에서 살고 싶다 했는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보다, 제대로 된 중이 아니라 하더라도 중 차림의 여자가 아이는 어떻게 된 걸까요?" 여옥이 말했다. 실은 어제 임명빈의 권유도 있고 해서 여자들은 민지연의 암자로 내려와 잠을 잤던 것이다. 그러나 민지연은 대하기가 편한 여자는 아니었다. 신경에 날이 서 있는 것 같은가 하면 망연한 눈빛으로 말없이 앉아 있곤 했다. 잠자리에 든 후에도 끊임없이 한숨을 쉬며 몸을 뒤척였다. 그런가 하면 자다 말고 마루에 나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도솔암으로 올라온 여자들은 방이 비좁아 잠을 못 잤다는 불평을 임명빈에게 했다. 어쨌든 그곳에서 여옥이 말하는 아이를 보았던 것이다. 그 아이는 그 여자 애가 아니예요. 누가 버리고 간 아이라나요? 처음에는 펄펄 뛰었답니다. 혼인도 안 한 처지에 아이를 기르다니 말이나 되는 가고, 했는데 지감스님께서 우격다짐으로 기르라 했던 모양이에요. 이제는 너무 이뻐서 그 아이 없인 못 살겠다 그러는 거예요." "혼인을 안 했어요?" 여옥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네, 안 했대요.' "무슨 곡절이 있군." 명희는 평상같이 반듯하고 넓은 바위 곁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쉬어요." 세 여자는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는다. "여옥아." "응." "우리가 여기 오래 있으면 방해가 되겠지?" "무슨 소리야?" "최선생 오시면 우리 떠날게." "놀랍군." "뭐가?" "명희 너한테도 심술이란 게 있으니 말이야." "언니, 심술이래요. 실은 샘이 나서 그러는데." 낄낄거리며 명희가 웃는데 백씨는 웃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샘이 나면 너도 애인 하나 만들어." "망칙한 소리하지 마." "앙큼스럽기는, 희재 어머니." "네." "이런 시누이 보기가 힘들지 않으세요? 마음을 꽁꽁 묶어서 남이 볼세라 전전긍긍하는 꼴, 터버리면 서로 편할 건데 아직 고생을 덜해서 그런가 부지요?" "나는 괜찮지만 길선생은 그럼 어째서 고모랑 그리 다정하지요?" 여옥은 껄껄 소리를 내어 웃는다. "나도 한때는 그랬거든요. 명희는 개심하기 어려울 거예요. 눈앞에 백마 탄 사내가 나타나도 머뭇거리다가 볼일 다 볼 거예요." "그러면 여수 최선생은 백마 탄 사나야, 너에겐?" "사내... 친구야. 구혼을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 사람 구혼 같은 것 하지 않을 거야." 여옥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놨다. "금홍인가 하는 그 여자 떠났다며?" 명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인은 나보고 그런 말 안 해. 하지만 갈라선 것 같애." "그러면 결혼 못할 것도 없지 않아?" "그건 남들의 생각이지. 실상 난 친구든 남편이든 상관없어. 난 난생 처음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 생긴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희재 어머니, 다 늙어가면서 이런 말 하는 것 숭없지요?" "별말을 다 하세요. 나도 그리 구식은 아니랍니다. 고모한테서 들었지만 형무소에서 길선생을 업고 나왔다면서요?" "..." "그런 지극한 사랑이 어디 있겠어요? 이해합니다. 그러나 조금은 섭섭하네요." "왜요?" "다정한 친구를 빼앗긴 고모 땜에." 여옥은 또 웃었다. 그러나 어딘지 멋쩍어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힘들지요." "힘들어하지 마. 미안해할 것도 없구, 한 사람이라도 정상으로 되는 편이 낫지." "끝내 자신의 얘기는 안 하는 구나." "안 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그건 진실이야."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여옥이나 백씨나 다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 사람은 다 뭔가 이야기를 이어나가야겠다고 초조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위눌린 것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어느덧 각자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흐르는 물소리, 바람, 바스락거리는 마른 나뭇잎 소리, 숲에서는 온갖 생령들이 일렁이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침묵은 계속되었다. 사실 명희는 쓸쓸했다. 색바랜 헌옷 같은 자기 존재가 서글프기도 했다. 인척집 늙은이는, 소생 하나 없이 노년을 어디다 의탁할꼬, 그 곱던 얼굴도 속절없이 늙는구나, 늦기 전에 개가를 하든지, 그런 말을 했다. 수다스러운 원아의 젊은 엄마는, 원장님 같은 분은 재혼하시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상대가 있을 거예요, 아름다우시고 교육은 최고로 받으셨고 재산도 넉넉하겠다, 그런 말을 지껄였다. 은근히 혼담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명희는 모욕을 느꼈고 넌더리를 내며 싫어했으나, 그러나 그는 역시 외로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선혜의 경우도 그랬고 길여옥, 양현의 경우도 어떤 아픔 같은 것을 늘 자아내게 했다. 그들은 모두 명희가 아끼는 사람이며 다정한 선배, 벗이었으며 딸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행복하건 불행하건 모두 절실한 대상과 더불어 절실한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들의 삶과 무관한 자기 처지를 때때로 깨닫게 될 때 명희는 쓸쓸해지는 것이다.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적에도 그랬다. 강선혜의 남편 권오송은 결국 영월에서 잡혀왔다. 그의 죄명은 불온사상이었고 잡지『청조』를 발행했을 때도 목적은 불온사상의 전파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 사실무근은 아니었다. "본인은 차라리 편안하다 하더군. 불안한 나날을 보내기보다 오히려 낫다, 말이 그렇지." 하며 강선혜는 명희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선혜언니가 큰일이야." 침묵을 깨고 명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게요." 숨이 트인 듯 백씨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날이 곧 추워올 건데, 들어간 분들이 겨울을 어찌 날 것인지 큰 걱정이에요." 백씨는 또 말했다. "권오송 씨는 어떤 괴물 같은 여자 때문이라며?" 여옥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니?" "나도 귀는 열려 있어." "이일 저일로 선혜언닌 불운했어.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그것도 알어. 그 괴물은 소위 상류사회를 누비고 다니는 경찰의 스파이라 하던데 명희 너도 알고 있니?" "그 얘긴 선혜언니한테서 들었어. 전에 한번 찾아온 일이 있는데 공교롭게 선혜언니 하고 부딪쳤지 뭐니? 여러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 모양이야." "흡혈귀 같은 여자라 하더군. 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건 언니에 비하여 순진한 편이고, 애비도 밀정이었다는 거야. 그런 연유로 경찰 간부 어떤 왜놈의 정부이자 그 손끝에 노는 스파이라 하더군." "어떻게 그리 소상히 아니?" 그러나 이상하게 여옥은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선혜언니 말로는 처음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거야. 무용발표 때도 청조에서 후원하는 것으로 해주었고, 한데 권오송 씨를 유혹하려다가 거절당한 앙갚음으로, 참 세상엔 별놈의 여자가 다 있지?" "상류사회의 할 일 없는 여자들 속을 뽑아내어 거미줄 감듯 친친 감아서 돈을 말아올리기도 하겠지만 동정을 살피고 정보도 수집하고." "어느 정도 정체가 밝혀졌으면 끊어버려야 하는 건데 여전히 그 여자는 다니던 집에 드나들고 있는 모양이더군. 왜 그럴까?" "이 맹추야, 그것도 몰라?" "뭘?" "세상 물정 하낫도 모르는 군. 사람들 심리에 대해서도 캄캄 소식이구." 명희는 쓰게 웃는다. "사람들은 해악을 당할까봐 두려운 거야.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지 않아? 왜 떡 하나를 더 주겠니? 제발 해코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지. 악신을 달래는 것도 우리들 풍속이야. 어떤 면에서는 아주 노회한 생각이지만,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소위 친일 패거리들인데 그 여자 뒤에 엄청난 힘이 있는 거로 착각을 하고 이용해보려는 속셈도 있겠지.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모얌이고, 하기야 뭐 경찰 간부의 정부면 힘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여옥아, 너 형무소살이를 하더니..." "하더니?" "말하는 투가 어쩐지 전과 같지 않아. 왜 그렇지?" 명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거칠어졌니? 누굴 저주하는 것 같아? 나 그렇지는 않은데." "거칠다기보다 뭐랄까, 가끔 그런 걸 느끼는데 좀 이상해." 순간 여옥의 얼굴에 긴장하는 빛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그런 일 겪고 나면 글쎄... 생각을 꾸미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걸까? 단순해지면서 강해진다고 나 할까? 아무튼 내게는 그곳이 값비싼 인생의 교습장이었어. 상상도 못할 그런 인생들과 만나게 되는 곳이기도 하구." 여옥은 말을 하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겁나는 얘긴 이제 그만들 하세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백씨가 말했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회재어머니." "그보다 법당에 있는 그림은 보셨어요?" "무슨 그림 말예요, 언니?" 하고 명희는 올케를 쳐다본다. "내가 얘길 안 했던가요?" "...?" "법당에 걸려 있는 관음상 말인데요. 재영이 할아버지께서 감옥에 들어가시기 전에 그 관음상을 그려놓으셨다 하는데 기가 막히더구먼. 정말 놀랬어요." "그분이 어떻게?" 여옥은 의아해했다. "옛날 어렸을 때 절에서 그림 공부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그아 금어라, 하든지요. 불화 그리는 스님을 금어라 한답니다. 장차 금어가 될 것으로 생각들 했는데 운명이 바뀐 거지요." "이제 생각하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아요. 환국이한테서 들었나? 양현이한테서 들었을까?" 명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그림이 법당 안에 있어요?" 여옥이 물었다. "네." "보고 싶지만 예수쟁이가 법당에 들면 벌 안 받을까요?" 여옥은 웃으며 말했다. "이 절 안에 들어왔고 절 지붕 밑에서 잠을 자놓고서 왜 그러세요? 길선생도 참 짓궂은 데가 있네요." 백씨의 짓궂다는 말은 벌받지 않겠느냐는 말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여학생 시절부터 집에 드나들어 백씨는 여옥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 좋아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백씨 기분은 그렇지가 않았다. 뭔지 모르지만 명희에게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상대처럼 느껴지느 것이었고 한편 부럽기도 했던 것이다. 백씨는 명희를 어떻게든 명희가 새출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명희를 위해서도 그랬지만 한편으로는 빚진 삶의 죄책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임명빈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명희의 불행이 친정 때문이라는 부담은 백씨에게도 늘 있었던 것이다. '학식도 인물도 우리 고모한테 비하면 모자라는데 어디서 그같이 좋은 사람을 만났을까? 하기는 결혼까지 할지, 그것은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어쨌든 사람의 일이란 몰라." 여옥의 말에 백씨는 깜짝 놀란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중얼거린 말을 바로 여옥이가 말했지 때문이다. "관에 못질하는 그날 끝나는 거지, 인생에는 종지부지가 없어. 우리가 내일 어떻게 도리 것인지 그걸 누가 알겠어?" 그 말은 화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의미심장한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일어섭시다. 더 올라가보든지 아니면 절로 돌아가든지." 여옥이 먼저 일어섰다. "절로 돌아가지 뭐, 나 피곤해." 명희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때 산사람 하나가 우쭐우쭐 걸어 내려왔다. 백씨는 안면이 있었는지 인사를 했다. 그도 알은 체는 했으나 냉담하게 그들 앞을 지나가 버린다. 강쇠였던 것이다. 그는 성큼성큼 보통 보폭으로 걸어갔는데 이내 이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구예요?" "저 위에 사는 화전민인지, 스님과도 가깝고 오빠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사인가 봐요. 김장사라 하든가." "그럼 씨름꾼인가요?" "글쎄, 몸은 힘깨나 쓰는 것같이 보이지 않아요?" 여자 세 사람이 절로 돌아왔을 때 강쇠는 절 마당에 서서 지감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절 방으로 피신하듯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눈치예요. 오빠도 쌀쌀하게 대하는 것 같고." 명희가 푸념하듯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좀 그래. 오늘밤도 그 암자로 내려가서 자야 하는 지, 한방에 다섯 사람, 아이까지 여섯 명이 자기에는 너무 비좁아." "그보다 그 보살인지 하는 여인이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명희 불평에 백씨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이 그리워서, 더구나 서울서 왔다니까 함께 지내고 싶어하는데 성질이 좀 이상한가봐요, 산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세 여자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남의 얘기도 했고 수학여행 온 여학생같이 들떠서 다소 철부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산속 별천지에서 일상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홀가분함도 있었을 것이며 임명빈이 건강이 생각 밖으로 호전되어 심각해할 문제에서 비켜설 수도 있었고 그러나 무엇보다 산은 자유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들 여자들도 따라서 자유러워 졌는지 모른다. 민지연이 산에 오래 있어서 이상할 것이라 한 백씨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자신이 믿는 것 이왼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아집이 완명하게 굳어버린 민지연의 타고난 성품이나 남다른 파탄을 겪었고 그 풀수 없는 운명과 아직도 마주서 있는 그의 처지, 그것들이 일단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지만 산중 생활은, 그 생활의 감정 자체가 사바세계하고는 사뭇 다르다. 하여 밖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상한 감을 갖게 하는 면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아씨 참 가여운 분이에요." 민지연의 시중을 드는 소사라는 여자의 말을 백씨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가여운 사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린 내일 떠날 건데 여옥이 넌 어차피 그 여자 신세를 져야 할거야." 명희 말에 여옥은 펄쩍 뛰었다. "내일 가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나는 내일 가야 해요. 볼일이 좀 있어서." 백씨가 말했다. "사정이 그러시다면 희재어머니는 가시고, 명희는 나랑 함께 지내다가 가는 거야. 서울 가서 뭘 하니?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최선생하고 너 꽁무니를 눈치 없이 졸졸 따라다니란 말이니? 난 싫다." "어어? 이거 누가 하는 소리지? 그 따위로 속된 말, 정말 임명이가 했단 말이야?" "기가 막혀서." "잔말 더 이상 할 것 없다. 여기 있다가 나랑 함께 서울로 가는 기야. 날 데려다줄 의무가 너에겐 있어. 내가 성한 사람이니?" "최선생이 데려다주실 건데 뭘 그래. 걱정 없어." "안 돼. 넌 나랑 함께 가야 해." "그렇게 하세요. 모처럼 오셨잖아요? 산에 단풍이 더 드는 것 보시고 천천히 놀다오세요. 오빠하고도 얘기할 새가 없었고." "오빠하고 할 얘기가 뭐 있겠어요." "오빠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정말 그럴 거니?" 여옥이 따지듯 말했다. "응." "그러면 너 나하고는 절교다." "무섭지 않아." 순간 여옥의 표정이 달라진다. 명희를 반히 쳐다본다. "그럼 말이야." "..." "최상길 씨가 오면 말이야, 쫓아버릴게." "뭐라 했니?" "그래도 나랑 안 있겠어?" "정신나간 소리 하지도 마." 했으나 명희는 저도 모르게 어떤 위안 비슷한 것을 느낀다. "아까 내가 결혼 얘길 해서 너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우린 정말. 좋은 친구야." "누가 아니래?" "사회적 통념으로 생각지 말아. 일반적인 그런 사이였다면 나 내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너희 오라버니, 지감스님도 계시는데 하필 이곳에 오겠니? 최상길 씨도 날 만나는 목적만으로 오는 거 아니잖니?" 진지하게 말하는 여옥의 태도가 우스웠던지 명희는 웃는다. 백씨도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그 진지함은 서투르고 천진해 보였다. "아까 나보고 뭐라 했지?" 여옥은 어리둥절했다. "세상 물정 하낫도 모르고 사람들 심리에 대해선 캄캄소식, 날 맹추라 했던 것 같은데?" "그랬는데?" "피장파장, 이 맹추야." "무슨 뜻이니?" "관두자. 정황이 가련하여 그럼 있어볼까?" "이제 보니 너 재롱떨었구나!." 세 사람은 깔깔대고 웃는다. "너 두고보자아, 언제고 한번 나한테 당할 테니." "언니." "네." "여옥일 보면 이상한 생각 들지 않아요?" "어떻게요?" "저렇게 살아서 눈알을 굴리고 있는 모습...기적 같애." "정말 그래요. 그땐 아무도 살아나리라 생각지 않았지요. 인명 재천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가 봐요. 인력으로는 저렇게 될 수 없지요." 백씨는 새삼스럽게 여옥을 바라본다. "그때 나는 종로거리를 지나면서...전포, 왜 그 장례에 필요한 것 말예요, 그 전포 앞에 서서 관을 보고 있었어요. 관이 두 개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지요. 정말 막막해지더군요. 아주 추운 날이었어요." 그러니까 일년 반이 훨씬 지난 작년, 겨울이 끝날 무렵의 일을 명희는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창경원에 가서 혼자 울었던 일은 얘기하지도 않는다. "오빠도 그땐 가망이 없었지요." 눈시울을 적시며 백씨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어차피 관 하나는 필요해." 관 속으로 들어갔을지 모를 자기 자신의 해골 같았던 그때 모습을 생각했는지 여옥이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지금은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다행이라는 생각은 바로 불안이야. 불행은 고통이고.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의 일이란 관에 못질하는 그날이 끝이지, 인생에는 종지부가 없어. 내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걸 누가 알겠어?" "그래서 불만이라 말이니?" "그렇다는 얘기지 뭐. 겸손해야 한다는 뜻도 있을 거구." "어쨌거나 너 최선생 은공 잊으면 안 될 거야. 친구이든 애인이든 결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요, 정말. 그리 지극한 마음이 어디 흔히 있겠어요?" "그건...그건 최상길 씨의 양심이지요. 기독교인으로서..." "과연 그것만일까?" "그것 이상으로 내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교만이다." 여옥이 성난 사람같이 말했다. '여옥아, 너 정말 괜찮은 여자구나. 조금도 들떠 있지 않구, 뭔가 넌 확고해.' 명희는 저도 모르게 여옥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살아주어서 고마워." "이앤, 새삼스럽게?" "그 동안 왜 말을 못했을까?" "감상에 푹 빠졌구나. 아서, 겁난다." "..." "감상적인 성미도 아닌데 그러니까 겁난다 말이야. 그보다 법당에 있다는 그림, 그거 보러 안 갈 거니?" "그래, 그거 보아야지." 명희와 백씨는 일어섰다. 그러나 여옥은 앉아 있었다. "넌 안 갈 거니?" "그림 같은 것 보아도 몰라. 취미도 없구, 보나마나 뭐. 넌 최씨 댁과 연고가 깊으니까 보는 게 도리겠지만 난 좀 쉬어야겠다. 피곤해." 명희는 굳이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왔다. 그때 산사라 같지 않은 청년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강쇠와 임명빈이 절뒤편으로 돌아다. "저이가, 어딜 가시는 거지?" 백씨가 중얼거렸다. "어떻습니까, 거처하기 불편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돌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지감이 서 있었다. "스님." "네." 백씨는 다소 불만스럽게 지감을 쳐다보며 "오늘 밤은 도솔암에서 묵어야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곳은 방이 비좁고..." "그럼 여운암에 가서 주무셨단 말씀입니까?" "네." "왜요?" "...?" "임교장께서 그러라 하셨군요." 지감은 빙그레 웃는다. "절의 넓은 방 놔두고. 오늘은 이곳에서 편히 주무십시오." "스님의 뜻은 아니셨군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하면은 그이가 어찌 우리를 박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짐짓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실은 남편의 생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냥 그래본 것이다. "세 분이나 함께 내려오신 걸 보시고 서울로 모셔갈까 봐 두려워 그러시는 거 아닐까요?"하고 지감은 소리내어 웃었다. "글쎄요...우리는 지금 관음상 그림을 보러 갈려구요." "네. 어서 가보십시오." 명희와 백씨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명희는 본시 기독교인이었지만 시작부터 타성적이었고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그리고 진정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명희 자신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따라서 절에 왔다거나 법당에 들어온 일에 저항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백씨는 독실하다 할 수는 없지만 불교를 믿는 편이며 그것은 그의 의식이 습관화된 것이기도 했다. 명희가 관음탱화 앞에 섰을 때 백씨는 불상 앞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무엇을 기원하는지 예배를 울리는 한복차림의 그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눈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화에 대한 상식이 없었고 종교적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판쯤으로 인식했던 명희 눈에 처음 관음상이 비쳤을 때 그 현란함과 섬세한 데 호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관이며 영락, 투명한 옷자락의 우연한 선과 그것에 싸인 아름다운 자태는 정교했고 색조는 유려했다. 그리고 환국의 부친이자 서희의 남편 김길상에게 이와 같이 숨은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백씨는 계속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 평소 집에 있을 때는 오래된 가구의 일부처럼 각별한 의미도 존재도 뚜렷하지 않았는데, 하기는 모처럼의 나들이여서 차림이 달라지기는 했다. 은은한 보랏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오랜 세월 한복에 길들여진 독특한 멋이 있었고 또 서울 여자의 세련된 탯거리가 역력했지만 그러나 그저 그런가 부다 했던 사람이 피어오르는 향과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부처님 미소를 나래를 펴듯, 나래를 접듯 일어서고 엎드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탱화에서 눈을 떼고 백씨를 바라보던 명희는 여간하여 그 예배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다시 관음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명희는 참으로 기이한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현란하게 보이던 관음상이 폐부 깊은 곳, 외로움으로 명희 이마빼기를 치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명희는 자기 마음 탓이려니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 바람과도 같이 영성을 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법당에서 나왔을 때, 선명한 단풍과 아직은 푸름이 남아 있는 맞은편 숲이 투명한 푸른 하늘에 묻어날 듯 명희 시계에 들어왔다. 마치 인생의 한 고개를 넘은 듯 명희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나왔다. 도대체 김길상이란 누구냐 하는 의문도 명희 마음속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그가 출옥한 지 십여 년, 그러나 명희가 길상을 만난 것은 환국이 결혼할 무렵에서 그 이후 서너 번인가? 정확하게는 환국이 결혼하던 식장에서 처음 명희는 길상을 보았다. 투사형의 장대한 체구를 상상했던 명희는 뜻밖이라는 생각 했다. 키는 컸지만 다소 마른 편이었고 몸가짐이 매우 조용했다. 투사형이기보다 오히려 명상적이며 현실과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언젠가 임명빈은 "출신 신분과도 다르고 활동을 한 행적과도 다르고, 학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이라 할까, 범치 못할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더군. 그분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야. 말수도 적은 편인데 그 말도 아주 절제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든 것이 생래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생역정에서 갈고 다듬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사람의 인연이란 참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했지. 신분이 극과 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울리는 한쌍의 부부도 세상에 그리 흔치는 않을 게야. 그분들의 인생이야말로 굉장한 드라마다." 그런 말을 했다. 문청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임명빈의 말투를 그때 명희는 민망스럽게 생각했다. "드라마 아닌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 그야 그렇지만 ." 해가 떨어지고 저녁을 끝냈을 때 산사에는 어둠이 밀려왔다. 상좌가 와서 불을 밝혀주고 간 절방은 한결 넓게 보였다. "명희야." "응." 명희는 좀 지친 듯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달이 떴을 거야. 달 구경 안 갈래?" "나 피곤해." "나갔다가 호랑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구요." 백씨가 농담하듯 말했다. "호랑이가 있을까요?" "공양주 말로는 호랑이가 있다 하더군요. 옛날에는 밤이면 나무판자 같은 것을 산막 둘레에 세워놓고 지냈다고도 하구요." "요즘에도 그런대요?" "글세, 아마 호랑이도 총소리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인가에는 접근 안 하는 것 아닐까요." 하고는 까닭없이 두 여자는 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명희는 화제에 끼여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옛날에는 호환이 많았던가 봐요. 그래서 호식으로 태어났다는 말도 있잖아요?" "얼마나 무서웠으면 산신령이라 했겠어요?" "무섭기도 했겠지만 호랑이는 영물이라 하더구먼. 그 눈빛을 보면 오금을 떼어놓을 수가 없대요. 해서 백수의 왕이라 하잖아요?" "그런 호랑이도 사람에게 잡혀 죽으니 사람같이 영악한 건 없어요." 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원장 계신가?" 익살스런 목소리였다. "네, 오라버니. 들어오세요." 여옥이 얼른 말했다. 임명빈은 방문을 열고 엉거주춤 방안을 들여다본다. "내일 가니?" 선 채 물었다. "들어오시기나 하세요." 뾰로통한 백씨의 말이다. "내일 서울 가는 거요?" 임명빈은 여자들의 기색을 살피고 백씨에게 또 물었다. 지나치게 이들 일행에게 냉담했던 것이 다소 미안해진 눈치였다. "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 엉거지춤 거기 서 계시면 어쩝니까?" 임병빈은 슬그머니 방안으로 들어왔다. 전과 별로 달라진 모습은 아니었다. 밀도 잃은 큰 체구, 큰 두상이 엉성하기로는 서울에서 누워 있었을 때와 매일반이었지만 거동하는 것만은 전과 달랐다. 그는 온종일 산속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것 같았다. 몽치가 헌 상여틀이라 한 말은 어느 정도 적절한 표현이었고 곧 죽어가면서도 개화장에 양복 걸쳤다는 얘기는 평사리, 장년학을 찾아 나들이할 때 모습을 몽치가 보았던 모양이다. "틀림없이 내일 서울 갑니다. 행여 안 갈까 봐서 오신 겁니까?" 백씨가 또 비꼬았다. "유감이 이만저만 아니구먼. 남의 속도 모르고." "네, 유감이 많습니다. 이만저만? 두고보십시오. 서울 오시면 단단히 받은만큼 갚아드릴 테니까요." 백씨는 눈을 흘겼다. 마음속으로는 흡족해하면서 일부러 성난체, 임명빈이 자유롭게 거동하게 된 것만도 얼마나 큰 홍복인가. 죽음을 기다리던 음산했던 서울의 그 시절을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임명빈의 목숨은 덤으로 받은 거나 다름없다. 백씨 마음에 불평은커녕 감사와 평화스러움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큰일났습니다, 오라버니.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여옥의 말이었다. "누가 서울 가기나 한 대?" "아닌게아니라 오라버니는 산동네 식구가 다 되셨군요. 우리는 불청객이구요. 너무하셨습니다." "나이 들면 여인네들은 뻔뻔해지고 남자들은 순진해진다 그런 말을 누군가가 하던데, 여자 셋이 모이니까 못할 소리가 없군 그래. 나, 깃발 쳐들고 환영한다 해도 서울에는 안 갈 테니, 앙갚음 할 기회가 없어 어쩌누." "장담하는 사람치고 장담대로 하는 사람 여직 못 보았습니다." "하여간 나는 서울 안 가." "독립이 되어도 말입니까?" "뭐?" 임명빈은 여옥을 빤히 쳐다본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서울로 모여들 텐데 오라버니는 이 산속에서 그냥 지내시겠군요." "그게 언제일까...내 살아 생전, 그걸 볼 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오라버니." "..." "희재어머님께서는 내일 떠나시지만 우리는 남을 건데 어쩌지요?" "무슨 소린가." "여수서 최선생이 오신답니다." 백씨 말이었다. "최선생이?" "네." "그걸 어떻게 알았소." "길선생한테 연락이 왔다 합니다. 그래서 함께 내려온 거구요." 대강 사정을 알고 있는 임명빈은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나 명희가 지친 듯 말없이 앉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명희는 어디 아프나?"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올케하고 함께 가지 그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임명빈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여옥이 두 팔을 치켜들며 맹렬한 기세로 말했다. "저하고 함께 갈 거예요. 가까스로 맘 돌려놨는데 그런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해요?" 마치 개구쟁이 같은 여옥의 동작에 모두 웃는다. 명희도 웃는다. "큰 업덩어리 만났지 뭐예요?" 기대었던 벽에서 몸을 일으킴 명희는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온다. "주변에서 불편하니까 결혼해라." 임명빈은 좀 심각해지며, 또 명희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야박하게 그러지 마세요, 오라버니. 저에게도 오빠 있어요." 그 말에 모두 또 한번 웃는다. "못 당하겠다. 그럼 나는 물러가야겠군." 임명빈은 일어섰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맑은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절 마당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고, 땅에 떨어진 절 그림자는 유난히 검고 짙게 보였다. 바람이 차디차게 목덜미에 와서 닿는다. 임명빈은 옷을 여미며 자기 거처방에 들지 않고 절 밖으로 나선다. 임명빈이 찾아간 곳은 도솔암에서 과히 멀지 않은 해도사 산막이었다. 장지문 안에서 사람의 머리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 왔소." 하자 방문이 열렸다. 해도사가 내다본다. 얼굴에 달빛이 쏟아졌다. 임명빈은 몸을 반으로 접듯 하며 방안으로 들어간다. 방안에는 해도사말고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불빛 아래 드러난 청년의 얼굴은 칼날같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러나 다문 입술은 도톰했다. "그냥 자기도 뭣해서 왔소이다." "피신하러 오신 거는 아니구요?" 해도사 말에 청년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피신이야 이군 쪽이고, 한동네서 피신은 무슨 피신." "나는 마나님을 피해 오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허허어, 젊은 사람 앞에서 그 무슨 말씀." "산속이 훤해졌소이다. 눈요기도 과히 나쁘지 않더구먼요." "아무리 그래봐야 서산에 지는 해, 가을 들판의 서리맞은 들꽃이라, 눈먼 새나 돌아보겠소?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소이다." 일년 넘게 산중 생활을 하더니, 또 입심 좋은 무리와 어울리더니 임명빈도 제법 수작이 는 것 같았다. "그보다, 어떻게 하나마나, 내일부터 더듬어야지요. 추워지기 전에 대강 요량은 해놔야 하니까." "마땅한 자리가 있을까?" "마땅한 자리야 부지기수지요. 지리산이 어떤 곳인데? 어떻게 경영하는가가 문제지요. 이군 한 사람 피신하는 거야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하면은." "지금도 수월찮은 사람들이 산에 들어와 있는데 앞으로의 일이 큰 문제지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 말씀이오?" "아암." 해도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피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뜻대로 된다면야 조선 사람 몽땅 피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 "철없는 젊은이들은 산에 들어만 가면 솔잎을 뜯어먹더라도 살수 있다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 있어보면 그렇게는 안 되어 있거든. 첫째는 식량이 문제고 산이 표적이 되어서도 곤란한 일이지요." "그건 그렇소." "그렇다고 해서 명을 걸고 들어오는 사람 막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소?" "..." "평사리 우가놈, 면소에서 서기질을 하는 그런 놈이 하나 있어요. 그놈이 사냥감을 찾듯이 며칠 전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간 일이 있었지요. 그놈을 잡아 없이하는 거야 어려운 일 아니나 일이 크게 벌어져서 산사람들 많이 다칠까 싶어서." "한 놈이 와서 뭘 어떡하겠소. 이 넓은 산중에서." "그도 그렇지만 들어오는 사람 중에 염탐꾼이 끼여들 수도 있을것이며 미련한 산놈 중에서 내통하는 자가 없으란 법도 없지요." "하지만 지금 일본의 사정을 봐서는 군대를 동원할 그런 처지도 아니고 경찰 역시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일 벌일 그런 형편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이군이라 부르는 청년이 입을 떼었다. "나도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속수무책 가만히 있겠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과격한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산은 조용한 것이 상수라. 그리고 보다 은밀해야 하고. 내 이군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나 자초하는 일만은 삼가야하네." 평소 어느 만큼 농담이고 어느 만큼이 진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해도사의 말버릇과는 딴판으로 매우 신중하게 타이르듯 말하는데 청년은 해도사의 심중을 뚫어 본 듯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름아닌 이범준의 친사촌동생이었다. 그러니까 외사촌인 소지감과 민지연에게는 사돈뻘이 되는 셈이다. 이름은 이범호, 나이는 이십칠 세, 그는 진작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특히 만주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범준을 통하여 국내연락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범호가 소속된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분산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이범호는 지리산에 나타나게 된 것이지만 실상 이범준의 지시에 의하지 않고 산에 나타날 리는 없었다. 이범준은 진주의 형평운동에 관여하면서 송관수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군자금 강탈 사건 때만 해도 그는 깊이 그 일에 참여하였으며 그 자금은 도솔암 일진과 함께 만주로 수송해갔던 것이다. 이범준은 그렇기 때문에 산에 관한 일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며, 사실 소지감만 하더라도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범준을 통하여 송관수를 알게 쇤 때문이다. 가닥은 좀 다르나 출가전, 민지연의 약혼자였던 일진이 도솔암에 온 내력도 그렇고. 얼기설기 엮어져 복합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물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상이몽이 아닌 것은 아니다. 산사람들과 의병 봉기에 합류했던 사람들, 만주로 도피했다가 돌아온 사람들, 그들은 깊든 얕든 간에 김환을 정점으로 흘러내려온 사람들이며 동학혁명 세력에서 대일항쟁으로 돌아선 민족주의. 말하자면 조선의 토종이라 할 수 있고 이범준은 막간에 뛰어들어온 사회주의 행동파다. 그러나 이범준의 조직은 따로 있었고 이쪽과의 연대 의식도 희박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찰이나 갈등 같은 것은 없었지만 송관수가 죽었고 김길상은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조직도 일단 해산한 형편이어서 그 해산된 조직을 그쪽에서 활용해보려는 가능성도 있 을 수 있는 일이다. 어쨌거나 정석과 일진이 만주서 이범준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고 또 이홍이 그들을 지원하고 있는 형편이라면 그런 계획을 세워봄직도 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제반 사정을 알고 있는 해도사인지라 범호가 산에 나타난 것이 단순한 피신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게 된 것이다. 해도사의 얼굴에서 신중하고 진지진한 표정은 차차 사라져갔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풀잎은 바람이 잘 때까지 엎드려야 하고 파도가 거세어지면 돛을 접어서 파도가 가라앉을 때가지 기다려야 하는 법, 인간사도 그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용기도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보다 지혜로움이 앞서야 하고, 이런 얘기를 하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풍월 읊는다 하며 비웃을지 모르나, 머리속에 도판을 그리기보다 땅을 먼저 밟아야 하네." 해도사는 점쟁이 같고 엉터리 도사 같은 일상의 면모를 되살려 내며 진부한 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조만간 딴 뜻이 있다면 범호는 그것을 내어놓을 것이다. 해도사는 항일을 위한 일이고 굳이 그것을 저지할 명분은 없으나 견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파도나 바람이 거센 것은 누구에게나 눈에 보이는 일이지만 정세에 관한 한 그것이 강풍인지 노도인지,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또 정보를 많이 가진 쪽이 판단하는데 유리하기도 할 거구요." 범호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거는 그렇지. 허나 판단이란 일 끝난 뒤 가부가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는 거나 기다려라, 그런 뜻으로도 들리는데요?" 비꼬는 투로 말했다. 범호는 아주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바로 그 뜻일세. 총알이 빗발칠 때는 누워 있어야... 개죽음이 용기는 아닌 게야." 해도사는 논쟁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심산인지 미련하게 밀었다. 범호의 얼굴이 벌개졌다. 두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임명빈은 자신이 나설 기회라 생각했는지, "그러면 이군에게는 따로 무슨 계획이라도 있단 말인가?" 하고 물었다. "계획 같은 것 없습니다. 그냥 생각해본 거지요." "그게 뭔데? 말해보게." 해도사는 일부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앞날에 대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고... 일본은 철저하게 그 동안 우리 민족을 분산해왔습니다. 한데 이곳 지리산은 관헌의 손이 미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유능한 젊은 사람들이 피신해오는 곳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그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는데 그 피신이라는 소극적, 혹은 소모적 기간을 어떻게 힘으로 응집해볼 수는 없을까, 지금 일본은 말할 수 없이 약화되고 인적, 물적, 모두가 궁핍 상태입니다. 겉보기에는 치안 유지가 잘돼 있는 것 같지만 내실이 없고 하나의 타성으로 밀고 나가고 있거든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선 민족 스스로가 공포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이 빠진 호랑이 앞에서 덜덜 떨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면은 있지." 임명빈 말에 해도사는 "그런 면이 있다 하시었소? 임선생, 그러면 공포의 타성인가 뭔가 그것을 벗겨내면 삼일운동도 되고 독립도 되겠구랴." 삐딱하게 말했다. "뭐가 또 그리 못마땅하오?" "흠." "점괘가 안 좋은 모양이지요?" 임명빈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점괘가 잘 나올 리 없지. 싸울 때보다 숨어야 할 때가 가장 위급한 시기니까, 하여간에 공포의 타성인가 뭔가 그거는 하늘이 풀어주어야지 인사로는 어려워. 그거를 나무껍질처럼 벗겨내자면 낫도 필요하고 소위 용사도 필요할 터인데 낫과 용사들은 어디서 마련할 것이며 삼천만 백성에 이 강산 방방곡곡 무슨 수로? 흔히들 도화선이라고도 하고 불시라고도 하지마는 사람과 때가 맞아야 하느니, 삼일운동이나 동학봉기를 보건대 백성들이 무르익었고 그 때에 맞추어 인도하는 사람이 길을 터주어 노도가 되었거늘, 벗기는 운동이 일시일각으로 되는 일이던가. 그리고 또 한가지는 전쟁이란 이미 백성들 손에서는 떠난 것, 군대 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든가 자중지란이 벌어졌다면 모를까, 전쟁이란 이기든 지든 간에 두말할 것도 없이 도살장인데 맨주먹의 백성들이 그 어찌 공포감 없이 대할 것인고. 불과 기만의 병사가 남경에서 삼십 만 양민을 학살한 사실을 어찌 모르는가. 독이 오른 독사를 피해야 마땅하고 그것을 잡으려면 독이 쇠하여 비실거리는 낙엽을 잡는 것이 지혜로움이라. 전쟁은 패하든 승하든 독오른 독사들 집단이 행하는 무극지옥이라, 내 말이 틀렸소? 임선생." 어떻게 보면 해도사는 상대를 설득하려는 것보다 덮어놓고 지껄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이 얼굴에는 도통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범호가 해도사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해도사는 손을 저으며 벽면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대신 임명빈이 말했다. "오해는 무슨, 이군은 처음이라 잘 몰라 그렇지, 저건 엉터리 도사의 상투고 다 알면서 바람 잡는다고 저러는 게야, 하하핫..." "..." "한동안 넋을 뺄 거야. 당해본 사람이나 알지. 나도 처음 산에 왔을 적에 동쪽에서 번쩍하길래 돌아보면 아니고 서쪽에서 번쩍하길래 돌아보면 아니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네. 천 년까지는 못되어도 한 오백 년 묵은 지리산 여우로 생각하면 틀림없어. 통하라는 도는 안 통하고 둔갑술에만 능하니 엉터리 도사, 하여간 처음에는 관망하는 것이 현명하네. 그러고 나면 진짜 가짜를 볼 수 있게 될 거야. 어디 여우뿐이겠나? 호랑이도 있고 구렝이도 있지. 하하핫핫..." "제법 늘었소이다." "아암, 신선은 내가 먼저 될 게요. 지감스님도 늦게 오셔서 법사가 되시지 않았소?" "어째 봄도 아닌데 노곤하구면. 이군, 술 생각 안 나나? 나지." "네, 술 생각 납니다." 해도사는 일어서서 나가며 말했다. "서둘지 말게, 산에는 철 따라서 꽃이 피고 잎이 지네. 서두는 것은 사람뿐이지." 술잔과 술병과 안주를 들고 해도사는 들어왔다. 서울서 장만해온 음식이 이곳에도 나누어진 모양이다. 화사한 음식과 뚝배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범호가 술병을 받아 술을 부었다. "임선생." "말씀하시오. 준비돼 있소." 해도사는 씨익 웃었다. "마나님도 오셨것다, 운우지락에 들어야 할 밤인데 영 망가져버린 모양이지요? 피신오노 것을 보아하니, 안됐소." "허허어, 저래가지고 명대로 살까 싶지 않구먼." 했으나 임명빈은 난처해한다. "밝히자니 계집이 있어야지, 하하핫핫핫." 한바탕 웃고 나서 "이군, 자네, 장가 들었는가?" "아닙니다, 아직." "어째서? 나이 세었는데 어째 미장가인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매사 서두는 게야." "네? 제가 서두는 것입니까?" "아닌가? 천지만물 음양이 합해야 태어난 구실을 하는 법이네. 나랏일을 한다고 해서 대처를 아니 한다는 것은 순리가 아닌 게야. 순리를 어기고서 무슨 놈의 나랏일인가." "이 정도 되면 그릇을 깨보든지 해야지, 제정신 가지고 말하는 거요?" 임명빈의 말이었다. "어째서요." "육십을 넘긴 홀아비가 삼십 미만의 총각을 보고 순리 운운, 배꼽 터질 일 아니고 뭐겠소." "내가 장가를 세 번이나 간 일을 임선생은 모르고 있었오?" "백 번을 가면 뭘해. 홀아비는 홀아빈데." "허허어 세 번 가서 안 될 때는 조상이 말리고 신령이 말리는 거요. 그 이상 또 취하려 한다면 그건 순리가 아니지." 하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째 날 쳐다보나? 자네 사회주의에서는 이론이 안 맞다 그건가?" "아아, 아닙니다." 범호는 부인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뜨악했다. 이런 인물들이 도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이군." "네." "내 말을 시덥잖게 들을 것이네만, 자네가 믿는 그 서양서 온 사회주의라는 것 말이세, 그거 안 되네." 해도사 말에 순간 범호의 낯빛이 싹 달라진다. 산에 와서 해도사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무릎에 시선을 떨어뜨리거나 아니면 곁눈질을 하며 좀체 눈이 마주치지 않았던, 그래서 범호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해도사의 눈이 범호를 똑바로 쳐다본다. 눈은 형형히 빛났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 빛은 사라지고 해도사의 몸은 흐물흐물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과 미욱한 시정 잡배 같은 웃음이 흐르는 것이었다. "산중에 앉은 점쟁이 따위가 개뿔도 모르면서 주제넘는 사설 한다 싶겠지마는 한 가지 충고를 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서양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뜯어고쳐야 하네." 범호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낸다. "사람 사는 꼴이나 이치가 동서에 따라 뭐가 그리 크게 다르겠는가. 사람이란 항상 남의 것을 탐내고 부러워들 하는 본성이 있어서, 또 알맹이보다 겉모양에 현혹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를 알기 전에 남의 것에 먼저 덤벼드는 경우가 많아." "좀 지나치시군요. 이념이 어디 탐나는 물건이겠습니까." "천지만물의 이치는 하나일세. 공연히 식자들이 그것에다 각기 다른 옷을 입혀 다른 것같이 생각하는데, 내 말을 끝까지 듣게. 그러면 그 옷이 무엇이냐. 소위 이론일세. 이론이란 꿰듯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사람 사는 이치가 다 드러난 것일까? 아니지. 하기야 끝없이 부연한다 하더라도 진리가 도드라질까?" "본론에 들어가자면 고개를 또 개나 넘어야 할꼬?" 임명빈이 탄식하듯 말했다. 범호는 부르터서 앉아 있었다. "또 하나, 과거의 유생들이나 요즘 신식 공부한 젊은이들, 그들의 폐단이 뭔 줄 아나? 그것은 쉬운 일을 아렵게 말하는 버릇일세. 아니, 어렵게 말한다기보다 쓸데없는 것으로 꾸며대거나 쓸데없이 개칠을 자꾸만 해서 오히려 알맹이에 도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말 잘하는 사람을 두고 왜놈들은 널판자 세워놓고 물을 흘리듯한다는 비유를 했고 조선에서는 청산유수라 했네. 일본 가서 신식 공부한 젊은이들은 특히 그러한 것 같은데 세운 널판자 물이 흐르듯 가파롭고 장소가 협소하단 말씀이야. 과거 우리네 선비들이 반드시 청산유수는 아니었네만 쉬엄쉬엄 쉬어도 가도 폭포가 되기도 하고." "그야말로 청산유수요. 서양서 온 사회주의는 안 된다 해놓고, 또 그런 것이 서양에만 있다는 생각 뜯어고쳐라 해놓고, 쉬엄쉬엄 쉬어서 가는 겁니까? 도대채 폭포에는 언제쯤 도달하게 되는 거지요? 해도 짧아졌고 어서어서 갑시다. 해도사." 임명빈은 비꼬는데 "허허어, 늙은네가 성미는 왜 그리 급하시오? 임선생도 왜물 마신 티 내느라 그러시오? 해가 짧으면 밤이 길어지는 법, 썩을까 걱정이오?" "이군, 명심해두게." 임명빈은 웃는 얼굴을 범호에게 돌리며 말했다. "뭘 말입니까?" "왜물 마신 사람, 그러니까 일본 유학한 사람들에겐 늘 저렇게 눈에다 불을 키는 것이 해도사의 버릇이다, 그걸 명심하라는 얘기네." "아암, 눈에 불만 키든가? 오장육부가 뒤틀리지. 가져오는 거를 뉘 마다할꼬? 내것 내어다버리고 조상 신주까지 내다버리니 그게 어찌 간 쓸개가 붙어 있는 사람이라 하리. 비록 내 자신은 심산유곡에서 신선 되려다가 되지 못한 이무기꼴이기는 하나 그런 잡베들은 존중한다면 나 역시 간도 쓸개도 다 빼버린 놈이 되지 않겠소이까?" "이군, 이직 저 정도는 서곡일세." "하여간에 아까 내가 말한, 서양서 온 그것이 안 된다, 그것은 틀려먹었다는 얘기는 아닌 게야. 결국은 태어난 생명들이 다 고르게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무리에서 따돌림받지 않고 업신여김을 받자않고 복되게 사는 것은 꿈꾼 것이 어디 오늘만의 염원이던가? 그것이 어디 사람만의 염원이던가? 천지만물 생명 있는 일체의 염원 아니겠는가. 하낫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 사람의 경우 그러기 위하여 정치의 형태가 달라져야 한다는 그 자각도 변함없이 내려온 것이고 보면 동과 서의 차이가 뭐 그리 대단할꼬. 안 그런가? 그것을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그네들에게서 비로소 비롯된 것으로 치부하는 생각, 그것이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다, 내 얘기는 그 뜻알세.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정치의 형태가 달라져야 한다는 염원이 우리나라에서는 진작부터 백성들에 의해 폭팔했었다는 일을 서양 사회주의 하는 젊은이들이 깡그리 잊고 있는 것이 나로선 안타깐네." 해도사는 술로 마른 입속을 축였다.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던 그의 모습은 그새 수축이 되어 단단해진 것 같았고 슬프게 보였다. 범호 얼굴에는 호기심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오백 년 묵은 여우, 둔갑술에 능하다는 임명빈의 말을 실감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소련에 앞서서 동학혁명의 전쟁이 있었네. 동학농민전쟁, 이군 자네 말을 빌리자면 소위 이념이라는 것인데, 동학이 어디 단순한 권력의 쟁탈전이던가? 아니지, 그야말로 이념의 전쟁이었다. 서양에서 한창 입으로만 왈가왈부하고 있을 적에 조선에서는 동학사상을 위한 전쟁이 있었다. 학문한 젊은놈들, 특히 신식 학문을 한 젊은놈들, 동학사상을 뭘로 생각하느냐, 미신이다, 하눌님 떠받드는 황당한 미신이다, 좋게 말해서 종교전쟁이다, 이군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아니 그런가?" 해도사는 쏘듯 범호를 쳐다본다. 범호는 너무나 강렬한 그 시선에 약간 질리는 기색이다. "그 생각이야말로 황당한 것이야. 동학의 사상은 천상을 향한 것이 아니네. 지상에 세원야겠다는 바로 그 염원일세. 증산교에서 강일순이 말했듯이 천상이 아니고 천하공사를 다시 하는 일인 게야. 그것은 조선 민족의 죽지 않고 남아 있던 뿌리가 다시 거목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거고 동학은 그렇게 꺾어었으나 다시 살아날 것이네. 하눌님은 천상에 계신 것이 아니며 백성 하나하나, 사람뿐만 아니라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 그 생명이야말로 하눌림이기 때문이다." 해도사는 비어 있는 잔에 술을 치고 천천히, 깊은 생각에 빠져들며 술을 마신다. "그것을 조선의 식자들보다 먼저 깨달은 것이 왜놈들이다. 한 뿌리에서 나간 왜족들이야말로 참으로 영악한 족속이지. 그놈들은 먼저 동학의 잔여 분자들을 회유하여 힘을 뽑아버렸고 증산교는 끝없이 핍박한 게야. 물론 강일순 후계자들의 잘못이야 있었지만 왜놈 그네들이 말하듯 일개 사교에 지니지 않는 것이라면 그같이 끈질기게 핍박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표면으로야 혹세무민의 사교라는 것을 유포한 데 불과한 것처럼 보이나 기실 개명했다는 청년층, 기독교도들을 부추겨 알게 모르게 각 지방에서, 심지어 제주도에서까지 증산교를 발붙이지 못하게 한 것이 일본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명산 산봉우리에 쇠말뚝을 박은 왜놈들, 그네들은 사악하게도 조선에서 무엇을 끊여놔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던 게야. 국토를 점령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 혼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야. 참으로 기막힌 일은 그 하수인들이 바로 조선의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은 잘해보자고 한 일이겠으나, 일찍이 눈을 떠서 수천 년을 내려온 것이라면 그 세월이 어찌 헛되게 갔을손가. 경험을 남기고 갔을 것인즉, 경험은 쌓이는 것, 그것들을 깡그리 묻어 버리고 없이하자, 그것만이 살실인 양, 황당하고도 황당하도다! 되어 있는 밥 엎어버리고 언제 꼬부랑 글씨 배웡서 새 밥을 짓누, 내것을 모멸하고 부수면서 독립운동을 해? 내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는 마음이어야 독립운동도 되는 거지.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의 대표적이 이 아무개인데, 그자가 독립운동을 안 했던 것도 아니오, 그러나 오늘은 어떠한가? 당연히 갈 자리에 가서 서 있는 게야. 하루아침에 별절한 것은 아닐세. 내것을 버려라, 벼려, 깡그리. 결국 본받아라, 본받아라 했던 그곳으로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 아니겠는가. 당연한 귀결이지. 소위 그 뭔가," "쉬엄쉬엄 쉬어서 가시오 해도사." 말로는 농조였으나 임명빈의 표정에는 감상적인 동의와 감동이 있었다. "그 뭣이냐,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는데..." 하다가 해도사는 까닭없이 씩 웃었다. "사람들 뽑아서 맨드는 대통령, 그런 제도를 민주주의라 하는 모양인데, 이군." "네." "그것도 서양 것인가?" 물론이지요." "대키! 순, 소 귀에 경 읽기, 똑똑하다는 놈도 이 지경이니 무슨 희망이 있겠다." "..." "자네 보통학교 나왔나?" 범호는 쑥쓰럽게 웃는다. "그러면 중학교는 건너뛰어서 대학으로 들어갔는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지가 무슨 천재라구." "그러면 분명히 역사를 배웠겠다? 왜놈들이 맨들 교과서이기는 하나 배우기는 배웠을 거네." "무슨 말씀이신지." 범호는 이 여우가 무슨 말을 또 하려는 건가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우며 되물었다. "설마 자네 요순 시대를 모르는 거는 아니겠지?" "하 참, 도사님, 왜 그러십니까?" "그려, 산골 늙은네들도 요순 시대를 알고 잇는데 자네가 모를 까닭이 없지. 바로 그게 민주주의인 게야. 황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만백성에게 뽑히어 제왕이 되었으니, 국토를 바르게 관리하고 백성들을 재난에서 지켜주며 일하여 먹고 살게 했으면 그게 바로 태평성세요 민주주의 아닌가. 각별하게, 어렵게 이러고 저러고 꿰어 맞출 필요 어디 있누. 하하핫... 하하핫..." 해도사는 호탕하게 웃어젖힌다. '아닌게아니라 둔갑술이 대단하군. 저 엉터리 도사 백년 가도 세뇌될 물건이 아니다.' 범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도사." 함께 웃다가 임명빈이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왜 부르시오? 무슨 반론이 있소이까?" "아니 그게 아니구, 오늘은 그런 대로 비교적 빨리 끝내어 허전하오. 산굽이를 안고 바위를 동아서, 실개천도 지나면서, 한참 갈 줄 알았는데 젊은 사람이 상대라, 해도사도 별수없이 많이 생략했구려." "직행했지요. 한데 임선생." "네, 무슨 반론이 또 있소?" "그 땡땡이중 지감 옆에 계시더니 많이 본을 본 눈친데, 그게 신상에 해롭소이다." " 그야 절에 오면 절 풍속을 따르는 것이 상례 아니겠소? 그도 그러하나어디 본볼 사람이 지감스님 혼자, 그거는 아니지요. 산속에는 장사도 계시고 도사도 계시고 참말 여러 가지 많이 배웁니다. 팔십 할애비가 손자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을 항용 하는데 하물며 내가 할애비도 아닌 터에, 도사 장사 스님께서 손자도 아닌 처에 배원서 안 된다는 이유가 있겠소?" "허허어, 산 떠나기 영 글렀네." "등을 밀어도 아니 떠날 것이요." "큰 업덩이를 만났구먼." "전생의 인연 아니겠소." "전생의 인연리라 하시니 생각나는 일이 있소, 거 임선생 매씨 말씀인데 친누이가 틀림없소?" 순간 임명빈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어디서 줏어다 기른 것 같소?" "안 닮아도 유분수지 형제간이라 믿을 수 없어서 그러요. 매씨게서는 젊었을 적에는 필시 천하절색이었을 거요. 한데 임선생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글쎄올시다. 호남아로는 천리 만리 밖인 듯싶고 누가 보아도 의심을 아니 할 수 없을 거외다." "그런 말씀 마시오. 늙고 병든 몸이니 그렇지요. 나도 젊었을 한 시절에는 남의 축에 빠지는 인물은 아니었소이다." 명희가 화제에 오른 것이 영 못마땅했으나 명빈은 애써 웃는 얼굴로 응수한다. 그러나 독설이 심한 해도사 입에서 무슨 말이 또 나올까 명빈은 속으로 전전긍긍한다. "한데 말씀이오, 임선생 매씨는 얼핏 보았소만 학상이더군," 임명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무슨 뜻이요." "고적하다는 뜻이지요. 지감같이, 여러 가지로 매씨는 지감과 비슷한 데가 있어요." "..." "신식으로 말하자면 수녀가 되었거나 중이 되었어야 할 팔자다 그 말이오." "그런 말씀 마시오. 해도사가 뭐 안다고." 명빈의 얼굴이 벌개졌다. "내가 점쟁이, 관상쟁이라는 것울 모르셨소?" "점쟁이건 관상쟁이건 나 내 누이 보아달라 하지 않았소이다." " 하나 보이기 위하여 태어난 것을 어쩔 것이오. 그레 그리언잖으셨소?" "좋을 리 없지요." "허허 참, 산에서 나가시지 않겠다 하시면서 연이 그리 질겨서야." "하무튼 나에 대해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 아니할 말로 몽둥이로 쳐도 개의치 않겠소. 허나 내 누이에 관한 얘기는 삼가주시오." "모두 허상이거늘, 좋고 나쁘고 뭐 그리 천지에 차이가 있을꼬." "그럼 나는 이만 가겠소이다. 밤도 저물고, 더 잇다간 무슨 몽둥이가 정수리를 내리칠지." 하며 명빈이 웃기는 했다. 그가 돌아간 뒤 "도사님, 좀 지나쳤습니다." 범호 말에 해도사는 씩 웃었다. "사람은 진국인데 너무 순직하고 씹히는 맛이 없다." 그렇게 임명빈을 평하는 것이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씀이 잇는데요." "말해보게." "도사님은 옛날에 동학 하셨습니까?" "아니네, 그냥 보았지." "그럼 증산교를 믿으셨습니까?" "그것도 아닐세. 그냥 구경했지." "그렇다면 아까 말씀으로는." "박에서 보았으니까 잘 보였던 게지. 내일은 길 많이 걸을 텐데 그만 자지." 휘영청 달이 밝은 산길을 지나 자기 거처로 돌아온 임면빈은 상처받은 짐승같이 한동안 씩식거리다가 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올리 없었다. 산사의 정적과 장지문을 통하여 스며드는 달빛 속에서 차츰 분노는 가라앉았다. 대산 괴로움이 마음 바닥을 핥고 목구멍을 치솟는 과정을 임명빈은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녀나 중이될 팔자라는 해도사 말이 언짢기도 했으나 그보다 이성을 잃은 자신의 처신이 못내 떠나지 않고 마음에 걸렸다. 부끄러웠다. 일어설 때, 간신히 웃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치졸한 자신의 언동을 덮어버렸다. 할 수는 없었다. 해도사가 바위 같은 존재라면 자신은 하잘것없는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털어내어도 털어내어도 마음속에 달려들었다. 서울서 그를 괴롭혔던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자의식도 되살아나 견들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냥 웃고 넘길 것을 빨근하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됐을 텐데... 그 사람 입버릇이 늘 그런 걸 알면서... 졸장부 같으니라구.' 사실 명빈은 자기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은 한 일이 있지만 자신이 피해자란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명희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명희는 늘 피해를 받는 처지이며 그것은 명빈의 가슴속에 낙인같이 찍혀 있었다. 아까 해도사에 대한 태도만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과잉 방어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명희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 가족 모두가 가해자라는 의식, 산에 오면서 얼마간 가라앉혔던 그 의식은 다시 자책감을 불러 일으키며 명빈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제가 명희 신세를 망쳤습니다. 저 아이를 어쩌면 좋지요? 비루하고 비천하게 저는 하는 일 없이 평생을 저 아이 괴로운 심장을 쪼아먹으며 살아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직이 강쇠가 보내준, 휘가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범호는 해도사를 따라 길을 떠났고 아침나절에는 백씨도 상좌의 안내를 받아 화개 나루터까지 갔고 그곳에서 따라온 여옥과 명희하고 작별하며 떠났다. "너희 오라버니 기분이 아주 나빠 뵈던데 우리가 산에 남아서 그러시는 거 아닐까?" 돌아오는 산길에서 여옥이 염려스럽게 말했다. "오빤 가끔 그래. 별 이유 없이 우울해하는 일이 있어. 그게 병 아니겠니?" "난 너희 오빨 사람 좋고, 이건 실례의 말이지만 다소 우둔하게, 화내지 마. 신경이 굵다는 생각을 했는데, 전에는 말이야." "그렇지는 않아. 늘 감상적이어서... 나이 들어도 그러는 걸 보면 나도 어떤 때는 짜증스러워. 하지만 사실 오빠는 굉장히 예민하고 수집은 성미야. 그래서 능력이 없는 건지. 하기야 뭐 이제는 오빠의 인생도 다 간 거 아니겠니? 편하게 사시다 가야 하는데.. 나 때문이지 뭐. 오빠 때문에 내가 이리 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게 탈이야. 거기다가 자신은 할 짓을 못하고 살아왔다는 자책감 그것도." 명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 제몫대로 사는 건데 누가 누굴 위해 희생을 하나? 나는 내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었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데... 내게 꿈은 없지만 안정되고 홀가분한데." "하여간 너희 오누이는 다 같이 답답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면에서는 어쩌면 그리 꼭 닮았니." 그들이 절에 돌아왔을 때, 절은 비어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들어오는 것은 몰라도 나간 것은 안다는 말이 있듯 백씨가 가고 난 자리가 텅하게 비어버린 듯 명희와 여옥은 공연히 풀이 죽었다. "여옥아." "음." "며칠이나 더 묵게 돼?" "그건 최상길 씨가 언제 오는가에 달린 거지. 심심해?" "응, 답답해." "벌써? 어제는 이곳에 살고 싶다 하더니." "인간은 습관의 동물인가 봐. 조용하다는 게 갑자기 부담으로 나를 누르는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나 뜨갯거리라도 가져오는 건데." "가나 오나 청승이다." "넌 안 그러니?" "안 그래. 고마울 뿐이야. 시간이라는 게 아주 귀중하고 고마워." "..." "그렇지 않다면 난 벌받아." "하긴." "그런데 너희 올케 말이야." "언니가 왜?" "정확하게 돌아가는 시계바늘 같다." "..." "너희 오빠도 그냥 식구 같을 뿐 남편 같지가 않고, 타인 같기도 하고 그렇게 몇십 년을 함께 몇십 년을 함께 살아왔다는 말이지?" "오빤 아까도 말했지만 수집음이 많아. 그래 그런 거야. 금실은 좋아. 남 앞에서는 항상 타인 같아 보이지만 대개 조선 사람들 그렇지 않니?" 화개까지 갔다왔다는 것은 이들 두 여자에게는 강행군이였다. 명희는 산길에 익숙지 않았고 지난날 길 걷기로는 선수였던 여옥도 회복이 되었다고는 하나 몸이 옛날 같지는 않았다. 사실 이들은 몹시 지쳤고 맥이 쑤욱 빠져서, 그냥 타성으로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하고 있었을 때, 해가 서편으로 엄치 기운 산문 밖에는 허름한 참림의 최상길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절에서 내려오던 상좌 보신과 마주친다. "어서 오십시오, 최선생님." 도솔암의 지감을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온 적이 있어서 낯이 익은 보신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음, 스님 계시냐?" "예." "서울서 손님들은 오셨고?" "예, 세 분이 오셨는데 교장선생님 부인께서는 아침나절에 떠나 셨습니다.." 얼굴 위에 날아내린 나뭇잎을 고개를 흔들어 떨어뜨리며 보신이 말했다. 최상길은 기감이 거처하는 방 앞에까지 갔다. "형님." "들어오게." 지감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나왔다. 최상길은 방으로 들어서면서 "그간 별일 없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중한테 무슨 별일이 있겠나." 지감은 읽던 책을 덮고 돌아앉았다. "서울서 손님들이 왔다는데 어째 절이 조용합니다?" "글세... 한 분은 가셨고 임선생은 몸이 불편하신지 여태 거동을 안 하시는구먼." "원래 편찮으신 분이지요." "그간 많이 회복이 되어 운신하는 데 불편이 없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서울바람이 하도 거세게 불어와서 병이 났는가?" 지감은 말하면서 슬그머니 웃었다. "중이 체모 없이 그런 말 해도 되는 겁니까?" "나 같은 땡땡이중, 이런들 저런들 어쩌리." 하고는 턱을 쳐들고 손바닥으로 목을 슬슬 만진다. 저고리 넓은 깃속의 목이 유난히 가늘어 보인다. 가을이어서 그랬는지, 진정 그의 모습은 가을만 같았다. "파계는 안 했는지 모르겠소?" "대처승이 판치는 세월, 그까짓 것 무엇이 그리 대수인가. 어차피 육신은 헛껍데기거늘, 집착한들 아니 한들 다 소용없는 일이네. 허울 벗어놓듯, 잠깐 왔던 곳을 떠나면 그만." "번뇌를 벗었다는 말씀입니까?" "심각하게 그러지 말게. 어찌 그것을 확인하려 드는가. 그보다 자네는 뭣하러 왔나. 여자 때문에 온 게야?" "그 문제도 있지만... 그냥 와봤습니다. 지가 뭐 하는 일 있습니까?" "금홍이는 깨끗이 정리했고?" "그런 셈이지요. 그 얘기 형님보고 안 하던가요?" "못 들었다." "..." "계집의 투기가 유별나기는 했으나, 버릴 양이면 뭣 땜에 합쳤는가. 아무리 화류계 출신이기로." "버린게 아닙니다." "최상길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그리고 망연히 연기를 뿜어낸다. "그러면." "지 성질에 못 이겨 떠난 거지요." 데가 따로 있으니까 그랬던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형님은 길여옥을 두고 그러시는 모양인데 그건 오해입니다." 하면서도 최상길은 설명하기가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최상길은 물고 있는 담배를 질근질근 씹듯 하다가 미친 차를 달여온 보신에게 "뭐 재떨이 같은 것 없냐?" 하고 말했다. 보신이 자그마한 뚝배기 하나를 가져왔다. 담배를 버리고 나서 최상길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금홍이 투기심은 불안과 열등 의식이 그릇되게 표현된 것입니다. 큰집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사회가 그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최씨네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겠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독점하려는... 그러니 병적 집착이 나타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의외의 관계를 철저히 짜르려 하고 고립, 사회 활동까지 저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가엾은 여자지요." 최상길은 잠시 동안 말을 끊었다. 금홍이가 집을 나간 뒤 한 달이 지났을 때 최상길은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돌아오기를 원치 않았음에도 최상길은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달래었다. 그것은 일종의 연민이기도 했으나 일종의 가책이였고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최상길은 그때 일을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나 오히려 홀가분해요. 다 버리니까 이렇게 편한걸. 사람은 다 제 분수대로 살아가야 하나 봐요. 나는 남의 눈치보면서 살 수 없어요. 참고 견디면서 살 수 없어요. 짓눌리어서 살 수 도 없어요." "..." "당신 나 때문에 많이 참은 것도, 불쌍해서 데리고 산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단신하고 같이 사는 이상 평생 그럴 거예요. 나도 내 명대로 못 살 것 같구.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볶아대도 내 자신을 볶아대고..." 하다가 금홍이는 울었다. "어디 돈 많고 못난 영감쟁이 하나 얻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 금홍이는 헤어져서 나오는 최상길에게 그런 말을 하며 웃었다. 최상길은 돌아오는 길에서 등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은 듯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러한 자기 자신을 가증스롭게 생각하면서도. "지금 금홍이는 어디 있나." 지감이 물었다. "얼마 전까지 여수에 있었습니다만 고향으로 갔다 하더군요." "살 궁리는 해주었어?" "그건 물론 그랬지요." "결국 동기는 길여옥 그 사람이구먼." "지금 와서 왈가왈부한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옥씨한테 대한 감정... 쑥스런 얘기지만 그런 감정이 있기 훨씬 전에 금홍이가 떠났으니까요." "잠재적으로 있었겠지." "글쎄요, 그건." "그러면서 어쩨 먼길을 돌아왓나." 지감은 농조로 말했다. 최상길은 처음으로 웃었다. "그건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 "길여옥이란 여자에 대한 감정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근 그는 선배의 누이였고 친구의 아내였습니다. 전도사로 여수에 나타났을 때도 선배의 누이이며 한때 친구의 아내였다는 사실 때문에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편안했고 거리낄 것도 없었고요. 파렴치한 친구에 대한 분개도 한몫 했을 겁니다." "흠." "형무소에 들어갔을 적에도 같은 교인으로 순교하는 그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내 자신의 양심 때문에 그를 도왔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에게 애정을 느낀 것은 형무소에서 그를 없고 나온 그 순간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그같이 이상한 감정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였습니다. 사람의 형상도 아니고 새털같이 가벼운 죽어가는 여자,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밑바닥에 피눈물이 고이는 것 같고, 이 죽어가는 여자를 위해 내 뭣인들 못하리, 그때 난생 처음 강렬한 애정을 느꼈습니다." "그래?" 한동안 침묵이 지나갔다. 최상길은 담배 한 개비를 뽑으며, 묘하게, 수줍게 일그러진 듯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결혼하겠는가?" "그게 두렵습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부모가 맺어준 처음 여자는 불미스런 일로... 금홍이는 내 삶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을 무렵 저를 도와준 여자였습니다. 서로 사정이야 다르지만 두 번이나 파탄을 겪은 지로서는 사실 그 문제가 두렵고 결단을 내리기도 어렵지요." "그럼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건가?" "형님은요?" "나야 머릴 깎지 않았는가." "그 이전에는 왜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다 지나간 일, 허허헛..." "형님." "음." "형님이 머리를 깎으신 것은 진실입니까?" "대답은 없다." "왜요?" "진실을 어떠한 자로 재겠나." "하지만 그것은 형님 자신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어떻게 꺼내어 너에게 보여주나." "적어도 아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사바에서 하는 식으로? 아니다, 그렇다 해서는 이 길로 들어올 수는 없네.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일세." " 최상글은 천착하듯 지감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다. "너 자신이 본 대로 느낀 대로... 그것도 일순, 일순간일세. 왜냐하면 너도 나요, 나도 너이기 때문이네." 아리송한 말을 하며 지감은 다 식은 찻잔을 들었다. 장 독아 시월도 가고 십일월의 중순, 찬비가 내리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 했다. 바람에 따라 미루나무의 노란 잎새들이 눈보라처럼 흩어져 날아내리곤 했는데 해가 떨어짐변서 한층 바람은 드세어졌다. 초 겨울의 짧은 해는 창가에 비치는 새 그림자와도 같이 저녁을 먹었는가 했더니 어느새 사방은 캄캄, 칠흑 같은 어둠에 마을은 휩싸였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길을 쓸어가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비는 멎은 듯했다. 집집마다 목마름과도 같은 등잔불이 켜지고 다그쳤던 추수기를 보낸 느긋함이 없지는 않았으나 초저녁부터 자리에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추뿌리, 구구마 같은 것을 삶아놓고 그것으로 덜 찬 배를 채워가면서 마을 아낙들은 목화씨를 지치지도 않고 발가내는가 하면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헌옷에 무를 대어 깁기도 하고 소반을 들여다놓고 콩나물콩을 고르기도 하면서 식구 없는 사람은 홀로 한숨쉬기, 식구 많은 사람들은 이웃 얘기며 지나온 얘기며, 그날이 드날인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극성스런 아낙은 비 멎는 것을 보고 바람 속에서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도 콩탁 콩탁! 보리방아를 찧고 있었다. "무슨 청승고. 새북에 하믄 될 긴데 오밤중에, 하야간에 오도방정이다." 남정네가 내다보며 혀를 찼자만 "시끄럽소. 이침 일찍 산에 갈라꼬 안 그러요." "초상났나? 묏자리 보러 갈 기가!" "새끼나 애비나 할 것 없이, 이 집 식구들 나무 한짐 져다주었십니까?" 아낙은 콩탁 콩탁 방아질을 하면서 말대꾸를 한다. 하기는 겨울이 코앞에 닥쳐 있었다. 그새 추수하느라 틈이 없었고 수숫대 고춧대 콩대가 있으니 우선은 지낼 만했으나 부피만 컸지 그것들은 마디질 못해 금세 동이 날 것이다. 땔감의 준비는 사실 절박한 일이 었다. "하도 긁어낸께로 산이 마알갛더마. 생나무 꺾어오다 들키믄 큰일이고, 그나저나 우짜노. 멀리 가도라 캐도 이자부터 시작해야지. 그새 숨돌릴 새나 있었던가? 대강 하고 들어오라고. 냉방에 자게는 안 할 긴께." "보리쌀이 물 묻혀놨는데 끝은 내야제요. 오늘 밤 바람이 이리 분께 내일 아침 일찍이 가믄, 멀리까지 안 가고 한짐 올 성싶소." "셈 하나는 빠르구만." 그런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논둑길을 꾸물꾸물 기다시피 가는 것이 있었다. 바람이 세찰때는 논둑길에 엎드리곤 한다. 어둠 속에 움직이는 그것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몹시 작아 보였다. 신음 소리를 내다간 흐느껴 울기도 하는데, 계집아이 같았다. 인가의 불빛은 저 멀리서 깜빡이고 있었다. "할무이 할무이... 할무이..." 드디어 그는 성환할매 집 앞에까지 갔다. "할무이, 하, 할무이..." 집안에서는 도란도란 바람 사이로 얘기가 들려왔건만 밖에서 부르는 소리는 집 안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할무이 할무이." 그러나 그 소리도 끊어지고 계집아이는 앞으로 고꾸라졌는데, 이때 마을왔다가 돌아가는 야무네 발길에 계집아이가 걸린 것이다. "아이구매! 이기이 머꼬?" 야무네는 몸을 기울여 들여다본다. 보다가 손으로 더듬어본다. "아이구 우짜꼬! 귀남아! 성환할매!" "와 그라요." 귀남네가 마루에 선 채 어두운 밖을 내다본다. "여기 좀 나와봐라! 사람인갑다. 쓰러져 있구마. 불 좀 가지고 나와브라 카이." 귀남네가 초롱을 들고 나왔고 성환할매도 뒤따라 나온다. "뭐가 우떻다 캅니까." "사람이다! 쓰러져 있네 귀남네가 초롱을 비췄을 때 맨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인 성환할매 였다. "남아!" 하다가 성환할매는 중심을 잃고 나자빠졌다. "맞다 남희다! 이 사람아, 초롱은 나 주고 아아부터 안아들이라." 하다가 야무네는 아이 가슴에 귀를 대본다. "어서, 어서, 아아 몸이 얼음겉이 차다!" 귀남네가 남희를 방에까지 안고 들어왔을 때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방까지 달려온 성환할매는 "세상에 이기이 무신 일고!" 하며 아우성을 쳤다. 그러고는 아이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남아! 아가! 눈 좀 떠봐라!" 야무네는 남희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주무르면서 "귀남아, 더운 물 좀 가지오니라." "야." 귀남네는 바삐 나갔고 성환할매는 "아가아! 남아! 눈 좀 떠봐!" 그러자 "할무이." 하며 남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가! 남아!" 성환할매는 와락 남희를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할무이, 여기가 우리 집이요?" 남희는 굳게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우, 운냐, 우리 집이다. 이자 정신이 좀 드나?" "응." 성환할매는 남희 얼굴을 쓸고 또 쓸어본다. "아 아니지, 옷부터 갈아입어야겄다. 무엇 땀시 찬비를 맞고." 성환할매는 농짝 문을 열고 서둘러 치마 저고리를 꺼내었다. 성환할매 자신의 옷이었다. "아가, 옷 갈아입자." 몸을 웅크리는 아이를 달래며 가까스로 젖은 옷을 벗겨낸다. 얼핏 보기에도 진짜 털실로 짠 수박색 스웨터며 갈색 사지로 만든 바지는 요즘 같은 전시, 최고급의 옷이었다. 그러나 발은 양말도 안 신은 맨발이었다. "우찌 이리 뻬만 남았노. 어이구." 키는 훌쩍 컸으나 몸은 여위어 뼈만 앙상했다. 야무네는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옷을 갈아입히는 할미와 앞가슴을 가리면서 순순히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는 손녀, 그들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그 광경이 애잔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야무네는 지나날 섬에서 병든 푸건이를 데려왔던 일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폐인이 되어 일본서 돌아온 야무의 일도, 둑길에 쓰러진 야무를 동생 딱쇠가 업고 오던 날 밤 생각도 났다. 단단하게 야무지게 살라고 이름지었건만 야무는 한창 젊은 나이, 형무소살이로 인생이 망가졌고 넉넉하게 살라고 이름지어준 푸건이는 이 세상을 못다 살고 청춘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자식이란 멋일꼬? 애간장을 녹이는 기이 자식이다. 전생에 무신 인연으로 부모 자식은 맺어진 길까?' 그러나 야무네는 요즘 한 가지 한을 푼 것이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크나큰 위안이었다. 한복의 딸 인호를 며느리로 맞이한 그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우가네 집 식구들이 한복이 내외를 막바지까지 몰고 갔을 때 돌연 인호는 야무에게 시집가겠노라, 실로 놀라운 선언을 했던 것이다. 폐인에게 시집을 가다니,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을 인호는 끝끝내 고집을 했다. 우가네의 일동이를 피하기 위한 마지막 방도이긴 했지만 인호는 오래 전부터 가엾은 야무에게 깊은 동정심을 안고 있었던 모양이다. "병든 사람 수발이나 들믄서 세상 보낼랍니다. 어진 사람들인께 아부지 어무이 못살게 할 까닭도 없일 기고 박복한 지가 사는 길은 그것밖에 없일 성싶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중이나 되지." 하고 영호네는 울었다. "중 된 셈 치고...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겄소." "나이가 얼만데 그러노. 아부지뻘이나 된다."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몸도 성찮은 사람, 언제 무신 일이 있을지 누가 아노. 억울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과부 소리 들을 기가." "천년 만년 사는 사램이 어디 있겄소." "세상 사램이 모두 미쳤다꼬 웃일 기다." "..." 모녀간에 하는 말을 들으면서 한복은 끝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다. 결국 인호는 야무에게 갔다. 한복은 딱쇠와 의논하여 비어 있는 오서방 집을 손보아 야무 내외가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야무네도 큰아들을 따라왔다. 그리고 한사코 사양하는 것을, 한복은 밭 한 자락과 논 두 마지기를 딸에게 떼어주었는데, 물론 딱쇠도 형이 장만했던 땅을 가졌기 때문에 병든 형을 위해, 또 모친을 위해 추수 때는 얼마간의 곡식을 형네 집에 날라다 주었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희망이 생겼기 때문일까 뜰 안에서만 거동하던 야무는 차츰 들판에 나오게 되었으며 때론 풀매는 일을 거들어주는 일도 있었다. 귀남네가 더운 물을 가져왔다. 성환할매는 남희를 안아 일으켜 물을 먹인다. "할무이, 나 배고파요." "우짜꺼나! 귀, 귀남아, 우선에 미음부터 좀 쑤어라." "알았소." 귀남네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그는 귀남이가 아파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때 일을 생각한 것 같았다. 남희는 배고프다 했으나 마음을 놓은 때문인지 지쳐서 그랬던지 이내 자리에 쓰러졌다. 야무네는 남희 팔을 만져보면서 "이자 아아 몸에 온기가 돌아오요." 하고 말했다. 성환할매는 "한심 잘라나?" 하고 묻는다. 남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음이 끓을 동안 눈 좀 붙이라." 방바닥은 따뜻했다. 성환할매는 자리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주고 다독거린다. 남희는 이내 잠에 떨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깜박거리는 등잔불 아래 잠든 남희 얼굴은 창백했고 일그러져 보였다. 들꽃을 꺾으며 노래를 부르던 천진난만했던 그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어떤 음산한 절망감만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몹쓸 년!" 성환할매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소리를 죽여 운다. "마목 겉은 년! 우찌 아아를 이 지경 맨들었겄노." "그만하소. 이자 아아가 돌아왔인께." "돌아와도 유분수지, 우찌 이리 되어 돌아왔겄소." "오매불망, 밤낮으로 노래를 부르든 아아가 돌아온 것만도 얼매나 다행이요. 이자는 품안에 왔인께 마음 놓으소." "우찌 마음을 놓겄소? 아아 성상 좀 보소." "..." "꽃봉오리 겉은 나이에 머를 우쨌길래 아아가 철골겉이 말랐겄소? 빈손에다가 맨발로 온 거를 보이 그 제집이 순순히 보낸 거는 아닐 기고 필시 도망을 쳐서 나온 모앵인데 이 바람 부는 날 천비를 맞고... 대체 무슨 곡절이겄소?" "그거는 아아가 정신차리믄 차차 얘기 안 하겄소." "참말이제 억장이 무너지요." "커나는 아이, 한밥에 오르고 한밥에 내린다 안 카요? 며칠 조섭만 잘하믄 회복이 될 깁니다. 사램이 어찌 무병으로 살 수 있겄소? 아플 때도 있고, 고개를 넘고 또 넘어도, 사람 사는 기이 안 그렇소? 더군다나 여기 오니라고 지 딴에는 용을 썼일 기고 날씨마저 이러이 찬비 맞고 헤맸일 긴데 몸이 온전할 리가 없지." "온 거사 천분 만분 잘한 일이지마는 아아 꼴을 본께 피가 마를 것 겉소. 이년을 그만, 지 죽고 나 죽고 이 악연을 끊어야지. 전생에 무신 철천지 원수가 졌길래 이리 끝끝내 몹쓸 짓을 하는지 모리겄소. 내 아들 잡을라꼬, 우리 석이 발붙이지 못하게 한 것도 그년 때문이며 일일이 말을 다 할라 카믄 기가 넘어서 내가 못살 기요." "참으소, 참아. 원수는 세월이 갚고 남이 갚아준다 안 카요." "많이 참았제. 더 이상 머를 우찌 참을 기요?" "이런 때일수록 참아야제요. 성환이 남희, 불쌍한 그것들 끈이나 붙여주고 눈을 감아도 감아야지, 안 그렇소? 하늘이 무심치 않을기요. 하모요, 죄지어 남 주요? 공든 탑이 무너지겄소?" "어디 세상이 야무어매 말맨크로 그리 됩니까? 죄 많은 연놈들은 문딩이 되듯 되는데 아, 우리 동네 꼴 보소. 우가, 숭악한 그것이 판을 치고 떵떵거리는 세상 아니요? 불쌍한 사람들만 보국대에 끌리나가고 정말 이래 가지고는 영신이 있다 할 수 있겄소?" "어디 다 살았소?" "다 사나마나." "죽을 때꺼지 영화를 누릴지 그거사 모리는 일이라요. 아무도 장담 못하제." 몽매간에 그리던 손녀가 와서 반기기보다 통탄하는 성환할매 심정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맨발에 빈손으로 와서 쓰러진 사정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나 남희 모습 자체가 처참했던 것이다. 그새 세월이 흘러 다소간 달라지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병색이 완연했고 마치 혼을 빼어놓고 허울만 돌아온 듯 성환할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들판을 달려가는 바람 소리, 숲에 부딪쳐 소용돌이치는 소리, 날씨마저 음산하고 불길했다. 귀남네가 미음을 쑤어 가져왔다. "남아 아가, 미음 한모금 마시고 자거라." 성환할매는 남희를 안아 일으키려 한다. 남희는 그 손을 뿌리쳤다. "배고프다 안 했나? 자아." 다시 흔들어본다. 남희는 겨우 눈을 뜨고 "할무이, 여기가 우리 집이요?" 아까 물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하모, 우리 집이고말고." 미음을 먹인다. "우찌 미음만 달랑 가지왔노? 입가심하게 김치라도 좀 가지오지 않고." 성환할매는 저도 모르게 귀남네한테 짜증을 부린다. "아이 참, 별시럽게 그래쌓네. 남우 집 고공살이하다 병들어서 우리 귀남이 돌아와도 남 보듯 하더마는 범이 제 새끼 잡아묵겄소? 어매한테 있음서 호강하다 왔는데 천지가 무너진 듯 참말로 해도 너무하요." 샐쭉해서 말하는 귀남네에게 "귀남네 니가 접어서 생각해라. 에미라 캐도 유만부동, 그거를 어릴 적부터 끼고 살았이니 어매가 그런다고 생각하라모. 니한테도 하나밖에 없는 오래비 핏줄 아니가." 귀남네한테 모진 말을 듣고 기절을 하고부터 야무네는 귀남네 대하는 것을 신중히 해왔다. "부모 맴은 매일반 아니겄소. 자나깨나 친손자손녀 노래지 어디 한분 외손자 걱정한 일이 있어야제요. 나도 심장이 상하요. 안 그러겄다 싶으면서도." "그만해라. 그런 얘기는 두었다 하고, 입가심하게 김치나 가지오너라." 야무네는 눈을 깜빡거리고 팔을 저으며 말했다. 성환할매는 아무 대꾸 없이 남희에게 미음만 먹이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할머니 옷을 입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반은 졸면서 미음을 받아먹는 남희, 성환할매는 오로지 그것에만 정성을 쏟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상 그는 분노를 참고 있었던 것이다. '허깨비겉이 돼서 아아가 돌아왔는데 제 버릇 개 못 주고 심청을 부리? 그래가지고 복 받을라.' 그러나 귀남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성환할매는 그것을 수긍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난 세월이 되살아나서 맺힌 응어리가 도지는 것이었다. 귀남애비가 집 나가기 전에는 친손자만 끼고돈다고 귀남네가 불평을 할 때마다 성환할매는 "귀남이는 애비 에미가 있인께, 불쌍한 저것을 내가 안 그러믄 누가 그럴 기고." 하며 애원하다시피했다. 원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 자식과 조카들을 구별하여 귀남이는 헐벗어도 노상 배불리 먹였고 기가 나서 펄펄했건만 부모 없는 남매는 항상 굶주려야 했으며 풀이 죽어 있던 세월, 남매를 끌어안고 보낸 눈물의 세월을 성환할매는 잊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그러한 사연 때문에 귀남에게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정이 가지 않았던 것에는 사위에 대한 감정도 있었다. 무경위하고 미련하여 심술궂고 무지막지했던 사위에 대한 원망과 경멸은 아직도 성환할매 기억에는 짙게 남아 있었다. 그가 집 나간 뒤 꽤 긴 세월이 지나갔고 사위도 자식이라 했건만, 혼자 남은 딸의 신세가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환할매는 사위 생사에 대하여 절실한 느낌이 없었다. 그것은 바람만 불어도, 밤하늘의 별만 쳐다보아도 아들 석이의 생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 탓이었는지 모른다. 핏줄도 아니요 좋게 지낸 적도 없는 사위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사야 어찌 되었든 현재로서는 성환이가 똑똑하고 최참판댁에서 뒤를 보아주어 대학생이 된 처지에 비하여 가까스로 보통학교를 나와 진주서 남의 집 고공살이를 하는 귀남이, 게다가 남정네 없는 자신의 신세를 생각할 때 귀남네 마음에 시샘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사리로는 판단하지만 성환할매 감정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딸의 불손은 다 잊었지만 아이들의 서러운 성장기를 성환할매는 영 잊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모녀간에는 메우지 못하는 도랑이 가로놓여 있었고 두 사람의 심정은 영원한 평행선이었다. 귀남네는 김치 한 보시기를 갖다놓고 나가버렸다. "오동지 섣달, 지 오래비가 물지게 져가믄서 저거들을 키웠는데 손톱만치라도 그거를 생 저렇게는 못할 긴데 우리 복연이 반만 돼도 저러지는 못할 긴데..." 귀남네가 나가자 성환할매는 구시렁거렸다. "태성이 그런 거를 우짜겄소. 성환할매가 그냥 접으소. 지 처지가 처량한께 안 그러요." "사촌이 어디 뭐요? 서로 도아감서 살아가야 할 긴데 우찌 국량이 그리 좁아터졌소." 비몽사몽인 듯 미음을 다 먹은 남희는 그냥 쓰러져 다시 잠들고 말았다. 성환할매는 다독거리고 손녀의 얼굴을 쓸어주고 또 쓸어주면서 "산골에 산께로 지 자식은 공부도 못 시키고 무식꾼으로 키우믄서도 조카들 일이라 카믄 주야로 애달파하는 작은아아한테 비하믄... 천양지간이제요. 귀남이가 아파서 왔일 직에 성환이 소식을 물었다고 길길이 뛰고 울고 야단이더마는 기진맥진한 아아가 하룻밤도 새기 전에 해구는 꼴 보소. 내 속에서 우찌 저런 기이 나왔나 싶고. 애시당초 소나아를 잘못 만내서 저리 장호가 변했는가, 클 때는 안 그렇더마는." "그래서 딸하고는 함께 못 산다 안 카요. 복연이사 어디 보통 고모건데? 그러기 참말로 쉽잖은 일이구마." 아닌게아니라 그랬다. 둘째딸 복연이는 그새 친정을 많이 도와왔다. 구겨 넣었던 돈푼은 틈틈히 학교에 보태라 하며 부쳐왔고 인편이 있으면 밤을 새워 옷을 지어 보내왔다. 일 년에 한두 번은 내외가 다녀갔고 돌아갈 때는 조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라믄 나는 갈라요." 야무네가 일어섰다. "저문데 그라믄 가보소." 야무네가 떠난 뒤 귀남네는 무엇을 하는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거리에서 부는 바람보다 거센 바람이 성환할매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잠든 아이를 보면 볼수록 절로 한탄이 나왔으며 근심과 원망으로 가슴이 저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사정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지곤 하는 것이다. "명천의 하느님네, 부디 굽어살피시오. 인간이 미련하여 알게 모르게 죄를 짓지마는 꽃봉오리 겉은 저거한테 무신 죄가 있겄십니까. 벌을 받아야 한다믄 이 핼미가 받아야제요. 비나이다. 제발 무탈하게 넘어가게 하시이소. 영명한 하느님네. 이 늙은 것을 가련키 보시어 소원 들어주시이소." 빌다가 졸다가, 소스라치고 하면서 성환할매는 한밤을 앉아서 지샌다. 잠시 눈을 붙이는 사이, 어수선한 꿈을 꾸었고 새벽닭 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 남희는 말똥하게 눈을 뜨고 누워서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 일어났더나?" "야." "인자 좀 괜찮나?" "야." "남아." "야?" "니 도망온 기가?" 남희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랬노? 못 가라 캐서 도망온 기가?" "..." "그 숭악한 에미가 니한테 우짜더노? 우찌 했길래 니가 이 모양고." "엄마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제발 엄마 욕하지 말아요, 할무이." 남희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그라믄 그 왜놈이 니를 패더나?" "아니오. 그 사람은 맘씨가 좋아요. 지한테는 잘해주었소." "그렇다믄?" 남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물어도 말하지 않았다. '필시 무신 곡절이 있구나.' 성환할매는 한숨을 내쉬며 "남아." "야." "어디가 아프노." "..." "어디가 아파서 이리 콜콜이 여빘노 말이다." "아픈 데는... 없, 없어요." 하고는 할머니를 피하듯 돌아눕고 말았다. "무신 말이라도 해야, 답답해서 어디 살겄나. 아픈 데가 없는데 우찌 니 형상이 그렇노?" 남희는 아까처럼 아무리 물어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니 또 부산 갈 기가." "안 가요!" "니 에미가 데불로 와도 안 갈 기제?" "야." "하모, 그래야지. 가자 마라. 거기는 니 있을 곳이 못 된다. 할매는 니가 보고 접어서." 하는데 "할무이." 그런 말에는 관심 없다는 듯 남희는 불렀다. "와." "나 배고파요." "그래 그래, 미음 데파오께." 배고프다는 말이 반가워서 성환할매는 얼른 일어섰다. "미음말고 밥 먹고 싶어요." 밥 먹고 싶다는 것은 더욱 반가운 말이었다. "운냐 운냐, 할매가 밥 새키 해가지고 오께." 성환할매는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어둠을 헤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새 바람은 씻은 듯 멎었고 하늘에는 반달이 기우뚱 걸려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성환할매는 남포의 등피를 들어올려 성냥을 그어대놓고 등피를 씌운다. 부엌 안이 밝아왔다. 바가지를 들고 발소리를 죽이며 마루로 올라간 그는 항아리 속에서 쌀을 꺼낸다. 역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부엌으로 돌아와 쌀을 씻는다. 그는 귀남네가 깰까 봐서 겁이 났다. 밥을 안쳐놓고 장독에서 된장을 떠다 뚝배기에 풀어서 밥 위에 얹고 솥뚜껑을 닫은 뒤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당초에 머를 해믹일 기이 있어야 말이제, 찬거리를 구할라 캐도 날이 밝아야, 도방에서 묵기는 잘 묵었을 긴데 입에 맞일랑가." 부지깽이로 불을 헤쳐가며, 솔가지를 밀어넣어 가며 혼자 시부렁거린다. "성환이한테 알리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핵교는 우떡하고 왔는지 장서방한테 의논을 해봐야겄다." 밥이 끊었다. 디밀던 솔가지를 중단하고 부지깽이로 불을 헤집는다. "이 불에 갈치 한 토막이라도 있었이믄 굽을 긴데, 세상에 김치밖에 더 있다? 전에 입던 옷은 작아서 옷 입을 기고 입은 옷에 왔이니 옷도 해입히야겄고, 우선 벗어놓은 옷부터 빨아야겄다." 성환할매는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꾸부정한 모습으로 사발하나를 들고 장독으로 간다. 항아리 뚜껑을 열고 김치 한 포기를 꺼낸 뒤 뚜껑을 닫는다는 것이 손이 어줍어 뚜껑을 떨어뜨린다. 요란한 소리가 났으나 천만 다행으로 뚜껑은 깨지지 않았다. "누고!" 귀남네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누고!" "나, 나다." 성환할매는 풀이 죽어서 말했다. "거기서 머하요?" "남이가 배고프다고 캐서... 김치를 내다말고 그만 뚜껑이, 안 깨졌어이 다행이다." 성환할매는 항아리 뚜껑을 바로 놓으며 말했다. "지를 깨우지요. 신새벽에 무신 청승이요." 새벽 찬바람같이 목소리가 쌩 울려왔다. 귀남네가 방으로 되돌아가며 방문을 올곧잖게 닫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엌으로 되돌아온 성환할매는 김치를 썰어 보시기에 담아놓고 솥뚜껑을 열었다. 김이 서리는 솥에서 된장 뚝배기를 조심조심 꺼내어놓고 밥을 푸려 한다. "비키소. 지가 할 긴께요." 귀남네가 부엌에 나타나 성환할매 손에서 주걱을 뺏었다. "누가 하믄 우때서 그러노." "늙은 어매 부려묵었다는 말은 듣기 싫구마요." "곰뱅이 성해서 하는데 누가 머라 칼 기고." "배고프다고 당장 죽나? 그새를 못 참아서,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러노. 다른 아아들 겉으면 보리쌀 곱찧어서 밥 해낼 나이 아니요." "어디 가아가 지금 성하나." "엄니가 오냐오냐 함서 키워 안 그렇소. 어린양할 나이요? 그래 가지고 시집은 우떻게 보낼 긴고? 종이 줄줄이 있어서 시중을 들어주믄 모리까." "그만 해라. 남이는 어젯밤에 왔다. 그것도 찬비를 맞고." "들어가소. 좁은 정기에 제집아아 밥상 하나 차리는데 둘씩이나, 잔칫집도 아니겄고." 말 하나하나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성환할매는 잠자코 부엌에서 나와 방으로 들어간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남희가 눈을 치뜨고 성환할매를 올려다본다. "고모가 또 뭐라 해요?" "아니다. 밥은 다 됐고 고모가 상 차리 올 기다." "할무이." "와." "요새도 고모하고 싸워요?" "싸우기는, 사람 사는 기이 다 그렇지 뭐. 고모도 심장이 상할 기다." "왜요?" "고모부 집 나간 지가 언제고, 귀남이도 객지에서 고생을 한께." 밥상이 들어왔다. 김치 한 보시기 된장 뚝배기 하나, 그리고 된장에 묻어둔 콩잎이 한 접시, 남희는 군침을 삼키며 얼른 숟가락을 든다. "콩이파리,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다고." 중얼거리며 콩잎 하나를 밥 위에 얹어 먹는다. 남희를 내려다보고 서 있던 귀남네 "입맛 떨어지지 않는 거를 보니 죽지는 않겄구나. 남희 노래를 불러 귀가 따갑더마는 엄니도 걱정은 그만 하소."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방에 들어오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많이 타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밝자마자 귀남네는 쇠스랑과 새끼 뭉치를 들고 나무하러 간다면서 휭하니 집을 나갔다. 마루 끝에는 어젯밤 내다놓은 남희 젖은 옷이 그대로 있었다. 노인네에게 빨래는 힘든 일이다. 털스웨터와 사지 즈봉은 더군다나 힘든 빨래거리다. 성환할매는 부엌에서 물을 데워 남희 옷을 담그고 비누질을 해서 주무른다. 쉬었다가는 또 주무르고 "귀남네는 어디 가고 성환할매가 빨래를 합니까, 남희 옷인 갑네요." "시적 입을 기이 없어이, 가을 볕에 쉬이 마르지도 않을 기고." "가을 볕이라니요? 이자 겨울인데? 귀남네는 어디 갔십니까?" "나무하러 간다믄서, 간밤에 바람이 불어서 간 모앵이요." "우리 집 인호도 새벽에 밥해 묵고 산에 갔소. 한짐 긁어 온다고, 찬바람이 분께 양식도 양식이지마는 집집마다 땔감이 걱정이제. 남희는 좀 우떻소?" "밥도 많이 묵고 자는 거를 보고 나왔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답도 짧고 어딘지 회피하는 기색이다. "가지 말린 거를 무쳐봤더마는 묵을 만하길래 가지왔더마는, 반찬이 없지 싶어서, 그라믄 점심때나 주소." 야무네는 부엌 선반 위에 가져온 그릇을 놨다. "그는 그렇고 남희가 무신 말을 안 하든가요?" "하기는, 묵고 자고, 그런 말 할 새가 있어야제." "우떻게 해서 왔다는 말도 안 하고요?" "아직은, 지 에미 욕한다고 듣기 싫다하더마." 사실 그랬었지만 성환할매는 의도적으로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두 늙은이가 빨래 한 가지씩을 나누어 다 빨았을 때 해는 엄치 솟아올라 장독대의 항아리에 빛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해는 나는데 수울찮이 칩소." 두 늙은이는 귀남네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이불 속에 두 손을 찌른다. "빨래 한 가지 가지고 쩔쩔매니 이자 우리는 밥값도 못하요. 안 그렇소 성환할매." 야무네는 눈을 꿈벅거리며 슬프게 말했다. "밥산 노릇 못하는 거사 어디 어제그제 일이겄소? 간당간당, 외가닥 새끼줄에 매달리 있는 기지 우찌 살았다 할 수 있일 기든가... 죽어서 다시 사람으로 환생한다믄 나는 인병 안 드는 중이 되고 접소." "그것도 팔자에 있어야." "중 팔자로 태어나고 접다 그말이제. 하고많은 병 중에 인병겉이 질긴 기이 어디 또 있을라고." "하기야 그렇소. 골수에 백이서 떠나지 않는 기지요. 무신 인연으로 부모자식, 부부로 만내서... 잊었다 싶으믄 생각나고 산 이별, 죽은 이별, 요즈막에는 우리 야무 일이 풀린께로 죽은 푸건이 생각이 나요. 불쌍한 제집아." "생각나겄지요. 한이 어디 끝이 있겄소? 그래도 느지막에 호박덩이 하나 안았이니 그나마 얼매나 다행이요? 다 야무어매 심덕으로 영신이 돌보아주었일 기요." "야,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제요. 내 복에 얼매나 과한지, 이자는 세상만 안 이러믄 살 만한데, 인호가 우리 집에 온 거를 생각하믄 자다가도 꿈만 겉소. 우리 야무, 속절없이 몽다리 구신 되겄다 싶었는데." "하긴,누가 머라 캐도 야무어매는 우가네 욕 못하게 됐소." "야?" 하다가 야무네는 말뜻을 알아차리고 웃는다. "우가네 집구석에서 그 지랄을 안 했이믄 인호가 왔겄소?" "그건 그렇소." 성환할매는 그런저런 얘기를 하면서도 얼굴은 어두웠다. 이따금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고생꾼이 돼놔서 병든 가장을 하늘겉이 생각하고, 한시 반시 앉아 있는 법이 없고, 우리 야무도 나무하고 논 갈고 하지는 못해도 자자부레한 일은 한께." 야무네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남희가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그는 한번도 집밖에 나간 일이 없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가끔 마당에 나와 우두커니 서 있곤 했는데 그럴 때 누가 오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제 또래의 마을 동무들이 찾아와도 양무릎을 세우고 무릎에 턱을 얹은 채 말이 없었다. 성환할매가 무슨 말을 물어도 대답하는 것은 한정이 돼 있었다. 엄마는 아무 짓도 안 했고 욕하지 말라는 것, 엄마와 같이 사는 일본인은 마음씨가 좋고 잘해주었다는 말, 그것 이왼 그간에 있었던 일, 집에서 도망쳐 나온 경위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왕성한 식욕을 나타내어 과식을 하는가 하면 때론 온종일 굶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도 않았다. 뚜렷하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은 창백했고 날로 여위어갔다. "말만한 제집아가 방구석에 밤낮으로 저리 처자빠져 있이니, 삼시 세끼 밥 채려주랴, 양식이나 전같이 넉넉하단 말가, 내가 무슨 할 짓꼬." 귀남네는 불평하기 시작했고 성환할매는 말수가 적어져갔다. 마을에서는 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남희가 미쳐서 돌아왔다누마." "아니 그기이 아니고 연애질을 하다가 핵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러든데?" "어린기이 연애질을 해?" "열여섯 살이 머가 어리노. 시집갈 나이다." "에미가 데리가더마는 신세 망쳤구나." "그기이, 요릿집을 한다 카이 좋은 본을 봤겄나? 성환할매 골병이 들겄다." "와 아니라, 밤낮 길에 나앉아 행여 손녀가 올까 하고 기다리더마는, 성환할매도 액운이 많은 사램이다." 그런 얘기들은 모두 우가네 집에 모이는 여자들의 추측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말은 돌고 돌아서 어느덧 사실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핵교는 안 갈 기가?" 남몰래 가슴을 치다가 성환할매가 남희에게 물어보면 "안 가요." "와 안 갈라 카노." "그냥, 가기 싫어요." "장서방이 그러는데 부산 핵교에서 징명만 띠어오믄 진주 핵교에 전학할 수 있다 카든데." "..." "방학 때 오래비 오믄 진주 핵교에 전학하는 기이 우떻겄노?" 순간 남희의 낯빛이 달라졌다. 성환할매 입에서 오빠 말만 나오면 남희 얼굴빛은 언제나 달라졌던 것이다. 달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으나 성환할매는 속수무책이었다. "성환할매 기십니까?" 남희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성환할매는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장서방." 성환할매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낡은 회색 두루마기에 색바랜 갈색 모자를 쓴 연학은 제법 큰 꾸러미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언제 왔노? 지금 오는 길이가." "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혹과 근심에 시달리던 성환할매는 반가워서 어쩔줄 몰라했다. 남희가 돌아온 다음날 의논을 하려고 최참판댁의 연학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연학은 여수에 볼일이 있어 갔다와야 한다면서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잘 됐십니다. 핵교는 전학 수속해서 진주로 옮기믄 될 기고." "그기이 아니고, 아아 몸이 말이 아니다, 그것도 도망을 쳐서 온 모앵인데 통 말을 안 한께... 내지구지를 알아야, 무신 영문인지 도모지 알 수가 없다."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연학은 "여수 갔다와서 얘기합시다." 해서 성환할매는 연학이 돌아오는 것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귀남네도 급히 부엌에서 달려나오며 인사를 했다. "귀남어무니." "예." "이거 큰집 어장에서 가지왔는데 서너 마리 내놨다가 성환이할무이 해드리이소. 생선이요." 하며 연학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냥 가지가시이소. 귀한 거를 우리꺼지." 귀남네가 사양을 하니까 "아니요. 많은께 서너 마리 내놔도 우리들 실컷 묵을 깁니다." "고, 고맙십니다." 귀남네는 말할 수 없이 공손했다. 어떤 면에서는 귀남의 장래가 연학에게 달려 있다 할 수 있었고 귀남네는 그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연학이라면 기는 시늉라도 할밖에 없었다. 만일 귀남이가 집에 있었다면 벌써 옛날에 징용으로 뽑혀 나갔을 것이다. 마을에서는 눈 닦고 보아도 젊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까. 게다가 귀남이가 아파서 연학이 데리고 왔을 그때 울고불고 모친을 원망하여 한소동을 피운 일을 생각하면 혹 연학에게 밉뵈지는 않았을까, 그게 늘 마음에 걸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사실 모친에 대한 불만, 조카들에게 대한 시기심 같은 것을 억제하는 것도 연학의 존재를 의식한 때문이다. 연학이 평사리에 온 후로는 거의 모친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치분데 방에 들어가시이소." 귀남네가 권했고 성환할매도 "어서 방에 들어오니라." 하고 말했다. 연학은 모자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남희는 고개를 숙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남아, 인사 안 하고 머하노." 성환할매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인사 대신 "아제씨." 하고 남희는 고개를 들고 연학을 쳐다본다. 여느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깊은 신뢰를 나타낸 눈동자였다. "오냐, 걱정할 것 없다." 연학은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자리에 앉는다. 어렸을 때부터 아비인 석이를 대신하여, 남희는 아비 얼굴도 모르지만 하여간, 연학은 어린 오누이와 성환할매를 돌보아왔다. 특히 두 아이의 취학 문제는 적극적으로 최참판댁에 건의하여 일을 추진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석이 만주로 건너가서 심상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러려니와 아비의 원수,조준구 신변을 맴돌며 최참판댁 재산을 회수하 는 데 공노인과 더불어 석이는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성환할매와 최참판댁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온 장연학, 나룻배를 타고 어린 계집아이의 손을 잡고 보통학교 압학할 때 읍내로 데려갔던 사람도 장연학이었다. 신발이며 옷가지, 학용품, 사탕 같은 것을 사오던 사람도 장연학이었다. 아이들은 진작부터 장연학을 믿었고 보호자라 생각해왔다. '이거 예삿일 아니구나.' 연학은 몰라보게 변한 남희를 보는 순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우선에 몸부터 추슬러야겠고나." "아저씨." "오냐, 아무 걱정 마라." "..." "공부를 하더라 캐도 몸이 나아야, 많이 쇠약해졌다." "나 공부 안 할 깁니다." "그거는 건강해진 뒤 생각해도 늦잖은 일이고 하여간에 병원에 가보는 일이 첫째다." 남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필우곡절 무신 사단이 있긴 있는 모앵이다.' 연학은 남희 얼굴로부터 눈을 돌리며 신중한 어조로 "남아." 하고 불렀다. "..." "아부지맨치로 생각하제?" 남희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믄 됐다." 순간 연학을 쳐다보는 남희 얼굴에 뭔지 모를 절실한 것이 지나갔다. "핵교를 안 가겄다 하는 거를 보이 아무래도 핵교에서 무신 일이 있었지 싶은데 도모지 말을 해야 알제." 성환할매는 학교 쪽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눈치였다. 남희는 어미에게 아무 잘못 없다고 말했다. 어미와 함께 사는 일본인도 착하며 잘해주었다는 것이다. 한다면, 집 쪽에서 달리 원인을 찾는다는 것이 성환할매는 두려운 것이다. 집은 바로 요릿집이었기 때문이다. "말이야 차차 지 맘 내킬 때 하겄지마는 지가 걱정하는 것은 핵교를 그만두는 일보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도 큰일이기는 하지마는 시국이 시국인 만치 정신대에 뽑혀가지 않을까 그기이 걱정입니다." 정신대라 했을 때 남희는 강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어쩌면 그는 정신대 내막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대라 카믄 여자 보국대 말가." "예, 수울찮이 처녀 아이들이 뽑혀 나간 모앵인데, 이 동네서도 더러 나갔을 걸요?" "하모, 웃담에 사는 길수 딸이 나갔고 성냥간 하다 온 그집 손녀도 나갔고, 전에는 모집이라 캄서 선금 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는데 갔다한 연에는 편지 한 장 없단다. 세상에, 그런 생이별이 어디 하나둘까." "남희가 핵교에 다니고만 있다믄 나중 일이야 우찌 되든 우선은 괜찮을 긴데 걱정이구마요." "그렇다믄 우떻게 하든지 핵교에 보내야제. 시집을 보내든지." "젊은놈들이 있어야 시집도 보내지요. 우가놈, 그놈들 식구가 우환이요. 손바닥의 손금 딜디다보듯 동네 일을 환하게 알고 있이니." "그러게 말이다. 처녀 아이들 모집 때도 그놈이 권해서 나간 거 아니가." "개동이 그놈이 동네를 쑥밭으로 맨들었소. 이러다가는 젊은놈 뿐이겄소? 늙은 사람들도 끌고갈 판이요." "무섭은 세상이다." 이때 귀남네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 구석에 앉은 귀남네는 "오신 김에 좀 물어볼라꼬요." 어렵게 말했다. "무슨 일 말심입니까." "우리 귀남이는 우찌 되겄십니까." "..." "가아도 보국대에 나가까요?" "나이가 아직은 좀 어린께." "우리 동네에서는 그 또래 머슴아들도 뽑히 나갔십니다." "진주는 넓어서 여기 맨치로 싹 훑어가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정세 따라서, 안 갈 거라 장담할 수는 없지요. 나이가 아직 어린께 그냥저냥 삐대보지마는." "그라믄 앞으로 우찌 했이믄 좋겄십니까." 울음 섞인 말로 귀남네는 물었다. 연학은 대답을 못한다. "가기만 하믄 못 돌아온다 카든데 우짜믄 좋겄십니까. 그거 하나 믿고 오늘까지 사, 살아왔는데." 치마자락을 걷어 눈물을 닦는다. "도리없지요." "장서방, 그라지 말고 우리 귀남이 보국대 안 가게..." 성환할매도 거들어서 말했다. 장서방은 쓴웃음을 띤다. "돈 있는 사람, 세도 있는 사람들도 이자는 우짤 수 없게, 그만큼 다급해졌십니다. 지가 무신 심이 있어서, 가든지 숨든지 양단 간에 하나를 택해야지요. 위험하기로는 마찬가지겠으나." "숨는다 카든." 귀남네는 필사적으로 연학을 쳐다본다. "만사람이 다 격는 일인께, 전쟁이 끝나는 거를 리다릴밖에 없고, 귀남이 일은 앞으로 궁리를 좀 해봐야겄소." 그 말에 귀남네 얼굴이 다소 펴진다. "우짜든지 간에 장주사만 믿겄십니다." 주사라는 칭호가 어색했으나 귀남네는 그것이 대단한 존칭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연학은 "내일 하루 더 쉬었다가 모래는 진주로 가자. 여기는 좋잖은께." 남희를 보고 말했고, "성환할무이도 그렇게 알고 기시이소." 진주 보낼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말했다. "알았네." 성환할매는 한숨 쉬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학이 말한 대로 하루를 더 쉬고 다음날 남희는 연학을 따라 나섰다. 빨아서 손질을 한, 부산서 입고 왔던 스웨터와 즈봉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기운 것이기는 하나 깨끗하게 빨아놨던 성환의 양말을 신고 성환할매가 준비한 옷가지가 든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나루터까지 따라나온 성환할매는 품속에서 손수건에 싼 것을 꺼내었다. "이거." 하며 죄지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다. "멉니까?" "미안하다. 그새 모아놓은 긴데 얼매 안 된다." "허허 참, 그러지 마이소." 연학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일할라 카믄 돈이 들 기고, 벵원비도, 첫째는 식량을 우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요량도 없이 지가 남희를 데리가겄십니까. 애당초부터 아아 둘은 최참판댁에서 책임을 졌으니께 실데없는 걱정 마이소." "그기이 어디 한 해 두 해가,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제." 그러나 연학은 손수건에 싼 돈을 끝끝내 받지 않았다. 나룻배가 떠나려 할 때 "할무이!" 처음으로 남희는 울부 짓었다. 성환할매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하며 서 있었다. 그리고 배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성환할매는 서 있다가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는다. "남아, 내 새끼야. 개똥밭의 개똥맨크로 아무렇게나 굴러도 명만 길어라. 하모, 명만 길어라, 니 애비 만나봐야 할 거 아니가." "막 나갔다 캐서 달리왔더마는 벌써 떠나부맀네. 아이고 숨차라." 야무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할라꼬 나왔소." 돌아보며 성환할매가 말했다. 그 말 대답은 없이 "바람도 없고 날씨가 좋소." 햇볕이 따스했다. 두 늙은이는 모래밭에 엉덩이를 붙이고 강물을 바라본다. "이자 한시름 놨소." "그러기." 했으나 성환할매는 말할 수 없이 불안했다. 할무이, 하며 울부짓는 남희 모습이 눈앞에 밟혀 견딜 수가 없었다. "성환할매, 우리 집에 가입시다." "머하로요." "집에 가서 할 일 있소? 보나마나 왼종일 보속겉이 앉아서 남희 생각만 할 긴데." "..." "안 그렇소? 우리 집에 가서 인호보고 따신 점심 해돌라 캐서 묵읍시다." "며누리로 봐놓고 언제꺼지 인호 인호 할 기요?" "입버릇이 돼놔서 안 그렇소. 아이라도 있이믄 어멈이라 하겄지마는." "거물장으로 아아 하나 있었이믄 싶제요?" "말하나마나, 인력으로 되는 일이겄소? 그기이 또 어디 쉬운 일 이겄소?" 두 늙은이는 둑 길을 지나고 논둑길을 질러서 새로 꾸민 가정, 야무 집으로 간다. "어서 오시이소 성환할무이." 인호가 나와서 상냥스럽게 말했다. 친정에 있을 때는 항상 사람을 피하듯 들판에 나가 일만 하던 인호, 찌들었고 웃음기라고는 없었던 얼굴이 제법 토실토실하고 보기가 좋앗다. 옷매무시도 단정했다. 누군가를 섬기면서 산다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일까.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며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오십니까."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았던 야무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건강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음산하고 산송장만 같았던 분위기는 없어졌고 얼굴은 맑게 개어 있었으며 눈동자는 또렸했다. 처음, 임호를 야무지게 보내는 것을 몹시 꺼리던 영호네도 얼굴이 피는 딸을 보고 매우 흐뭇해한다. 동생 딱쇠가 반농사는 지어주건만 영호네는 한복이더러 논도 갈아주라 거름도 좀 내어주라 하며 잔소리를 하게 되었고 사위 몸보신하라면서 이것저것 보내주기도 했다. 첫 결혼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친정에 와서는 군식구로 미안한 세월을 보냈으며 우가네 집 식구들에게 시달려야 했던 인호의 세월. 얼마나 살지, 끝내 완전하게 회복이 안 될지 알 수 없는 야무 처지였으나, 인호에게는 봄이 온 것이다. 그것은 ,야무가 어질고 착했기 때문이며 시어머니가 존중했고, 그러나 무엇보다 인호 생활에 활기를 준 것은 독자적으로 산다는 그모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가 확실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집안 되겄다. 야무지게 해놓고 집안에 앵이가 돈다." 올 때마다 성환할매가 하는 말이었다. 앵이가 돈다는 것은 아마 너무나 깨끗하여 날벌레들이 앉지 못하고 날아만 다닌다는 뜻인모양이다. "다 사돈댁 덕이제요. 저승에 가서 갚을라 카믄 한이 없일 기요." "사람이 까꾸막길을 오르다가도 쉬어갈 곳은 있다 하다마는... 하모, 고생 많이 했인께 이자는 쉴 때도 됐다. 남 보기에도 얼매나 좋노. 야무야." "예." "니한테 늦복이 터졌구나. 오래 살아래이." 야무는 스스럼없게 웃었고 인호는 점심 준비를 하기 위해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간다. 한편 장연학이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해거름이었다. 쓸어놓은 듯 거리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더러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림자처럼, 어항 속의 붕어가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활기가 없었다 먹는 데서 인심 나더라고 밥 한술, 술 한잔 나누어 먹을 것이 없게된 세상,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의지할 남정네 없는 젊은 아낙들 아이들, 이슬같이 서글픈 명줄이나마 잇기 위해 식량 배급에만 매달려 있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원시 세계로 돌아간 듯 일체를 생략하고 살았으며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례하는 것이 예사요, 장례식인들 무슨 수로 조문객 대접을 하겠는가. 징용 나가는 아들 남편을 위해 주먹밥이라도 몇 개 뭉치고 나면 식구들 죽그릇에서 푸성귀만 돌아야 했다. 극도로 이기적인가 하면 극도로 외로워하고 거리 에서 직장에서 혹은 집 마당에서 기둥 뽑아가듯 젊은이들을 잡아 가지만 그것도 거의 일상화 되어 울음 소리 한숨 소리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농촌보다 도시의 식량 사정이 한층 각박했다. 돈푼 있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암거래를 통해 식량을 구할 수 있었을 뿐, 옷가지며 양은솥 따위 생활필수품을 들고 시골에 가서 양식을 구해오던 사람들도 이제는 바닥이 날 때가 된 것이다. 배급이라고 그냥 주던가. 배급을 받아 절반은 팔아서 다음 배급 탈 돈을 마련해놓고 배급의 절반으로 연명하는 기막힌 처지도 있었고 생산량이 날로 줄어만 가는 양조장의 술찌꺼기, 두부공장의 비지조차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식량 배급소의 우세는 대단했으며 배급계 관리들은 살림이 윤택하여 태평성세였다. 죽 한 그릇에 급급하니 내일 닥칠지 모를 불행은 일단 접어두고, 그래서 거리는 조용하고 쓸쓸해 뵈는 것이다. 남희를 데리고 연학은 곧장 영팔노인 집으로 갔다. 시내에는 천일의 넓은 집이 있었고 판술이가 맡아서 영업을 하는 연학 소유의 여관도 있었다. 그러니까 평사리에 가서 병을 고치고 돌아와 다시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남희 고종오빠 귀남이도 있는 여관이지만 영팔노인 집이 적합할 것 같아서 그곳을 찾은 것이다. "야아가 누고?" 판술네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남희 아닙니까. 모리겄십니까?" "아이고! 세상에, 남희가 이리 컸나? 몰라보겄다." 영팔노인도 곰방대를 물고 내다보며 "머라? 남희라꼬?" 하며 놀란다. 판술이댁네도 "어매가 데꼬 갔다 카더마는 이자 다 큰 처니가 됐네." 하고 말했다. "하야간에 어서 방에 들어가자." 판술네가 남희 등을 밀었다. 그리고 판술네는 며느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며 "저녁은 우찌 됐노." "죽 끓일라 카는데요." "아니다. 밥 해라." 일러놓고 방으로 들어온 판술네는 남희를 살펴보면서 "우째 아이가 키만 멀쑥 커가지고 그리 예빘노?" 하자 그 말을 받아서 영팔노인은 "독한 년 밥을 얻어묵으이 무신 살이 갈꼬." 하며 말을 내뱉었다. "남아, 인사해라. 니 할무이 할아부지 진배없는 분들이다." 남희는 영팔노인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잠자코 고개만 숙인다. "앉거라. 그래 우짠 걸음이고? 석이어무이는 편키 기시나?" 연학에게 묻는다. "예. 그냥저냥 보내고 기시지요." "그 숭악한 제집, 그래 가잔다고 도척이 겉은 그 제집을 에미라꼬 따라가아? 아무리 철이 없기로." 영팔노인은 울분이 치미는 듯 남희에게 올곧잖게 말했다. "옛날부터 그 제집 얘기만 나오믄 자다가도 일어나 방바닥을 친다 카이." 판술네는 웃었다. "무신 소리 하노? 임자는 안 그랬나? 그 제집이 우째 벼락도 안 맞고 이적꺼지 사는지 모르겄다. 전사를 생각하믄, 세상에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 남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희 니를 보이 생각이 난다. 아아 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을 친정에다 처박아놓고, 사니 못 사니 할 직에 니 할무이가 니를 찾아서 벵원에 데리고 안 갔더나. 가보이 종기가 나서 그거를 째는데 고름이 한 종지나 나왔다 카더라. 니 할무이겉이 어진 사램도 이를 갈더마. 그때 니를 벵원에 안 데리고 갔이믄 죽었일 기다. 정말 그럴 수가 없제. 그래놓고 무신 염치로 다 큰 니를 찾아갔노 말이다." 아무 말이 없었던 남희는 무릎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기는 다 지나간 일이제. 그러니 니 할무이 가슴속에는 한이 첩첩이 쌓ㅇ이 있일 기다. 천근 겉은 자식을 눈앞에 못 보고 어린 남매를 키우니라...할무이 공을 잊이믄 안 될 기다. 어디서든 니 아부지만 돌아오믄 옛말하고 살 긴데." 판술네 역시 어미를 따라간 남희 행위를 섭섭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우찌된 일고?" 연학에게 시선을 옮기며 판술네는 물었다. "예, 무신 사정인지 아직은 모리겄십니다마는, 부산서 남희가 도망을 쳐서 온 모앵이라요." "하모, 그러사 잘한 일이제. 말을 들으이 술집인가 요릿집인가 한다 카든데 커가는 제집아이, 있일 곳이가? 좋은 뽄은 보기 어럽아도 나쁜 뽄은 보기 쉽더라고, 그라고, 그 에미 밑에서 어디 혼인길이나 열리겄나?" 일본 남자하고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러고 왔이니 핵교 문제도 있고, 몸이 성찮은 것 겉애서 병원에 데리고 가볼라꼬요." "보기에도 어디가 좀 아픈 아이 겉다. 벵을 키우믄 안 되세. 귀남이도 서둘렀인께 그 정도로 하고 말았지." 영팔노인의 말이었다. "게다가 요새 평사리가 요상하게 돼 있어서, 정신대다 머다 함서 처녀애들 공출해 가는 시절 아닙니까. 우가네 개동이놈 또 무신 술책을 쓸지 그것도 걱정이 돼서요."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이 감정 있는 집을 골라감서 징용에 뽑아 갔다믄서?" "이자는 감정이고 머고, 마구잡입니다." "하기사 진주도 그렇다. 우리 승구도 산판에 보내기를 잘했제." 승구란 영팔노인의 큰손자다. 그는 산판 따라 다니면서 감독일을 하고 있었다. 손자며느리는 남편 겨울옷을 장만하여 어제 아이를 업고 떠났으며 손녀딸은 국민학교를 나오자마자 두만어매 중매로 독골로 시집보냈고 막내손자가 지금 국민학교 오학년이었다. "그라믄 남이가 진주에 오래 있을갑네?" "예. 사정 봐서...여관에 두기도 그렇고, 양식은 지가 주선하겄십니다. 여기밖에 믿을 곳이 없어이 당분간만 맡아주시리라고 왔십니다." "말이라고 하나? 죽이든 밥이든 우리 집에 안 있고 어디 갈 기고." 했으나 식량은 주선하겠다 하는 말에 판술네는 안도의 빛을 나타 내었다. "아이들이 쓰든 빈방도 있고 니 할무이도 우리 집에 있다 카믄 맘을 놓을 기다." 하자 영팔노인이 큰 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세상 야박하지. 이래가아 어디 살겄나? 여관에 오는 손님도 쌀을 가지고 온다 카이. 석이어매 우리 사이가 그런 기이 아닌데, 허허어. 하지마는 장서방. 무리할 것 없다. 우리도 독골에 가든 얼마간 양식은 구해올 수 있인께." "무리할 기이 머 있십니까. 최참판댁에서 다 요량하실 겁니다." "아무리 부자라 캐도 하루 이틀이제. 성환이도 그 집 신세를 지고 있고 또 길상이가 그리 됐이니 머가 속 편할꼬? 생각을 해보믄 만사가 일장춘몽이다. 만주 있일 적의 일을 생각하믄, 그런 일이 있나 싶기도 하고." "문자 쓰는 거를 보이께 또 시작하는구마요." 마누라 핀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서 되놈 땅 얻어서 농사도 지어봤고 광산에 가서 일도 해봤고 벌목하러 댕기도 봤다마는, 천리타향 타국인데, 그래도 인심이 안 그랬제. 오늘 겉은 세상이 어디 있겄노." 영팔노인은 식량 문제 때문에 안도하는 듯안 마누라 표정이 얄밉기도 했고 공연히 연학한테 미안한 생각도 드는 것 같았다. 그것을 빤히 알고 있는 판술네는 삼대 구년 묵은 얘기 또 하누마, 세상 인심 변한 것이 어디 우리 뿐이요? 하기사 머 방구들만 지키고 있이니 고릿적 일밖에 생각할밖이 없일 기요마는 귀에 못이 박히겄소." 떠듬떠듬 매끄럽지 않게 응수한다. 젊은놈들 다 앞세우고, 구신맨크로 저눔의 할망구, 죽지 않으믄 할 길이 없겄다." 죽으믄 면할 성싶소? 저승길에 따라올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녁 나기요. 하시기부시기, 실이 노이 되도록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독거를 누가 들어줄 기라고, 아이구 참말이제 엉글나요." 티격태격하는데 저녁상이 들어왔다. 판술이댁네는 정성껏 밥상을 차린 것 같았다. 어쨌거나 장연학은 그들에게 있어 물주나 다름 없었으니까. 저녁을 먹고 연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남희가 불렀다. 나는 어떻게 하느냐 묻는 표정이다. "내일 아침에 올 기니께 니는 여기 있어라." 해놓고 "야아 심정이 지금 편치 않을 깁니다. 혼자 있게 방 하나 치야주이소." 하고 판슬네한테 부탁한다. "그란해도 빈방에 불 지피고 이부자리도 옮길 생각이다. 걱정 말고 가서 일 보아라." 영팔노인 집에서 나온 연학은 본성동의 서희를 찾아갔다. 서희는 전등 밑에서 수를 놓고 있다가 수틀을 한 곁으로 말어놨다. "그간 안녕하싰습니까." 연학은 모자를 벗어놓고 꿇어앉아서 정중하게 절을 했다. "오래간만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희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뇌의 빛을 감추지는 못했다. 오십을 갓 넘긴 나이, 아직도 그는 아름다웠으나 몹시 수척했다. 십여 년 동안 놓았던 수틀을 다시 매어놓고 수를 시작한 것만 해도 허약해진 자기 자신을 추슬러보러는 그이 심중의 일단을 넘볼 수 있었다. 벌써 삼 년이 넘어가려 하는 길상의 감옥살이, 어찌면 서희가 길상보다 먼저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전관 같지 않았다. 전에는 정해진 형기가 있어서 출옥할 그날을 기다리는 희망이나마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약이 없다. 예측조차 할 수 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그러나 그 전쟁이 어떤 상태로 끝이 날 것인지 확신은 불가능했다. 과연 죄수들. 특히 사상범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최악의 경우를 상상 할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 일에 대하여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정국은 물론 바라는 바요 희망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초토 작전으로 나올 때 어느 누가 살아남으리. 남희는 두 아들을 위해서 근심했다. 옥쇄 라는 말을 들을 때다 서희는 환국이와 윤국이, 특히 윤국이에 대하여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한 근심 걱정 속에서 큰 타격을 준 것은 양현이었다. 연학도 서희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양현이가 서희에게 얼마나 깊은 타격을 주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요즘 평사리는 조용한가요?" 우울하게 서희는 물었다. "조용할 리가 있겄십니까." "우가네 행패가 여전한 모양이군." "태생인데 그게 고치지겄십니까. 악종은 따로 있는 모앵입니다." "도솔암에는 가보셨소?" "예." "임교장께서는 그대로 계시구요?" "예, 서울서 가족이 다녀간 후 몸이 좀 안 좋았는데 지금은 회복 되었다 하더마요." "장서방은 무슨 각별한 일이 있어 오신 거요?" "아닙니다." "..." "안만 산에 가보니께 여러 가니로 생각하지 않으믄..." "...?" "여기 오기 전에, 잠시 여수에도 갔다왔십니다마는 사방이 꽉 막혀서...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예. 그러니께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지리산 한 곳뿐이 이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십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서희는 차갑게 말했다. "지 혼자의 생각은 아니옵고." "해도 사라는 돌팔이 생각이기도 하다 그 말이요?" "머, 딱히 그 사람의 말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그렇다는 말들이었십니다." 무슨 심산이 있어서 장연학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그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서희는 느끼고 있었지만 흥미가 없다기보다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회피하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기싰더라믄 무신 생각을 하싰을지, 우떻게 하싰을지...그것도 깊이 생각해보았십니다." "나더러 또, 골치이픈 일에 관여하라 그 말이오?" 역시 차갑게 되물었다. 그러나 장연학은 안개를 잡듯 명확한 말은 놔두고 "어차피 예측할 수 없게끔 만사가 돌아가고, 그렇다믄 그중 한가지는 해놔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또 전혀 건덕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의논을 해보는 기이 좋겄다 싶어서 말입니다." "도대체 예측할 수 없는 일이란 무엇이며 건덕지가 있다는 얘기는 무슨 뜻이요. 알기 쉽게 말하시오." 서희는 짜증을 냈다. 그러나 연학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알기 쉽게 하자믄 군량미를 비축하는 일입니다." "산에다가요?" "예." "싸움하자는 것은 아닐 테고." "예." 건덕지란 조직을 두고 한 말인 것을 서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연학은 더 이상 설명을 아니 했고 서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능변가가 아닌 연학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시시콜콜 설명을 듣고 있을 서희도 아니었다. 긴 세월 이들 사이에 형성된 이심전심이라고나 할까, 화두만 던져놓으면 가부간 서희는 문제에 대하여 심사 숙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사실 서희는 이미 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두 아들을 위하여. 연학은 끝내 남희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고 일어섰다. 잊은 것은 아니었고 자기 혼자 처리해도 되는 일로 생각한 것 갔았다. "번갈아가며 어찌된 일입니까?" 전에는 귀남이를 데리고 병원에 왔었는데 그 부렵의 귀남이 또래로 뵈는 남희와 함께 진찰실로 들어서는 연학을 향해 허정윤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 됐구마. 웨낙이 오지랖이 넓다보이...어디가 우찌 아픈지 좀 자세하게 보아주었이믄 좋겄네." 여자 아이여서 옷 벗는 것을 보기가 민망하였던지 그라믄 나는 밖에 나가서 기다릴 기니께." 하며 연학은 밖으로 나온다. 대합실 걸상에 앉은 연학은 무료하여 밖을 내다본다. 여전히 거리는 쓸쓸해 보였다. 가을이 지난 이맘쯤이면 진주는 꽤 활기가 넘치는 고장이었다. 추수를 끝낸 근동의 지주들이 느긋하게 돈을 쓰기 위하여 모여드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물건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던 시절이 언제였던지, 혼수 장만에 토목점이 왁자지껄하던 때가 그 언제였던지, 은은한 지분 냄새 풍기며 날아갈 듯 맵시를 뽐내던 명기들의 소식이 감감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너그럽고 규모가 널찍널찍했던 도시는 시어머니 눈살에 오그라든 며느리같이. 거리에는 낙엽만 구르고있었다. "양현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연학은 문득 양현이 생각을 한다. 병원에 왔기 때문에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팔자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줄곧 성장기를 지켜보아 온 연학은 양현에 대하여 애틋한 부성애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냉철하고 곱돌같이 단단하며 야무진 연학에게도 젊은 시절. 그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기생 기화(봉순)는 연상의 여인이며 연학이 그를 만났을 때 아편으로 망가진 인생이었다. 석이가 기화를 사랑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티끌만큼도 욕심내지 않았고 크게 번민하지도 않았으나 그리움은 있었고 그는 그 그리움을 자기 자신에게도 속이려 했다. 하여간 그런 감정을 가져본 것은 기화에 대한 것이 유일이다. 양현에 대하여 부성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윤국이는 잘 있을까?' 평사리에서 괴로워하는 윤국을 지켜보았던 연학은 그때 무뚝뚝하게 모른 체 대하기는 했으나 딱했다. 마음 잘못 먹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다 기울지도 모자라지도 않건만 어찌그리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연학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늙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해도사 말이 옳다.' 생각은 산으로 건너갔다. 이범준의 사촌동생 이범호에게 연학도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칙적인 문제에는 동의를 했고 어젯밤 서희에게 운을 뗐던 것이다. 얼마가 될지 누가 될지 그것은 지금 막연하지만, 또 절대적으로 안정하다 할 수 없지만 박살이 난다고 생각할 때 조그마한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움직여보는 것이 나쁠 것은 없었다. 군량미 비축 운운 했을 때 서희는 대뜸 산에다가? 하며 되물었고, 싸움하자는 것도 아닐 테고 하며 되뇌었던 것이다. 해도사나 자신도 싸움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피신만을 당장의 목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큰 배가 가라앉는다면 목적지에 닿고 안 닿고는 생각할 것 없이 보트하나 장만하자, 그런 셈인데, 연학은 가끔 해도사를 황당하게 느끼듯 순간 그러한 계획이 황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해서 그는 굳이 우기기보다 그 정도의 운을 떼어놓고 자연에 맡겨버릴 심산이었다. 그 자연은 서희의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학의 생각은 또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경거망동하지 않게 꽉 눌러놔야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범호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보는 연학의 모습은 반 조는 것 같았고 색바랜 모자같이 낡고 기진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해도사보다 연학이 쪽이 둔갑술에는 능했는지 모른다. 산전수전 다 겪었으며 항상 사건의 전방에서 박쥐처럼 밀착해 살아왔고 뒷설거지는 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그가 해왔으니. "아저씨." "어." 눈을 들었다. 남희가 서 있었다. "진찰 다 받았나?" "예." "의사 선생님이 머라 카시더노." "아무 말 안 해요." "그래? 그라믄 니는 여기 앉아 있거라. 내가 물어보고 올 긴께." "예." 남희는 슬며시 걸상에 걸터앉았다. 연학이 진찰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허정윤은 펜대를 책상 위에 뉘었다 세웠다 하며 창밖에 는을 던지고 있었다. 연학이 들어온 것도 모르듯, 굉장히 우울한 표정이었다. "무신 병고?" 정윤은 창밖에 눈을 던진 채 대답이 없었다. '이거 큰 병인갑다.' 연학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멍청하게 선 채 기다린다. 여느때보다 진찰실 안이 푸르게 느껴진다. 정윤의 흰 가운이 더욱더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근처에 있는 여학교 운동장에서 목검을 하는지 나기나타의 연습 시간인지 기합 소리가 들려온다. 한참만에 "도대체 아저씨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입니까?" 왠지 모르게 정윤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음 그런께." 막상 그렇게 묻고 보니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학생인 모양이던데요? "여학교에 다니누마. 여기말고 부산서 다닜는데...하야간에 고생하는 사람의 딸네미다. 우리가 돌보아주지 않으믄 안 되는 형편이고." 고생하는 사람이라는 말뜻을 정윤은 단박 알아버린 눈치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약을 지어서 일단 가십시오. 주사는 놨습니다." "...?" "저녁에 지가 술 한잔 사지요. 종용한 밀주집이 한 군데 있어요." "술이야 머 내가 사도 되는데." "그때 얘기합시다." 여간해서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연학의 낯빛이 싹 달라진다. "그, 그러지." 연학은 남희를 데리고 나왔다. 영팔노인 집에 가는 동안 남희는 말이 없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연학이도 아무 말 묻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다 카더노." 집에 들아사자마자 멍석에 무말랭이를 펴 널고 있던 판술네가 물었다. "아 네, 심장이 좀 안 좋다 카더마요." 덮어놓고 주워섬긴다. "아이구 얄궂어라. 귀남이도 그 벵이라 안 캤나? 사촌간인데 그것도 내림인가?" "그러씨요..." 신장과 심장을 구별 못하고 말하는 판술네나 어정쩡하게 말을 메우다 보니 연학이 역시 그것을 구별 못하기로는 마찬가지다. "얼굴에 붓기도 없고 삐짝 말랐는데, 와 같은 벵이고?" 판술네는 남희를 쳐다본다. "그란믄 아무래도 벵을 치로하는 데 오래 걸리겄제?" "아직은 소상한 말은 못 들었십니다. 아무래도 시일이야 안 걸리겄십니까." "시일이 걸리더라 캐도 낫는 벵인가 마 괜찮다."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는 남희를 곁눈질해 본 연학은 "남아, 니는 방에 들어가서 좀 쉬어라. 맘을 편하게 하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희는 인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아저씨는 안 기십니까?" "아니다. 방에 누워 있다. 멋에 틀어짔는데 밤새 콩당거리쌓더마는, 옛날 겉지가 않다. 하루하루가 다르네. 갈 날이 얼매 안 남았는가." 판술이댁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여관에 일 거들어주려고 간 모양이었다. 집안은 휑뎅그렁, 을씨년스러웠다. 원래 대가족이 살던 집이라, 아래 위채 방은 많은 초가였으나 많이 낡았고 손질이 잘돼있지 않았다. 아들 두 명은 그에 따른 식구들을 데리고 분가해 나간 지 오래되었고 판술이는 여관 일을 맡아 하면서부터 거의 그곳에서 기거했으며 바늘 가는 데 실 가더라고 판술이댁네도 낮에는 대개 그곳에 가 있었다. 요즘에는 주로 손주며느리가 살림을 관장하고 있었지만 그마저 젖먹이를 업고 산에 남편을 찾아가고 없으니 집안이 휑뎅그렁할밖에. "승구가 일하는 산판에는 사램이 얼매나 된다 카든가요?" 별안간 연학은 엉뚱한 것을 물었다. "머라꼬?" "산판에서 일하는 사람 말입니다. 일꾼이 얼매나 되는고요?" "그거는 모리겄다마는, 말은 안 한께." "..." "일꾼들 나이는 모두 지긋하다 하더마. 젊은 사람들은 별로 없고." "그 산판이 어디다 카든가요." "지리산이라 카든지." "손주며느리가 갔다믄서요?" "음, 가아는 산중꺼지는 안 가고 산맡 마을에서 기다린다 카더마. 산밑에서 기별을 하믄 내리온다 카고." "아저씨도 만주 기실 적에 벌목일을 하싰다 카든데." "와 아니라, 했제. 죽은 홍이아배하고. 주갑이라고 있었네라. 전라도서 온 사램인데 명창이었다. 옛날 서금돌이 평사리 근동에서는 소리꾼으로 명이 났지마는 주갑이 그 사람한테는 댈 것도 아니제. 사람 좋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그래 세 사람이 한당이 돼가지고 함께 벌목을 했네라. 어젯저녁에도 뜬금없이 영감쟁이가 주갑이 그 사람을 들먹이더마." "..." "그때 일을 생각하믄 참말이제 눈물난다. 월선이도 그때 죽었고, 홍이가 산중까지 아배를 찾아갔던 일 하며...그일을 다 말할라카믄 끝이 없다. 왜놈들한테 쫴끼서 만주로 간 우리 조선 사람들, 가심에 첩첩으로 쌓인 그 한을 우찌 다 풀겄노." "그라믄서 아제씨는 손자가 산판에 가는 러를 우째 반대를 안 했이까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판술네 말허리를 또 꺾으며 연학은 혼잣말같이 중얼 거렸다. "그거는 사정이 다르제." "..." "연비연비로 일을 그렇게 됐다마는 우리 승구는 벌목일은 안 하더라. 가아는 식자도 있고, 어디 노동일 할 처지가? 산판 임자 대신으로 일을 본께. 그래도 그렇제, 식구들을 떠나 가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사 진주 내리와서 취직이라도 하라 했지마는 그 아이도 역마살이 들어서 그런지 마다 안 카나." "취직하는 일이 어디 쉽습니까." "하다못해 장사라도 하라 했제. 하기사 이자는 잘된 일로 생각한다. 그 아이가 여기 있었다믄 온전했겄나? 어이구우, 자식들이 많다 보이 밤낮으로 걱정이다."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영팔노인뿐만 아니라 판술네도 못잖게 말이 많아졌고 근심은 펴 널어놓은 무말랭이만큼이나 많아졌으니, 그래서 또 말이 많아졌는지 모른다. 연학은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의 머릿속도 무척 복잡했던 것이다. "가볼랍니다." "갈라나?" 섭섭해하는 얼굴이다. "여관으로 갈 기가?" "예. 다른 볼 일도 있고, 저녁에나 내일 아침쯤 오겄십니다." 밖으로 나온 연학은 멀리 보이는 형무소 쪽에 시선을 보내다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까마귀들이 무리지어 들판에 날아앉았다가는 날아오르곤 한다. 사방이 어두워진 뒤 연학은 병원으로 허정윤을 만나러 갔다. 기다리고 있던 정윤은 가운을 벗어놓고 간호부에게 몇 마디 말을 남긴 뒤 연학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여전히 그의 기분은 좋아 뵈질 않았다. 말도 없었다. 밀주집이라 했으나 정윤이 연학을 안내해 간 곳은 요릿집이었다. 모두 폐업을 하고 몇 채 안 남은 요릿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내어놓는 술이 밀주인 것 같았다. 미리 청을 넣어놨던지 술상은 이내 들어왔다. 술을 부어서 마신다. "거 듣자하니까 양현이하고 윤국의 혼사가 틀어졌다 하든데요?" 정윤은 지나가는 말로 얘기를 꺼내었다. "뉘한테 들었는고?" "이시우 그 사람, 저하고는 동서뻘 아닙니까." "아아, 참 그렇지. 그 사람이 양현에 대해서 뭐라 하든가." 다가앉듯 묻는다. "일절 말이 없었소. 자주 만나는 처지도 아니고, 여자들끼리 오가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 머라 하든고?" "집사람 말로는 혼사가 틀어졌다, 그 이상 내막은 잘 모르는 모양이더군요." "음...하기는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리네. 젊은 사람들 속을 알아야제." "이시우 그사람, 혼사가 성사되길 그렇게 바랐다 하든데." "왜 안 그렇겄나. 배는 달라도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이고 보믄...양현이 어디 보통 아이든가." "지 생각에도 참 좋은 한쌍이다 싶었는데." "다 팔자지 머. 인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 연학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는다. "요즘 겉은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은 자네 겉은 의사제." "사람인데 어찌 근심 걱정이 없겠습니까." "모두 사는 기이 칼끝에서 용 천 지랄하는 기라." "어떻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싶은데 그게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연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학생들은 우선 괞찮다 하겠으나 사불여의할 때는 무더기로 끌려나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대학 중학 할 것 없이." "무슨 들은 얘기라도 있었던가?" "들은 얘기라기보다 일본인들은 대개 그것을 예상하고 있는 모양이든데요?" "예상이야 우리도 하지." "이태리는 완전히 패망했고 독일이 항복하는 것도 시간 문젠데. 일본의 시간 문제가 우리에게는 가장 절실한 일이지요. 항복을 하느냐 본토 작전에 들어가서 전국민이 옥쇄하느냐, 만일 본토에서 결정을 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우리 조선인들은 방탄용이 될 겁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럴 게야." 연학은 그 순간 이범호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렸다. 이범준하고는 전혀 다른 칼날 같은 눈이 살 속으로 몰려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술만 마신다. 조선 민족의 운명은 진작부터 그런 방향으로 예상되어 왔다. 식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극히 소수만이 그 포악한 칼날을 피부에 느끼고 있었을 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의식이 마비된 상태였다. 체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의식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날이면 날마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단장의 이별이나 굶주림, 오로지 하나, 일본왕에 대하여 충심하며 초개같이 제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총칼의 위협이 강산에 충만해 있건만 사람들에게 그것은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 원인이나 결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으며 다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만 느끼고 있었다. 아마 일본인들이 그러했을 것이며 친일파라고 뾰족한 희망이 있을 리 없었다.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일본과 운명을 같이 할밖에 없다는 것을 때때로 느낄 따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횡포하게 했을는지도 모른다. 말단의 일본 녹을 먹는 친일분자는 한층 가열하게 내 백성에게 채찍질하며 끌어내고 잡아내고, 그들은 포식하는 처지만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상부층은 협력을 해야만 조선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 논리를 녹음하여 되풀이 되풀이하여 판을 돌리고 있었다. 열혈의 조선 청소년들이여! 국가 위안을 보고만 있을손가,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라! 대군의 신금을 우리는 보위해야 하느니, 펜을 버리고 총을 들라! 오오 감읍의 극이로소이다. 폐하의 적자로 조선백성을 안으신 그 크나큰 성은을 어찌 우리가 잊을손가! 저 하늘의 태양이 영구불멸이듯 우리의 인군 또한 그 영광이 무궁하리, 오오 조선의 청소년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라! 썩어 죽을 놈들, 유다의 낙인은 이천 년에 이르기까지 소멸되지 않았음을 그 어찌 모르는가. 연학은 이범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간간 그 사이에 끼여드는 남희 얼굴을 생각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허정윤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눈앞에 남희 얼굴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석이며 성환, 성환할머니의 얼굴도 지나간다. '혹 불치의 병이 아닐까? 혹?' 하다가 연학은 불미스런 상상을 물리치곤 한다. 그러나 연학은 정윤에게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말을 하기 위해 이렇게 만난 것이니 말할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할까 싶었던 것이다. "아까 고생하는 사람의 딸이라 했던가요?" 정윤이 비로소 서두를 꺼내었다. "그랬지." "짐작은 갑니다만 독립운동 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옥살이하는." "하여간 그 정도로만 알아두게." "그게 하도 이상하고 끔찍스러워서 차마 입밖에 말 내기가 거북합니다." "...?" "사실 의사로서 적잖은 세월을 보냈지만 이런 일은 처음 경험했기에 저로서도 충격이 컸습니다." "말해보게." "그런 어린 나이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말학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 아이의 병은 성병입니다." "뭐라!" 연학의 손에서 술잔이 떨어졌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연학은 넋이 빠진 듯 정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 후 연학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대체 그 아이는 부산서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말 대답은 하지 않고 연학은 "못 고칠 병은 아니겠지?" 하고 물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치료하면 고치기야 고치지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연학은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았다. "허선생." "네." "이 일은 꼭 비밀을 지켜주게." "..." "남들에게는 물론이나 본인보고도 절대로 병에 관한 얘기는 말아주게. 철없는 것이 그런 거는 알지도 못할 기고 심장병이라든지 머 다른 병이라 하고." 연학은 도다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솔직히 말해서 연학은 혹 잘못되어 아이라도 가진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는 상상을 해 보았다. 수 없이 그 생각을 물리치면서도. 굉장한 충격이었다. 실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미라는 것이 요릿집을 하다 보니, 정말 억장 무너지는 일이구마. 하 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일 수 있일까." "..." "하여간에 병이나 고쳐주게. 뒷감당은 내가 다 할 긴께." "알았습니다." "여하튼 아이가 멍청이가 됐는지 순순히 병원엘 따라오는 거를 보아도, 흠 절대로 본인보고 말하지 말아주게." 혼자 여관을 향해 밤길을 걸어가는 연학은 가다 말고 멈추어서곤 한다. 토할 것 같았고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최참판댁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 험난한 일들의 뒷설거지를 해온 세월이. 때론 숨이 막히게 긴장을 하기도 했고 굽이굽이 사태를 넘겨야 했던 절박함, 그런 것을 말없이, 때로는 졸 듯 태연하게 넘겨왔지만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밤과 같이 험악한 일을 격을 것은 처음이다. 사실 사생활에 있어서는 담박하고 지극히 도덕군자였던 연학이었던만큼 뭐가 어떻게 되어 이 지경까지 왔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충격이 며 경악이었다. 화류계에서 더러 그런 일이 있다고 들었짐만 자기 주변에서, 그것도 아직 나이 어린 정석의 딸이. 연학은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며 마치 악몽과도 같은 사실을 털어버리려 했다. 이틋날 연학은 적잖은 돈을 내밀면서 판술이 내외에게 말했다. "집에 들리서 남희한테 이르고 갈라 캤더마는 좀 급한 볼일이 있어서 가야겠네." "남희 일이라 카믄 걱정 마시이소." "그래도 그냥 두고 가기가 걱정이네. 성한 아이가 아닌께. 매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데." "지가 데리고 가지요." 판술이댁네가 말했다. "하루라도 빠짐믄 안 될 깁니다." "예, 알겄십니다. 열일 제쳐놓고라도." "그는 그렇고, 이 돈은 멉니까?" "벵원비도 들 기고 양식도 보태야 안 하겄나." "돈이야 여관에도 안 있십니까." "여관 돈은 여관 돈이고, 이 돈 넣어두었다가 자네가 알아서 남희한테 쓰게, 아픈 아이니께 음식도 조심부리 믹이야 할 기고 할매를 떨어져 남의 식구 속에 있인께 특별히 맘을 써주었이믄 싶다." "알았소. 걱정 마이소." 신신당부를 하고 연학은 진주를 떠나 평사리로 향했다. 그는 남희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민망하고 그 자신 너무나 깊은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다. 설사 원인을 캔다 하더라도 부산의 그 생모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지 연학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희에 관한 일은 남에게 미루어버리고 자신은 손을 떼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나루터에서 연학이 막 내렸는데 복동이네가 "인자 오십니까?" 하고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시큰둥하며 인사도 잘 하지 않았던 아낙이다. 말하자면 우가네 편이었던 것이다. "성환할매 집에 난리가 났소" "왜죠?" 복동이댁네는 나들이 가는 모양이었다.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부산서 손님이 왔는가배요. 남희 어매라 캄서 하이칼라 여자가 와 있더마요. 성환할매하고 시비가 붙어서 시끄러벘십니다. 남희는 진주에 두고 오십니까?" 그새 소문은 쫙 퍼져 있었던 것이다. 연학은 대꾸 없이 지나친다. "쳇! 남의 집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웬 챔견이 그리 많을꼬? 에미자식 에미가 데리가는 거이 당연하지." 하며 들으란 듯 시부렁거렸다. 그만큼 세상은 변했고 최참판댁이라면 쪽을 못 쓰던 왕시와는 다르게 우습게 보니까 따라서 연학도 우습게 보는 것이다. 복동이댁네를 만나기 전만 해도 연학은 성환할래 집에 먼저 들를 생각은 안 했다. 자기 거처로 가서 좀더 생각을 해보리라 마음 먹었던 것이다. 평소같이 능청을 부리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산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학은 곧장 성환활매 집으로 갔다. 과연 남희에미 양을례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한 소동이 지나갔는지 귀남네가 마당을 우두커니 서 있었고 방안에 성환할매가 있는 눈치였다. 기가 넘어서 스러지기라도 했는지 방안에서는 달래듯하는 야무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을례는 의기양양해서 앉아 있지는 않았다. 어딘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댁이 부산서 온 사램이오?" 양을례를 쳐다보는 연학의 눈은 불이 붙은 듯 형형히 빛난다. 증오와 멸시와 분노에 찬 눈빛을 받을 을례는 위축된 듯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을 들어 보인다. "네, 그렇소." 말씨만은 도전적이었다. "날 따라오시오." "...?" "따라와요!" "그, 그렇지만 댁이 누구길래." "남희를 진주 데리다주고 오는 길인께, 당신 할말이 있을 거 아니오!" "그렇기로니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날 욱대지르는 거요? 별꼴을 다 보겠네." "별꼴을 보나 안 보나 두고 보믄 알 기구마. 다리몽댕이 분지르기 전에 못 일어나겄소?" 이렇게 노하는 장연학을 본 일이 없는 성환할매, 야무네는 방문을 열어보고는 감히 방에서 나오질 못한다. 귀남네 역시 몸을 떨고 있었다. 양을례는 뭔가를 깨달은 듯 부스스 일어섰다. 장연학은 성환할매한테 이렇다 저렇다, 남희에 대한 설명 한마디 없이 휑하니 나가버린다. 양을례는 비실거리다가 묘하게 꼴사나운 몸짓을 하며 연학을 따라 나갔다. "장서방이 저러는 거는 처음 보겄다. 웬일이꼬?" 성환할매는 풀이 죽은 양을례 꼴이 고소하다는 것보다 몹시 불안해하며 말했다. "마침 잘 됐거마는. 아아를 데리가느니 우쩌느니 그런 말 두 번 다시 못하게 조질라고 그러는 거 아니겠소? 아닌게아니라 장서방도 성질 내니께 무섭네." "남이가 우찌 됐는지 한마디 말도 없이." "그거사 급한 일이 아닌께 그러겠지요. 아무튼 내사 속이 씨원하거마는. 남자 없는 집이라꼬 척 들어서서 지 곤리를 주장하는데, 애시당초 대찬 남정네가 있었다믄 어림이나 있는 일이건데? 감히 어디라꼬 이곳에다 발을 딜이놓다?" "하기사." "귀남네." 멍하니 선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귀남네는 야무네가 부르는 소리에 당황한다. "넋빠진 사람맨치로 와 그러고 있노? 니도 놀랬는갑네." 무심히 한 야무네 말이었지만 귀남네는 무엇을 잘못하다 들킨 사람같이 "야, 저기." 하다가 부엌 쪽으로 급히 간다. 기실 귀남네는 놀라기도 했지만 그는 두려워했던 것이다. 장연학에서 상당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귀남네는 장연학을 잔뜩 무르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실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지난날 방자했던 자신의 언동이 생각났고 어매와 자신의 갈등을 연학이 어찌 보았을 것이며 사사건건 조카들을 시샘했고 적대시해온 것도 그랬다. 오늘만 하더라도 귀남네는 어미 편에 서지 않았다. '지 에미가 지 새끼 데리갈라 카는데 머를 저리 빼딱시럽게 저러는고? 벵이 났이믄 어련히 지 에미가 고쳐줄까? 돈이 없나 벵원이 없나. 한다리가 천리라꼬 에미는 에미, 할매는 할매 아니가.' 귀남네로서는 물론 남희가 없는 편이 좋았고 게다가 전사야 어찌 되었든 양을례는 식자가 있고 말을 잘했으며 차림새도 시골서는 볼 수 없는 하이칼라의 여자였다. 들고 있는 손가방이며 구두가 번쩍번쩍 빛나는 것만으로도 귀남네는 그 위세에 눌려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여자를 마치 양새끼 몰고가듯, 귀남네가 두려워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한편 최참판댁 사랑에서 양을례와 마주앉은 장연학은 오랫동안 여자를 노려보고만 있다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말하시오." 하고 입을 떼었다. "어떻게 되다니요?" 을례는 상대가 얼마만큼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것을 살피듯 말했다. "몰라서 그러는 거요? 잘 알 텐데." "나는 몰라요. 아이가 아프다는 것밖에, 거기서 알고 있다면 말씀하세요." 을례는 전세를 가다듬듯 허리를 빳빳이 세운다. "당신 겉은 여자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돼!" "무슨 권리로." "권리 있어!" 연학은 집어삼킬 듯 말했다. 을례의 기세가 다소 꺾인다. "다짜고짜 이래도 되는 건가요?" "왜 말을 못하요? 할말은 내게 있는 기이 아니라 바로 당신한테 있어!" 을레 가슴을 겨누듯 연학은 손가락질을 했다. "남희를 우떻기 했소? 손님 술자리에 내놨나?" 이번에는 어세를 떨어뜨리며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벌 받을 소리!" 했으나 양을례의 얼굴은 온통 구겨지고 말았다. "천벌 받을 소리, 어느 에미가 지 자식을." 하다가 별안간 을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랫동안, 오래 울어본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울었다. 이윽고 핸드백 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남희 장래를 위해 죽어도 입밖에 내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거기서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말하는지 그거는 모르지만." 그는 또 눈물을 닦았다. "내가 여기 온 것도 전처럼 아이가 욕심나서 그런 것도 아니며 영영 아이를 버릴까 싶어서 어떡하든 아이를 돌보아야겠다 싶어서." 본론에 들어가기가 아무래도 힘이 드는 눈치였다. "이 세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그것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요." 을레는 힐끗 연학을 쳐다보았다. "병정놈한테 당한 거예요. 그 몹쓸 놈이 아이를." "병정놈 ! 왜놈 병정이오?" 을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은 다 해제되고 여자는 누더기같이 초라하게 자기 무릎만 내려다본다. "천하에 무도한 놈들!" 차라리 연학은 눈을 감아버린다. 눈앞의 여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가서 개동이놈을 찍어 죽이고 싶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했나. 정확하게 한땀 한땀 꾸부리고 뻗으면서 가지 끝을 기어가는 한 마리 자벌레, 소리 없이 잠자듯 시간은 흘러가는데 조선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도가니 속에서 축 늘어진 지렁이가 다 되고 말았단 말인가. 밟아도 꿈틀거릴 줄 모르는 지렁이, 연학의 눈앞에는 범호의 얼굴이 커다랗게 다가왔다. 그 매서운 눈초리가 연학을 응시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 가끔 오던 놈이었어요. 그것도 명색이 장교라 하는데 그런 짐승일 줄이야... 함께 사는 사람하고 면식도 있고 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치욕스런 상대를 여자는 함께 사는 사람이라 표현하는 것이었다. "남희를 귀여워했고 점잖으며 교양도 있어 뵈든데... 속았어요, 그날." 하다가 여자는 말을 끊었다. "그날." 또 말이 끊어졌다. 한참 있다가 "그날, 그놈이 와서, 차 타고 구경가자 했던가 봐요. 그래 그 철없는 것이 따라갔던 모양이에요. 우리는 몰랐지요. 나중에 알았을 때 그 사람 얼굴빛이 달라지더군요. 안절부절못하고, 저녁때 아이를 집 앞에 내동댕이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달려나가서 차를 막아섰지요." 여자는 이제 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시비가 붙었어요. 원래 야쿠자 출신인 그 사람이 아이구치(단도)까지 휘두르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일 당한 뒤 무, 무슨 소용이." 을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을 다시 꺼내었다. "지쿠쇼 ! 고로시테야루, 고로스 ! 기사마가 닌겐카 !(짐승놈 ! 죽여주겠다. 죽일 거야 ! 네놈이 인간인가 ! )" 아이구치를 휘두르고 덤비며 입이 찢어져라 소리소리 지르던 사내 얼굴이 악몽처럼 을례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남편이라 부를 수도 없는 사내, 일본인과 동서하는 여자도 거의 없었지만 그런 처지 일 때는 작부보다 더욱더 천시하며 철저하게 집요하게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 조선인 사회를 등지고 살아온 세월. 돈으로 치장하고 돈으로 가꾸어 위세를 부려본들 무슨 소용인가, 진정 무슨 소용인가. 사가라 부르던 사내, 머리숱이 많고 눈이 작던 육군 중위, 그 사내가 비웃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데테곤카 ! 데로 !(나오지 못하겠나 ! 나와 !)" 사내는 자동차 문을 열어젖히고 사가를 끌어내려고 용을 썼다. 사용인들이 우우 몰려나와 말렸다. "호자쿠나 ! 오마에노 무스메데모 나이쿠세니 나니요 즈베코베 유운카 ! 짖어대지 마라! 네놈의 딸도 아닌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지껄 일 것 없다!)" "하라와타마데 구삿테루, 지쿠쇼 ! 구삿타 하라와타 에구루카라 데테고이 (뱃속까지 썩었어, 이 짐승놈아 ! 썩은 창자 도려낼 테니 나와라 ! )" "센진노 아맛코 히코리, 좃토 다노시미니 시탓테 소레가 난카 ! 이노치오 가케타 다이닛폰노 군진, 몬쿠 유우 야쓰라와 오란 ! (조선 계집애 하나 잠시 즐겼기로 그게 뭐 어떠냐 ! 목숨을 건 대일본제국의 군인, 누가 뭐라 할 놈들 없다 !)" 결국 을례가 그 사람이라 부르는 야나기는 군인 폭행을 했다 해서 구류를 살고 나왔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에도 그놈은 정신대에 끌고가도 누구 말할 사람 없다면서 협박을 하고,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서 학교에는 장기 결석계를 내놓고, 게다가 아이는 온정신이 아니었소. 멍청이가 돼 버린 거지요. 부득이 가두어둘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가 없어서 행여 어디 가 죽었는가, 그놈이 채갔는가, 사방팔발을 헤매다가 여기 와본 겁니다. 죽든 살든, 어떡허든 데리고 가서 제정신이 들게 해야 안 하겠습니까." "당신이 받아야 할 천벌을 남희가 대신 받은 거요." 그 와중에도 을례 눈에 날이 섰으나 그러나 이내 그 날은 사라졌다. "아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와요?" 데리가서 두 분 죽음 시킬라꼬요?"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남이 가슴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소? 시집을 못 보내는 한이 있어도 공부시켜서 혼자 살 수 있게 마련하겠소. 아이를 내어주시오." "당신 돈 아니라도 뒷바라지할 사람은 있소. 오래비도 있고." 오래비라는 말에 을례는 찔끄한다. "좋게 끝낼라 카믄 가소. 아무 말 말고 가소." 연학은 남희 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3장 청춘의 향기 기온은 낮았으나 바람이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일요일 막 조반을 끝낸 뒤였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선생님 !" 문을 두드리며 주르는 목소리는 주인집의 딸 지혜였다. 그리고 이내 도어를 열고 오렌지빛 스웨터에 새하얀 얼굴을 디밀며 들여다본다. "왜 그래? 뭐 모르는 것 있어?" 책상 앞에서 양현이 돌아보았다. 지혜는 가끔 수학 문제를 들고 와서는 양현에게 묻곤 했다. "아니예요. 손님 오셨어요." "손님?" "네, 근사한 사람이던데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것은 숙제로 남겨두겠다는 것인지, 한창 나이의 여학생인 지혜는 신나하며 장난기 어린 표정이다. "손님이라니...." 잠시 동안 양현은 큰오빨까? 명희아주머니까? 생각해본다. "어서 나가보세요. 아니면 제가 안내할까요?" "아니." 양현은 가디건을 걸치며 밖으로 나갔다. 누렇게 시든 잔디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디딤돌을 밟고 앞뜰로 돌아 나왔다. 대문 가까운곳, 빙하 같은 새파란 하늘에 잎 떨어진 목련나무, 그러나 내년 봄을 기약한 봉우리를 앙상한 가지가 물고 있는 목련을 올려다보고서 있는 사내는 송영광이었다. 외투 호주머니 속에 양손을 찌르고 있었다. 양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영광도 고개를 틀어 양현쪽으로 얼굴을 들렸다. 서로가 말없이 마주본다. 한참 만에 영광은 양현에게로 다가왔다. "잘 있었나?" 낮은 목소리로 영광이 물었다. 양현은 발끝을 내려다본다. 거부하는 몸짓이기도 했다. 추석 전에 서울 돈암동 종점에서 헤어진 뒤 처음 만나는 이들이었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그런데?" "여관에서 잤어." "..." "아침에 올려고." "집은 어떻게 아셨어요?" "병원에 가서 물어보았지." "하여간, 그럼 들어오세요." 망설이다가 양현이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영광은 양현의 뒤를 따라 디딤돌을 밟고 가면서 "하숙 치는 집 같지는 않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방에 들어와서 넓고 채광이 좋으며 상당히 고급으로 꾸며진 방안을 둘러보며 "하숙 치는 집 같지는 않은데?" 영광은 되풀이해 말했다. "병원 원장이 알선해주신 집이에요. 원장은 이 댁 주치의거든요." "흐음... 한반중에 환자가 생겨도 걱정 없겠군." "그런 셈이지요. 이 댁에서는 그것도 고려했을 거예요." 처음으로 양현은 쓸쓸하게 웃었다. 영광이 찾아오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찾아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해서 양현은 그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자신이 영광을 찾아가지 않았을 뿐이다. 영광이는 윤국이와 양현의 결혼 문제가 허사로 끝난 것을 알고 있었다. 약 석 달 전에 그는 환국이를 만났던 것이다. 환국이 쪽에서 만나자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영광은 싸움터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양현과의 관계를 환국이 알았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찻집에서 환국과 마주앉은 순간 영광은 오늘로서 우정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환국의 표정이 다소 험악했고 긴장되어 있었다. 찻집에서 뒷골목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저께 양현이를 만났어." 하고 환국이 말을 꺼내었다. "자네 그래도 되는 건가?" "....." "양현이하고 결혼하겠다는, 설마 그런 생각까지 하는 거는 아니겠지?" 영광은 술잔에는 손을 대지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어." 영광이 침묵을 지키니까 초조해진 환국은 허우적거리듯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어성이 높았다. "신분 때문인가?" "..." "학벌 때문에? 딴따라가 천한 직업이라서? 아니면 과거 여자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 모든 것, 한두 가지가 아니야. 게다가 자네의 그 뜬구름 같은 성격은 어쩌고, 양현이하고는 안 된다. 나도 윤국이 양현이의 결합을 굳이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자네는 안 돼." "자네가 그런 속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영광은 노해 있지는 않았다. 절망도 아니었다. 비애에 찬 눈빛으로 환국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눈빛이 견디기 어려웠던지 환국은 술을 들이켜고 빈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속물이라 해도 감수하겠다. 양현이는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야.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 "사랑한다면 놓아주게. 양현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 아닌가. 친누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욕심, 내 편견을 순수한 걸세." 환국은 억지를 쓰듯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절실한 감정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아이의 어두운 미래를 나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사랑의 진실... 어두운 미래..." 영광은 일그러지 미소를 머금으며 혼잣말같이 뇌었다. 환국은 영광의 시선을 피하면서 "양현이는 참 많은 사람에게 절망감을 주었어. 윤국이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어머니가 받으신 타격이 얼마나 큰지 자네는 모를 거야. 나는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알어. 우리 어머니가 지략가인 것은 사실이나 윤국이하고의 혼인을 생각하신 것은 양현의 출신을 거론하는 것이 싫으셨던 게야. 양현은 우리 집안의 꽃이었어. 음산하고 다사다난했던 우리 집안의 크나큰 위안이었다." "나는 그 꽃을..... 나는 더러운 벌레란 말이지?" 영광은 껄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공기 빠진 공처럼 찌그러지고 힘없는 웃음 소리, 영광은 자신의 웃음 소리가 한심했다. 전의나 전율 같은 적개심은 다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환국이 역시, 영광의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격렬하게 맞서고 나올 것을 각오하고 나왔는데, 광기가 서려 있던 반항아, 영광의 행적을 동경서 수없이 목도했던 환국이다. 그 폭풍과 같은 시절을 거치면서 환국은 그에게 매료되었고 영광이도 환국에게만은 마음을 열어주었던 우정의 부피, 어쩌면 시작에서부터 이들의 대결은 투구도 갑옷도 없는, 칼도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초입에서 이들은 애매하게 흐지부지, 얘기는 계속되지 않았다. 환국은 더 이상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임을 깨달았으며 사실 영광은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석 달 동안 영광은 매일매일 환희와 절망을 되풀이하여 겪었다. 윤국이와 양현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사랑의 승리감과 환희 뒤에, 반드시 어김없이 그 감정을 쫓아오는 것은 절망이었다. 양현을 확신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영광은 날이면 날마다 양현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고 그와 동시, 어디로 달아나갸겠다는, 양현이 모른는 곳으로 달아나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또 신천지를 향해 설레면서 떠나듯 양현을 향해 떠나려고 서울역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영광은 지금 그 갈등과 상충의 싸움터에서 만신창이가 되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파괴하면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석 달 전에 환국이를 만났어." 담배를 붙여물며 영광이 말했다. "양현이를 만났다 하더군." "..." "왜 오빠를 만났지?" 양현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무슨 심산으로 나와의 관계를 고백했느냐는 질문이 포함된 물음이었다. 환국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나를 단념하기 위하여 소식을 끊었느냐는 물음도 담겨 있는 말이었다. 양현은 초췌한 영광의 얼굴을 외면하며 "물어볼 말이 있었어요." "물어볼 말?" "네, 후회했어요." "..." "어째 그런 짓을 했는지 제 자신도 이해할 수 없어요.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제삼자에게 확인을 해야만 했는가." "여자 관계 말인가?" "제 자신이 그같이 비천했으리라는 건, 부끄러워요." "역시 그 얘기군." "..." "환국이가 말한 대로야. 숨기고 싶지 않았지만 말하고 싶지도 않았어." 형님한테 가서 물어보라, 하며 이성을 잃고 내뱉었던 윤국이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온 야현은 환국이를 만나 이성을 잃은 채 그 일을 확인하여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영광과의 관계를 고백한 거나 다름이 없는 행동이었다. 양현은 지금도 경악하던 환국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환국은 격노했음에도 영광과 그 어떤 여자와의 관계를 솔직히 공평하게 말해주었다. 그 여자가 바로 혜화동 길모퉁이에서 양재점을 했던 강혜숙이라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윤국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이었으나 영광이 선 자리는 상당히 다랐다. 여자가 희생되었으나 그보다 더 가혹하게 영광 자신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양현은 알게 되었다. 그것은 환국이와 윤국의 견해의 차이일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는가, 힐난할 수도 있는데... 오빤 왜 그러질 않지요?" 영고아의 여자 문제를 삼자인 환국에게 물어보았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행위일 수도 있었다. 일종의 배신일 수도 있었다. "물어보아도 나는 대답할 수 없었을 거야." "어째서지요?"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사실을 말한다 해도 그건 비겁해. 잔인한 짓이고." 상대에 대하여 그렇다는 말은 생략했다. "왜 그분하고 헤어졌어요?" 이미 환국이한테 들어서 그 경위는 알고 있었는데 양현은 본인, 영광에게서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건 말하고 싶지 않아." 영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변명하고 싶지 않아. 미화하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난 그런 놈이니까, 세상에는 흔히 말하는 잡놈." 양현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양현이 너는 후회할 거다. 윤국이하고 결혼 안 한 걸 후회할 게야." "..." "벌써 넌 후회하고 잇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진작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말 말아요, 제발." 말이 끊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은 물론 많았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이들 남녀 모두 성숙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나이를 보나 사고의 능력을 보나 전혀 타당성이 없는 말 같지만, 애정 문제에 대해서는 영 미숙한 것처럼 보였다. 여자 편력이 없지도 않은 영광이조차, 너무 절실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양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영광이 역시, 전혀 새로운, 지금껏 경험해보지 않았던 정열이었고 게다가 상황은 굴절되어 이들을 서투르게 몸부림치게 했으며 따라서 상실감의 공포가 앞서기도 하여 마음과 행동이 겉돌아서 그렇게, 미숙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영광은 일어섰다. "오빠!" 양현은 순간, 와락 다락와서 영광의 두 다리를 껴안 듯 잡았다. 지금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 오빠 잠깐만요." 양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둘러 외투를 찾아 입는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묵묵히 걷는다. 마치 패잔병처럼, 노지에 내어몰린 부랑아처럼 걷는다. 어디를 어떻게 헤매었는지 찌르듯 날카로운 냉기 속을 헤매어 그들은 역 앞에까지 왔다. 들어가기 쉬운 곳이 역 대합실이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대합실 안은 더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붐비지는 않았다. 노인네, 짐을 잔뜩 끌어안은 아낙들, 아이 업은 젊은 여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광은 양현을 쳐다보았다. 파랗게 얼어버린 얼굴이었다. 입술빛은 더욱더 파랗게 보였다 영광은 목도리를 끌러 양현의 목에 감아준다. 서로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아낙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두 사람은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차 탈까?" 아이같이 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표를 끊는 사람들을 뒤 쫓아서 영광이도 소녀처럼 매표구 앞으로 급히 달려간다. "어디요?" 하며 매표구 안의 사내가 불친절하게 말했다. "종점까지." 돈을 디밀자 기차표와 거스름돈이 나왔다.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인천서 수원까지, 선로가 좁고 기차도 작은 수인선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동차에 영광과 양현은 올라탔다. 삐이! 하고 내지르는 기적 소리와 함께 기동차는 움직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유랑길을 끝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해의 끝없는 개펄, 그리고 아득하게 펄쳐져 있는 염전,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구 끝을 작은 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세상과 차단된 좁은 공간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가난하고 이지러진 영혼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오는 것을 느낀다. 기찻간은 사람들 온기로 몹시 춥지는 않았다. 독특한 억양과 사투리 비슷한 말들이 이따금 귀에 흘러 들어왔고 아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위축되고 긴장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일을 넘어가는 차바퀴의 울림조차 정답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내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 날지 지나온 길이 어떠했든지 이 순간의 충일함 따사로움만을 소중하게 품에 안 듯, 그러나 역시 슬프기는 했다. 한두 곳에서 기차는 멎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내리고 오르곤 한 것 같았다. "우리 내려서 바다를 보지 않겠어?" 영광이 별안간 말했다. "바다... 네, 그래요." 띄엄띄엄 서 있는 목조 왜식 건물이 몇 채 보였다. 아마 관사인 것 같았다. 몇 가호 안 되는 작은 마을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 기차가 머물렀을 때 두사람은 기차에서 내렸다. 기동차는 삐! 소리를 내며 장난감처럼 멀어져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듯 매웠다. 영광은 아차, 하며 후회를 했다. 날씨 생각도 하지 않았고 바다가 어느 만큼 먼 곳 있는가 그것도 생각지 않고 무모하게 하차한 것을. 허허벌판이었다. 어느 만큼 걸어가야만 바다를 볼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했다. "우리 두 사람, 낯선 이곳에서 꽁꽁 얼어 죽겠다. 춥지?" "춥지만." "걷자. 걸어가노라면 어디든 닿게 되겠지." 멈출 수 없었다. 너무 추워서, 두 사람은 서로 껴안 듯 둑에서 내려갔다. 바둑판같이 정연하게 구획이 되어 있는 염전의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사람이라곤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었다.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이 지상에서 모조리 자취를 감추어버린것만 같았다. 죽음의 땅, 어디쯤 가야만 바다, 물결치는 소리라도 들어볼 수 있을는지, 영광은 외투 단추를 풀고 양현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외투 한 자락을 덮어서 안았다. "양현아." "네." "우리 둘이서 죽는다면 여긴 안성맞춤의 장소 같지 않아?" "아니야, 죽기는 왜 죽어." "오빤 우리 둘이 죽는 생각 해보았어요?" "해보았지." "언제?" "죽고 싶도록 괴로웠을 때." "또요." "죽고 싶도록 그리웠을 때 그런 생각 해봤어." "정말 여기는 죽음 같은 곳이네요. 풀 한 포기 흔적이 없지 않아요?" "그야 염전지대니까 그럴밖에." "겨울에는 염전 일 안 하니까 그런가 보지요?" "그래도 나는 기분 좋다." "정말 기분 좋아요?" "그럼." "제가 밉지도 않구요?" "밉지도 않으냐구?" "네, 전 배신자 아니예요?" "나는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배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랬나?" "네, 질투의 화신이 되어." 영광은 그 말이 유쾌한 듯 껄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양현은 영광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며 넓은 가슴에 얼굴을 비벼댄다. "안 되겠어. 되돌아가자!" 영광은 양현을 안은 채 발길을 돌렸다. "저기 보이지?" "뭐가요?" "창고 같은 것 보이지 않아?" "보여요." "거긴 햇볕이 가득하다. 우리 거기까지 뛰어가는 거야." "좋아요." 서로 껴안았던 팔을 풀고 이들은 뛰었다. 뛰면서 또 손을 잡곤 한다. 목조로 된 큰 창고 앞에 이르렀다. 소리 창고인 것 같았다. "어때? 좀 덜 춥지?" 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향인 소금 창고 앞에는 상당한 햇볕이 저장되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창고의 나무벽에 기대어 해를 향해 나란히 앉았다. "한결 낮지?" "따뜻해요." "우리는 왜 예까지 왔을까?" "몰라요." "나도 모르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천 시내를 헤매고 있었는데. 아무튼 별난 곳에 왔어." "어떻게 돌아가지요?" "걱정 말어. 여기는 조선땅이야." "하지만." "좀 가면 마을도 있고, 양현이는 만주에 가본 적이 없지?" "없어요. 오빤 더러 갔었지요?" "음, 몇 번." "거긴, 여기 이보다 훨씬 춥다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겨울을 날까?" "겨울에는 안 가봐서 모르겠어. 말로는 굉장하다 하더군." "그래도 옥토라 하잖아요?" "농사야 봄 여름에 짓지, 겨울에 농사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번 가보고 싶어요." 영광은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바람은 막고 불을 댕긴다. "신경서 할빈까지 가는데 참 장관이더구나." "뭐가요?" "기차로 장장 칠팔 시간을 가는데 산이라곤 없어. 끝없는 수수밭이야. 무섭더군." 양현의 표정이 막연해진다. "그곳에 또 가고 싶으세요?" "음, 가끔은." 영광은 길게 담배연기를 내어뿜는다. "거기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전에 한번 그랬어. 만주로 오지 않겠느냐구."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홍이 생각이 잠시 영광의 뇌리 속을 지나갔다. "그래서요?" "그렇다는 얘기지 뭐." "오빠." "음." "늘 어딘가 떠나고 싶으시지요?" "..." "방랑벽 때문인가요?" "그런 세이지. 왜?" 영광은 고개를 돌리고 양현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너무나 단려하다. 앞에서 본 얼굴보다 차갑고 어둡다. "그냥요, 그냥 물어봤어요." "양현아." "네." "내가 어디로 가버릴까 싶어서 그래?" "그런 생각 가끔해요." 눈시울이 흔들린다. "아니라고 그러세요." 영광은 양현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막듯 긴 입맞춤을 했다. 차츰 추어지기 시작했다. 햇볕은 풍성했지만 바닷가의 노지, 한겨울의 바람은 사정이 없었다. "안 되겠어, 나 갔다올게." "어디루요?" "마을." 일어선 영광은 외투를 벗었다. 양현의 앞을 외투로 가려주는데 양현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안 돼요, 오빠!" "괜찮아." "얼어죽을 작정 했어요?" "뛰어갔다 올 거야. 외투는 거추장스러워." "그러지 말아요." 외투를 한사코 밀어낸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한달음에 갔다올게." "함께 갈래요." "아니, 여기 있어 꼼짝 말고 있어야 해." 망부석이라도 되라는 것인지, 다시 외투를 덮어주고 다독거리고 나서 영광은 뛰기 시작했다. 바람을 끊고 바람을 마시며 선수같이 뛰어간다. 도무지 다리가 불편한 사람 같지가 않다. 시야에서 그가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보고 있던 양현은 영광의 체취가 나는 외투에 얼굴을 묻는다. '아아 오빠!' 양현은 자신이 어느 만큼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와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곳에 한 사나이를 따라 별을 보듯 달을 보듯, 어느 만큼 왔는가. 어제와 오늘이 손바닥 뒤집듯 어째 이렇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다. 어제의 비애가 오늘 환희로 바뀌어진 것이, 갑자기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어디 가면 안 돼요!' 얼굴을 들었다. 먼,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보낸다. 하늘과 지상의 선은 뚜렷하건만 어째 사람의 삶이 수없는 곡선으로 이다지도 수없이 얽혀 있는가. 저 하늘의, 지상의 선이 뚜렷하다. 인생도 명쾌한 것일 수는 없는가. 푸른 하늘에 실구름이 흐르는데 저 하늘과 같이 영롱할 수는 없는가. 그러면서도 양현은 영광과의 사랑이 아팠다. 영광이 그렇게 자상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양현은 미처 몰랐다. 영광과 헤어지고 나면 언제나 떠오르는 것은 시니컬한 미소였고 떠밀어내는 것 같은 몸짓이었는데,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이 허둥대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의 따뜻한 체온이 몸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년같이 웃는 얼굴, 근심 띤 눈동자가 망막 속에 남아 있었다. 송영광이라는 사내, 행복의 느낌, 이미 그런 것은 양현에게 기득권을 안겨주었는데, 확신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양현은 벌써 그것을 잃는 데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 크나큰 환희는 슬픔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목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아이를 데리고 땀을 흘리며 병원을 찾아온 젊은 댁네와 손마디가 굵은 아이의 아비, 무척 초라해 뵈던 그들이었지만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던 풍경은 아름다웠다. 양현은 그들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남자는 인천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다가 낙상했으며 양현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양현은 부르르 떨었다. '왜 하필이면 그 생각을 하는 거지?' 양현은 일어섰다. 영광의 외투를 손에 들고 영광이 간 곳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꼼짝 말고 있어야 해, 하던 영광의 말이 떠올랐고 만일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벌판 한가운데 멈추어 서고 말았다. '어째 여태 안 오지?' 영광이 간 곳을 눈이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야말로 일각이 천추만 같았다. 목마름과도 같았다. '차라리 우리 둘이 여기서 죽어버릴까?' 그것은 일종의 유혹과도 같았다. 저만큼 뛰어오는 영광의 모습이 나타났다. 엄지손가락만했다. 양현은 후 하고 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치는 지점을 향해 뛰고 급히 걷는다. 숨을 몰아쉬며 영광이 다가왔다. 온통 얼굴이 빨갰다. 코는 더욱 빨갰다. "꼼짝 말고 있으라 했는데!"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는다. "됐어. 따뜻한 방을 부탁해놓고 왔어. 점심 준비도 해달라고 했지." "하기는 춥고 배도 고파요." "어서 가자." 영광은 양현의 손을 이끌고 다시 뛴다. "운동회 같아요." "응?" "왼종일 뛰고 있지 않아요?" "아아." 하다가 영광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주 유쾌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웃음이 뚝 끊어졌다. "왜 그래요?" "이상해서." "뭐가요?" "나 여태까지 이렇게 웃어본 일이 없었어." "저도 손잡고 이리 뛰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꼭 미친놈 같다." "아아. 참!" 양현은 들고 있던 외투를 영광에게 입혀준다. "이제 천천히 가요. 따뜻한 방, 점심도 기다리고 있으니 말예요. 두 그릇은 문제없이 먹을 것만 같아요." "나도 그래." 그들은 서로 바라보다가 앞길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주잡은 손을 흔들기도 하며 간다. 민들레를 꺾으려고 들판에 나온 아이들처럼, 냇가에 고무신 들고 피라미 잡으러 나온 아이들처럼. 들판은 잔설에 얼어붙어 있었으며 앙상한 나뭇가지는 바람에 슁슁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전쟁이 나서 우리가 쫓겨 달아난다면 그래도 행복할까요?" 양현이 물었다. "지금 전쟁을 하고 있잖아." "말고, 전쟁 한가운데서 말예요." "헤어져서 서로 찾고 있는 것보담은 훨씬 행복하겠지." "그러니까, 어떤 고난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져야 하는 것이, 젤 못 견딜 일이겠지요?" "아마, 그럴 거야." 두 사람이 찾아간 곳은 아주 조그마한 마을인데 그 집은 구멍가게를 했던지 유리문이 달리 한 평 남짓한 가게터가 있었으나 파는 물건은 없었다. 집주인 여자가 가게 옆에 달린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새 급히 방안을 치운 모양이었고 여자의 태도로 보아 영광은 적잖은 돈을 준 것 같았다. 여자는 말하기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가게에서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누가 물건을 사가기에요?" 영광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요 너머 염부들 나가야가 있었어요. 또 저 너머는 전매국 관사가 있고 관사에는 일본 사람들만 사니까 사가는 게 없지만, 아무리 장사하고 싶어도 팔 물건이 없으니." 영광과 양현은 방으로 들어갔다. "곧 점심 지어드리겠어요. 방에는 또 군불 지펴놨으니까." 여자는 방문을 받아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따뜻했다. 누가 거처하는 방인 것 같았다. 반닫이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얌전하게 개킨 이부자리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고 사진틀이 두 개 있었다. "다리 펴." 영광이 말했다. "다리에 감각이 없지?" "네." "펴봐." 양현은 다리를 뻗었다. 영광은 그 다리를 소중하게 주물러준다. "오빠는요?" "난 남잔데 뭐." "저보다 많이 뛰지 않았어요?" "좀 시큰해." 아마 성치 못한 다리가 그런 것 같았다. "이제 살 것 같아요. 벽만 보아도 안심이 되고." "그래서 인간은 괴물이야." "괴물이라구요?" "벽은 사람은 가두어는 억압적 존재이기도 하고 사람을 보호하여 의지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구." 추운 곳에서 잔뜩 얼었던 양현의 얼굴은 얼마 안 되어 상기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경우도 그렇겠지요?" "그럼." "우리 어디 시골에 가서 살 수 없을까?" "뭘 하구?" "시골 사람 상대로 병도 고쳐주고 글도 가르쳐주고..." 그때 영광의 얼굴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공이 한 곳으로 모이면서 양현의 어깻죽지를 응시한다. '가능한 일인가...' 양현의 다리를 주물러주던 손을 멈추고 영광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꿈에서 깨어난 그런 얼굴이었다. "조그마한 채마밭도 가꾸고 꽃도 심구요, 오빨 위해 밥도 짓구 시냇가에 가서 빨래도 하구." 꿈 같은 양현의 애잔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우리... 우리 둘이서.' 하고 영광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본다. 낯선 벌판을 거닐면서, 염전 창고 앞의 햇볕을 쬐면서 몇 번인가 양현이 입에 올린 말이었다. 영광이도 그 말을 했다. 우리, 우리 둘이,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의 확인이며 두 사람의 미래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용어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 흔한 말이 지닌 의미에,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영광은 별안간 공포를 느꼈다. 못을 꾸부려놓은 듯, 활자만 같은 말이 심장 복판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마치 구름을 타고 노닐다가 험준한 산봉우리에 부딪친 그런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둘이, 그 얼마나 멀고 먼 말인가. 양현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우선 영광이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두운 미래, 사랑한다면 놓아주는 것이 진실이다, 하던 환국의 준열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빤 왜 아무 말 안 해요?" 뻗었던 두 다리를 세우며 양현이도 꿈에서 깨어난 얼굴로 말했다. "시골 가서 난 뭘 하지?" "..." "날건달로 놀고 먹나?" "..." "그도 그렇지만 당장 징용에 끌려갈 거다." 시골에 가서 살자는 말이 단순한 양현의 희망이었을 분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것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현실은 아니었다. 때마침 점심상이 들어왔다. "시굴이라 찬이 이래서 어떡허지요? 날씨가 추워서 생선 한 마리 구경할 수도 없고." 주인 여자는 밥상을 놓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겨우 양현이 말했다. "찬이 없어도 많이 드십시오." 보리 섞은 밥과 우거짓국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치 한 보시기, 계란 찐 것, 무를 채 썰어서 볶은 나물, 배가 잔뜩 고파 있던 두 사람에게는 성찬이었다. 도시에서는 아무리 후하게 돈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이런 점심을 사먹을 수는 없다. 추위가 어지간히 가셨을 터인데 수저를 드는 양현의 손은 떨고 있었다. 이들은 고장난 시계처럼, 시간이 아주 멎어버린 것처럼 건조하고 무거운 몸짓으로 밥을 먹는다. 반찬을 집고 상 위에 놓는 젓가락 소리는 마치 두 사람의 절망같이 울렸다. 영광은 수면 위로 다시 한번 떠올라 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발목에 납덩어리를 감은 듯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추웠지?" "네." 한참 있다가 다시 "배고팠지?" 하고 영광이 물었다. 양현은 밥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숙의 음식은 먹을 만해?" "부잣집이니까 잘해 먹어요." "하긴 그렇겠다." "오빠는요?" "나야 뭐, 어머니 음식 솜씨가 좋으니까... 식구래야 둘인데 뭐." "어머니가 어찌 생각하고 계실는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영광은 어머니가 양현을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동안 영광의 모친은 왜 양현이가 오지 않느냐면서 몇 번인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꼭 한마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 했는데." 혼잣말같이 뇌다가 제물에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한 적이 있었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 역정을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 수굿한 아들의 태도가 오히려 슬펐던지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나 어머니하고 함께 살면 안 돼요? 오빠." 돈암동 뒷산에서 한 말을 양현은 되풀이했다.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하자. 어서 먹어." "그건 무슨 뜻이에요?" "아무 뜻도 없어. 뜻이... 생각을 깊이 했다면 널 찾아왔겠어?" 양현은 들었던 숟가락을 상 위에 놨다. "오빠!" "..." "그러면 깊은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날 희롱하러 오신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양현은 떼를 쓰듯 말하고 상머리에서 물러나 앉는다. 영광은 성이 난 것처럼 쳐다보다가 쓰게 웃었다. "잘 알면서 왜 그래? 나는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어." "언제나 그랬어요. 오빠의 심장은 어디 있지요?" "양현이하고 같은 곳에." "그렇다면 그러진 못할 거예요." "내가 어쨌는데?" "뭔가를 언제나 말하지 않았어요." "나 감춘 건 없어. 자아 그만, 토라지지 말구 밥이나 먹어." "다 먹었어요." "그래?" 영광도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앗다. "양현아." "..." "오늘은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 행복한 날이야." "헤어지는 순간부터 불행해지는 거예요. 오빤 약속 같은 거 하지않지 않아요?" "..." "거 보세요. 말 못하지 않아요." "약속 같은 것... 그게 뭐에 필요해. 다만 마음에 진실이 있으면 되는 거야. 어떤 경우에도, 불행해졌을 때도." "아니예요! 아니예요! 오빤 이기주의예요. 왜 자신을 조금도 버리려 하지 않는 건가요?" 영광은 깜짝 놀라며 양현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양현이를 위해 그런다 하시겠지만 그건 방패며 구실이에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면서 양현의 입에서 그런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 그런 말 안 했어. 양현이 위해 그런다는 말." 하는데 밖에서 "상 내갈까요? 손님." 하고 말했다. "네, 그러세요." 영광이 대답했다. 주인 여자는 숭늉을 들고 들어왔다. "밥을 남기셨군요. 찬이 입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아닙니다.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참, 아주머니." "네." "인천 가는 기차 있습니까?" "있지요. 내려간 차가 좀 있으면 올 거예요." "지금 나가 기다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한 삼십 분쯤, 기적 소리 듣고 쫓아나가도 돼요." 여자는 나갔다. 양현과 영광은 서로가 서로의 눈길을 피하듯 시선을 딴 곳에 두었다가 한참 만에 "오빠." 하고 양현이 불렀다. "화 났지요?" "응." "저 말예요. 오빠하고 헤어지고 나면 언제나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럴까요? 그게 제 성격 탓일까요?" "그건 나 때문이겠지. 양현의 잘못은 아니야. 우리는 피차 그런 처지에 놓여 있어. 우리 둘이 다 확신이 없는 거야. 하여간 밖으로 나가자. 기차 놓쳐도 안 되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조그맣게 생긴 역으로 갔다. 기차표를 끊어놓고 기차 오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우리 아버지를 미워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어." 영광이 느닷없이 그런 말을 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생활을 외할아버지가 도맡아 하시는 데 대한 일종의 분노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나 어머니가 절대 복종이랄까, 어떤 어려운 경우에도 불평 한마디 하시지 않았던 그분들의 생애, 그게 백정이라는 신분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독선적이거나 억압했다는 얘기는 아니고... 하여간 내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어."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양현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또 자기 주변의 얘기를 처음 했기 때문에 분명 어떤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훌륭한 분이잖아요." "그것을 생각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일이었다." 영광은 외투 주머니 속에 손을 찌르고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양현은 미처 생각지 못했으나 영광이 부닥친 곳은 바로 시골로 가서 살자는 양현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시골에 가서 나는 뭘 하지? 날건달로 놀고 먹나? 양현의 말 때문에 심경이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부정적인 면을 건드렸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차가 피리 소리 같은 것을 내지르며 다가왔다. 두 사람은 기차에 올랐다. 분명 그랬다. 영광에게 그 말은 제동을 건 결과가 되었다. 목표도 희망도 없이 찾아온 인천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양현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찾아왔고 때문에 결과도 과정도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냥 뭔가에 내맡겨진 자신을 수습할 수 있게 한 것이 양현의 말이었던 것이다. 부친 송관수의 얘기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욕망만큼, 욕망이 강하면 강한 만큼, 그것을 자제하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힘이 상승하는 영광의 심리 상태. 그 미묘한 현상이 나타나는 탓도 물론 있었고 또 자제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양현이 의사 노릇을 하며 생활을 꾸려갈 그러한 정착은 그것이 도시이건 농촌이건 간에 영광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같은 관계는 사랑의 훼손으로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성격상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활의 능력이 충분한 양현은 그러나 생활의 현실을 모를 것이며 생활면에서는 부동적일 수밖에 없는 영광은 현실이 그 얼마나 가열한 것인지 노가다로 전전했던 동경생활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체득했지만 머리와 꼬랑지를 잘라먹고 한 얘기가 과연 양현에게 어느 만큼 전달이 되었는지, 그러나 영광은 더 이상 중언부언할 수가 없었다. 지난 가을, 돈암동에서 영광은 어떤 악마의 속삭임에 귀기울이듯, 양현이 온다는 편지를 받고 부랴부랴 모친을 시골로 내려보내면서 양현을 소유하기 위한 공작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일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뜻하지 않는 진행이었다. 갈 데까지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그의 광기로 말하자면 양현을 염전 창고 앞에, 바람 부는 곳에 눕힐 수도 있었다. 하물며 은밀한 방에서 단둘이 밤을 지샐 수도 있었지만 영광은 그 기회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역에서 양현은 감정을 억제하듯 우두커니 열차의 시간표만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헤어질 때 양현의 어깨에 흘러내린 자신의 목도리를 다시 여미어주면서 "편지할게." 달래듯 말했으나 영광은 양현을 범하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자신의 정열을 가로막는 그 수없는 장애물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럼 간다." 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찰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영광은 저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양현은 발끝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기차 안의 붉은 전등 밑에 영광은 넋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양현이는 왜 나더러 오빠라 하지? 영광오빠, 나는 양현의 오빠인가? 나이가 많아서 영광씨, 하고 부를 수는 없었겠지. 송선생, 하기에는 딴따라 주제에 과람하고, 어울리지도 않지. 희극적이야. 결국 오빠의 친구니까 오빠라... 양현의 상대는 어째 다 오빠인가! 최윤국이도 오빠다. 양현이는 오빠 아니 아무개 씨, 아니면 아무개 선생, 그런 남자한테 시집을 가야 한단 말이지? 아니면 처녀로 늙어 죽든가.' 얼토당토않은 바보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지껄이며 영광은 기차에 흔들리고 있었다. 경인선 열차, 창밖의 어둠이 짙어지고 따라서 차내의 색깔이 한결 밝고 붉어져 있었다. 어디메쯤 기차가 달리고 있는지 영광은 알지 못했다. 양현이 곁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양현의 존재는 내게 은혜인가 저주인가. 분명 양현에게 나는 어두운 미래다. 환국이 옳아, 옳고말구... 왜 나는 현실과 타협하고 살지 못했나. 현실과 타협하고 살려 했으면 혜숙이하고 나는 헤어지지 않았을 게다. 현실과 타협하고 살려 했으면 환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는 공부를 계속 했을 게야. 타협, 그것은 무엇이었지? 내게 타협할 여지를 주었던가? 사회가, 아, 아니야. 지랄 같은 내 성미 탓이지. 천민이면 천민답게 남의 눈치 보아가며 돌다리 두드리듯 살아갈 수도 있었는데 내 지랄 같은 성질 탓이지. 그럼 나는 무엇인가? 마음으로는 왕자같이 살고 싶었다 그거야? 한데 이상하지 않은가. 양현의 경우 나는 현실과 타협하고 있으니 말이야. 세속적, 사회적 규범을 나는 존중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맞은켠에 앉은 노인네가 힐끗 쳐다본다. 지팡이를 무릎 사이에 끼워놓고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앉은 노인네의 지저분하게 색바랜 수염, 코에 걸려 있는 연갈색 테가 마모된 듯한 안경, 그리고 노인네 옆에는 노인의 노처인 듯 안노인이 졸고 있었다. 입 언저리에 마마자국이 몇 개 있었다. 굵은 털실로 짠, 그러나 낡아버린 고동색 목도리를 안노인은 두르고 있었다. 목도리에 눈이 갔을 때 영광은 자기 목도리를 풀어서 양현의 목에 감아준 생각이 났다. 외투 속에 양현을 집어넣고 껴안으며 바람 부는 염전 사잇길을 걷던 광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얼어서 차디차게 된 양현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던 일도 생각났다. 무의식적으로 행한 그 행동들이, 일종의 놀라움으로 영광의 의식 속에서 선명히 되살아났다. 일찍이 단 한 번도 그와 같이 자상하게 사람을 대해본 적이 없었다. 무뚝뚝하게, 때론 충동적이었지만 냉소적이며 무관심한 그의 태도는 늘 여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부친은 물론, 심지어 어머니나 누이, 동생한테까지 다정한 정애를 거의 표시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영광은 외할아버지가 안아주었을 때 수염에 얼굴을 비비던 어릴 적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맞은편 노인의 색바랜 듯한 수염을 멍하니 바라보던 영광은 급히 담배를 눌러 끌고 눈을 감아버린다. 양현을 범하지 못했던 것은 그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영광은 깨닫는다. 서울역에 내린 그는 외투 주머니 속에 손을 찌른 채 어디로 갈까, 광장에 서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걷기 시작했다. 그가 간 곳은 악극단 사무실이 있는 뒷길, 다소 후미진 곳이었다. 이층 건물의 아래층은 치과의원이었고 이층이 악극단 사무실이었다.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치과의원 옆집은 부용이라는 찻집이었는데 그곳에서도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직은 초저녁이었다. 영광은 좁고 어두운 계단을 밝고 올라간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꽹꽹이 유인배가 책상을 모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난로에 석탄이 타고 있어서 실내는 춥지 않았다. "유선배, 웬일이십니까." 영광이 놀라며 물었다. "나보다 나일성 씨는 웬일이시우?" 술 안주로 콩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홀쭉했던 유인배 양 볼에 부승부승 수염이 돋아나서 보기에는 덜 홀쭉했다. 차림은 꾀죄죄했다. "어디 좀 갔다오는 길에 들러보았습니다." "올라오시우. 술 같이 합시다." 책상 네 개를 한곳에다 붙여놔서 꽤 넓은 자리였다. 술잔이며 술병, 김치, 멸치볶음을 담은 그릇 하며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려고 이래놨습니까?" "그렇소. 여편네가 달아났으니 집에 가나마나, 걷고 전차 타고 그게 귀찮아서 여기 있기로 했소." 유인배는 남의 얘기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말은 못들은 체하며 영광은 외투를 벗고 술판이 벌어진 책상 위에 올라가 앉는다. "술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돈 있으면 얼마든지, 시절이 이렇다고 술이 없겠소. 돈만 있으면 호랑이 눈썹도 구할 수 있소이다." 유인배는 맹물이 담겨 있는 커피잔을 들어서 난로를 향해 휙 물을 버린다. 물방울이 난로가에 굴러 떨어지면서 피시식!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김이 서린다. 유인배는 소주병을 기울여 커피잔에 술을 부었다. "드시우." "네." 영광은 천천히 술을 마신다. 타듯 창자를 타고 내려가는 술,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영광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느낌이 없는 듯 유인배와 함께 술을 즐기는 분위기에 젖어든다. "나일성 씨." "네." "어떻게 생각해보면 마음 편한 세상 아니오?" "글쎄올시다." "내일도 없고, 모레도 없고, 미래도 없고... 다만 오늘, 오늘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안 그렇소? 내가 한 말은 그런 뜻이오." 영광이 오기까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알 수 없지만 마누라가 달아난 비극의 주인공치고는 천하 태평, 유인배는 비스듬히 영광을 쳐다보며 "나일성 씨." 또 불렀다. "네." "당신 굉장히 할말이 많은 사람이야." "..." "한데 왜 말을 안 하는 거요?" 영광은 쓰게 웃는다. "사연이 많아. 마음속으로 만고풍상 다 겪었을 게야." "이런 직업 가진 사람들, 만고풍상 안 겪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도 않소." 유인배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단순하고 단조롭지." "그럴까요?" "별로 생각을 안 하거든." "..." "내 경우만 하더라도 그래요. 용이 못 된 이무기만 말씀이야." 그 말은 바이얼리니스트를 꿈꾸다가 경음악으로 빠져버린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정면대결 해보아야 뭐 나오는 것 있어? 피장파장인데, 갈 때가 되면 가는 거고, 올 때가 되면 오는 거고, 팔다리에서 힘을 빼버리고, 바다 위에 떠다니는 해파리같이 사는 거지 뭐. 나일성 씨, 안 그래요? 고민할 것 없어요. 내 말이 틀렸어요?" "아니오." "그럼, 아니고말고, 팔다리에 힘 주어봤자 뿌러지기 십상이지. 온갖 잡신들이 한낮에 한길을 활보하는 세상, 평범하게 저속하게 진담 반 농담 반 그렇게, 아암 그렇게 살아야지." 횡설수설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주거니받거니, 될 소리 안 될 소리 늘어놓으면서 술을 마시는데 술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나일성 씨." "네." "나 다녀올 테니까 가지 말구 기다리시우. 아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오." 자기 없는 새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두려워하듯 말하고 유인배는 엉금엉금 책상 위에서 내려갔다. 난로에 석탄 두어 삽 퍼서 넣고 나서 비틀거리며 나간다. 화장실에 가는가 싶었는데 얼마 후 나타났을 때 유인배는 술병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지요?" 영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긴? 보시다시피 술이지요. 망우리로 가는 이 술!" 술병을 쳐들어 보인다. "인생에 만일 술이 없었다면 그건 사막 사막이지, 안 그렇소? 나일성 씨." 유인배는 엉금엉금 책상 위로 기어 올라왔다. "술을 쌓아둔 창고라도 있었습니까?" "아암, 있지요." "...?" "그게 어딘고 하니, 바로 부용이다, 그 말씀이오." "아." 비로소 영광은 납득을 한다. 그러고 보니 커피잔이다. 김치보시기, 멸치볶음, 그런 것은 다 부용에서 올려보낸 것인 성싶었다. 부용이란 치과의원 옆에 붙어 있는 찻집 상호이자 동시에 그곳 주인 마담의 이름이었다. "부용이는 참 괜찮은 계집이오." 책상 위에 올라와 앉아서 술병을 따며 유인배는 느긋하게 말했다. "요조숙녀는 아니지만 그 계집이 자존심은 있거든. 그러나 내가 부용이를 좋아하는 것은 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소위 자유인이라는 그 점이오. 내일 땅이 꺼지는 한이 있어도 오늘 근심 없이 산다, 그 낙천적인 면도 좋고, 나일성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글쎄요. 그런 것 같더군요." "글쎄요? 그런 것 같더군요? 무관심이다 그 말씀이군. 부용이는 나일성 씨한테 결코 무관심이 아니던데?" 하며 술을 붓다 말고 "거 너무 재지 마슈. 사내자식이 좀 허랑한 데도 있고 듬직하게 받아주는 구석도 있어야지, 계집을 벌레 보듯 그래서야 쓰나. 배용자의 경우도 그렇지 않소? 따지고 보면 계집이 없는 세상도 사막이요 꽃 없는 나비, 무어에다 쓰겠소. 그것들 다아 우리 반쪽 아니겠소." "모르시는 말씀이오." "모르다니." 하고는 술을 마신다. "아 이상 더 어찌 허랑합니까?" "나일성 씨가 도덕군자 아닌 것쯤은 나도 알지. 그러나 여하튼 까다롭고 고약해." 화제에 오른 부용이라는 여자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의 전력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한때 이 악극단에 소속되었던 가수와 동서한 일이 있었고 그 가수가 병들어 죽은 후 부용이라는 찻집을 차려서 이 바닥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며 떠나지 않고 있었다. 찻집을 해서, 또 요즘 같은 시국에 떼돈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애당초 금전에는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았다. 남자 문제로 심심찮게 소문은 나돌았으나 성격이 좋다고나 할까, 웬만한 일에는 화를내는 법이 없었고 늘 분위기가 밝았다. 그리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보다 그에게 신세지는 사람이 많았으며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소위 하루살이, 그러니까 악단 사람들과도 죽이 맞아서 그 자신 한식구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나일성 씨도 아시다시피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이 바닥의 의식 수준이란 것이 그러하고 그런 거 아니오? 하지마는 나는 그런 게 좋소. 단순하고 솔직하고 원색적이며 적당히 센티멘틀 유치하고 또 저속하고, 철새같이 홀가분하며 가진 것 없고... 사실 뭐 별것도 아니면서 격조니 체통이니를 따지고 드는, 기름 때 손때 묻은 가전지물 같은 그곳이 내 태생인데, 그곳이 난 영 마음에 안 들어. 물론 그곳에서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그런 정도가 아니지만 말씀이야. 옛날 같았으면 거적에 말아서 떡을 치고 산에나 갖다 내버렸을 거구, 세상이 하 어지러우니 별의별 놈의 종자가 다 생겨나 집안 망신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손으로 멸치볶음, 멸치 꼬랑지 쪽을 살짝 집어서 입에 넣은 유인배는 하던 말을 계속한다. "체통이다, 격조다, 사람의 도리, 조상의 피 운운, 그 따위 말이나 생각들이 곰팡이 슬고 굳어버린 인절미같이, 흥! 저승길 따라가는 만장같이, 사라져가며 못 쓰게 된 그런 것들을 거머잡고 늘어진들, 뭘 어쩌다는 게지요? 도시 어쩌자는 게지요? 죽은 자식 고추 만지는 격이지. 안 그렇소? 나일성 씨. 흥! 전답 팔고 가산 날리며 기생방에 틀어박혀 술에 골망태가 되어도 망국의 한을 울부짖고 비분강개만 한다면 그것도 충절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상투쟁이들, 깡괭이만은 안 된다." 한숨 돌리듯 술을 마시고 나서 "그러니까 그게 뭐냐, 넌더리가 나는 그곳 물줄기를 타고 내려온 내 여편네. 그렇지, 그 여편네도 내게는 타인이다아, 거추장스런 존재다, 내 말은 그거요. 달아나기를 자알 했다, 흠... 전차를 타고 밤길을 걸어서 문패가 붙은 집 앞에까지 가서 문 열어라! 할 필요가 없고 동네 개들이 깡괭이를 비웃으며 짖어대는 소리 안 들어서 좋고, 무엇보다 대문 열어주면서 이웃 보기 망신스럽느니 창피스럽느니 하는 여편네 잔소리 안 듣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앓던 이 빠진 것만치 시원하고."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별 성의도 없이 영광이 물었다. "암, 아암, 진심이고 말고, 이 해방감!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게요. 한마디로 황홀하고 감미롭고 신이 나지. 나일성 씨 눈에는 내가 이러는 게 허세로 보여요? 허세로 보이느냐 말씀이오!" 술잔을 쳐들고 삿대질하듯, 하다가는 또 술을 마신다. "경험 안 해본 사람은 절대로 내 이 기분 몰라! 계집이란 친구같이 되어야. 술 친구가 되고 잠자리 친구가 되고 말벗이 되고 그래야지, 생애의 정열을 다 쏟아서 계집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 다 신파지 신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광은 혼잣말같이 뇌었다. 역시 무성의한 어투였다. "나일성 씨!" "네." "당신 보면 말이야, 뒷간에 가서 볼일 다 못보고 나온 사람같이, 왜 그래요? 늘 엉거주춤, 아니면 관심 없다, 그런 식이고, 남의 일은 다 같잖게 뵌다 그거야?" 사실 영광은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심정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그랬었지만 오늘밤 영광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진흙창에 들어왔으면 몸에 흙도 묻혀야 하고 뒹굴기도 해야지, 턱없이 건방지다 말씀이야. 밸이 틀려서 못 견디겠구먼." 건성으로 남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한 영광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술에 취했고 이일 저일 심기가 불편하여 저도 모르게 그러는지 유인배는 노골적으로 시비 걸 듯 말했다. "제가 선배님을 불쾌하게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저는 이곳을 진흙창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일성 씨 당신은 이 바닥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어. 나만은 다르다, 너희들하고는 다르다, 물론 다르겠지. 잘났으니까 말씀이야." 영광은 쓰게 웃는다. "도무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언제든 떠날 수 있게 그런 몸가짐으로, 비록 경음악이나마 당신은 대단한 재질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열은커녕 자기 자신의 음악까지 경멸하고 있단 말씀이야." 처음으로 영광의 표정이 흔들렸다. 놀란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장이 너무나 철저해. 나는 진작부터 그걸 느꼈어. 이 사람한테는 깊은 사연이 있다, 이곳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이다, 마치 숨어 있는 중죄인같이. 도대체 나일성 씨, 당신은 어디서 왔지?" 산간 마을 강가라는 말에는 백정이 날가죽을 무두질하는 강가라는 의미가 들어있었다. 영광은 술 한 잔을 입 속에 털어넣고 허허헛 허허! 하며 흐느끼듯 힘없이 웃었다. "나일성 씨 눈에는 살기가 있어. 어떤 때는 푸른 칼날이 휘번득이고." 내친 길, 되돌려지지 않았는지 유인배 말의 강도는 강해졌다. "아마 근본이 그래서 그런가 보지요." 웃다가 영광은 타는 듯한 눈빛으로 유인배를 쳐다본다. 순간 유인배는 부르르 떨었다. 술이 확 깨는 그런 표정이었다. 영광도 그 순간 자신의 머리가 불덩이로 변한 것을 느꼈다. "아, 이거 참." 유인배는 고개를 흔들었다. 취기를 털어내려는 듯 "이거 참, 이건 내 주의 주장이 아니지. 나일성 씨, 내 실례가 많았소." 어느새 영광의 눈에는 그 불길이 사그라들고 없었다. 다만 허공 같은 것이 있었을 뿐이다. 그는 몸을 움직이려다 말고 "아." 낮게 소리쳤다. "왜, 왜 그러는 거요?" "다리가." "다리가?" "시큰했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나일성 씨." "..." "언짢게 생각지 마시오. 나 그리 나쁜 놈 아니오." "압니다." "일종의 동류 의식이었을 게요. 용으로 승천하려다 이무기가 돼버린, 동병상련인지, 아 아니 그게 아니오. 다만 나는 당신의 특이한 면이 궁금했는지 모르지. 자 술이나 합시다." 유인배는 흐릿한 눈빛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의외로 감상적인 유인배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영광도 술잔을 들었다. 두 사내는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자니 거듭하여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난로에서는 석탄이 타고 있었지만 그러나 화력은 줄어들고 있었다. '내려가서 석탄을 넣어야지. 석탄을 넣어야 해.' 영광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도 중얼거렸다. 그러나 선뜻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이제 괜찮다고 하기는 했으나 다리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몸은 한없는 나락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염전이 있는 그 마을길에서 신나게 웃다가 영광은 여태까지 이렇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고 양현에게 말했지만 동경서 몸을 다친 후 영광은 오늘같이 뛰고 달리고, 그렇게 많이 걸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다리에 동티가 나기는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집까지 갈 수 있을까?' 가게가 달려 있는 그 시골집 방에서도 다리가 시큰했는데, 다리는 계속해서 아팠는지 모른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마침 문을 열고 여자가 들어왔다. 차반에 냄비를 받쳐들고 들어온 여자는 부용이였다. 회색 몸빼에다가 짙푸른, 아주 색깔이 세련된 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날씨 굉장하네요. 아아 추워." 부용이는 양 어깨를 움츠리며 떠는 시늉을 했다. "그게 뭐야." 알면서 유인배가 물었다. "두부찌개예요." 책상 위의 허섭쓰레기 같은 김치보시기 멸치볶음 그런 것을 밀어내고 찌개냄비를 놓은 부용은 얼굴을 들면서 영광은 향해 눈인사를 했다. 쌍꺼풀이 진 눈이 컸다. 눈만이 아니었다. 도토름한 입도 컸고 콧날도 오똑한 편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작았다. 몸집도 자그마했으며 그 자태에는 어딘지 모르게 연연한 것이 있었다. "뜨거운 국물이라도 마셔가면서 술을 해야지. 속 버려요." "흥, 말이 좋아 불로초다." 유인배가 빈정거리니까 "왜요? 어디가 또 아프신가요?" 부용이 응수했다. "누가 그 속을 모를까 봐서? 훤히 들여다보인다." "아이 참." 부용은 웃었다. "내가 술 가지러 갔을 때, 그때 말이야. 나일성 씨가 와 있다는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 두부찌개가 이층까지 행차를 했겠는가, 할말 있으면 해보시지 그래." "그래요, 그래요. 속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하여간 인사는 그쪽에다 해야겠구먼. 나일성 씨 고맙소. 다 당신 덕분에 집 없는 들개가 이 추운 밤에 따근따근한 국물 맛이라도 천신하게 됐으니 말씀이야." 그러나 말에 가시는 들어 있지 않았다. 영광은 쑥스럽게 웃었다. "엄살도 보통 엄살이 아니네요. 아 글세, 부인이 잠시 동안 집 비웠다고 사방팔방 만나는 사람마다 마누라가 달아났다, 나발을 불어야 해요? 한두 번이라야 속아주지. 안 그래요? 나일성 씨." 부용은 영광에게 동의를 구하듯 쳐다본다. 영광은 뜨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은 몇 해 전에, 만취한 영광은 부용과 밤을 함께 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화류계의 여자들하고는 약간 달라서 술이 깨었을 때 영광은 몹시 꺼림칙했는데 본래 사람이나 애정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 담박한 성미여서 그랬던지, 불장난이라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랬던지, 하여간 부용은 조금도 영광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도 그랬고 단둘이 마주쳤을 때도 애상적인 그런 눈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집을 비웠다구? 아니야. 달아난 거라구." 유인배 말에 부용은 어이없어하며 "친정으로 말이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다가 항상 돌아오지 않았어요? 얼마나 속을 썩였으며 그랬을까?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안니 숫제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시끄러!" "해방됐다! 자유다, 하시면서 속마음은 안 그런 모양이지요?" "나불거리지 말고 난로에 석탄이나 넣어." "네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상감마마." 부용은 난로에다 한 삽 두 삽, 석탄을 넣는다. "그리고 라디오도 좀 켜봐." "뭐어? 이 양반이 날 부인으로 착각하는 거 아니예요?" "아아, 그 뭐냐 그런게 아니고." 유인배는 약간 당황하며 팔을 내저었다. "책상에 올라와 있으니 한번 내려가는 것이 힘들어서 그래. 그러지 말고, 부용씨 나 설탕 구해다 줄게, 미안해." "대본영 발표, 그딴 것 들어서 뭘 해요?" 그러나 부용은 라디오의 스위치를 돌렸다. 그러나 대본영 발표 그 따위 것은 아니었고 일기예보를 방송하고 있었다. 내일 아핌은 기온이 영하 이십사도까지 내려갈 것이라는 예보였다. "더 들으시겠어요?" "꺼." 부용은 의자 하나를 끌고 와서 책상머리에 놓고 앉았다. 두 사내는 마치 누각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고 부용이는 누각 밑에서 올려다보는 형세다. 턱을 쳐들어야 남자들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영하 이십사도까지 내려간다니... 어서 겨울이 갔으면 좋겠어요. 유선생님." "왜 불러." "나한테는 술 한잔 안 주실 거예요?" 말하면서 부용은 찌개냄비와 함께 올려온 작은 술잔을 차반에서 제 앞으로 옮겨 놓는다. 유인배는 잠자코 술을 부어준다. 그러고 나서 "형무소에 있는 사람이 큰일이구먼." 하고 불쑥 말했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들어갔습니까?" 영광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라기보다 내 육촌형님인데 예방구금령에 걸렸어요." "사상범이군요." "전에, 그러니까 계명회 사건에 관련됐지요." "계명회라구요?" "나일성 씨도 아시오?" "알지요." 영광은 환국의 부친 김길상을 생각했다. 김길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세상 떠난 부친을 연상하는 일이었다. "유인성이라구, 내 육촌형님인데." 유인배는 갑자기 어세를 낮추면서 말했다. "나는 그 형님을 존경합니다. 문중에서 다 나를 내쳤지만, 친형제도 내게 등을 돌렸지만 인성형님만은 그러질 않았소. 엄격하고 대쪽같은 성품인데 의외로 편견이 없어요. 하여간 그 집 꼴이 말이 아닌데 찾아가볼 수도 없고,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여자 하나 잘못 만나게 되면... 원래 인격자라 성품이 덜 된 마누라를 타이르고 위하며 사신 분인데 저렇게 되고 보니,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어놨어요." 유인배는 영광에게 친밀감을 나타내었다. "계명회 사건으로 복역했던 분이 내 친구의 부친이었소. 이번에도 들어갔지요." "누군데!" "김길상이라구, 아마 호적상으로는 최길상으로 돼 있는 모양이더군요." "알아요! 만나뵌 일은 없지만 그 사건의 주모자였지요 아마." 영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용도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사태를 질질 끌고 간다면 그분들 살아 나올 가망이 없어요." "..." "날씨라도 부조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상 참 더럽지. 어떤 사람은 형무소 마룻바닥에서 이 겨울을 나는데, 어떤 놈은 전선, 왜놈 군대 위문공연을 하러 다녀야 하고." "악기나 목소리에 무슨 죄가 있겠어요. 왜놈의 스파이가 되어 제 동족을 감옥에 보내는 사람도 있는데." 부용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때 부용의 얼굴은 아주 험악했다. 그 격렬한 태도가 이상했던지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라도 있단 말이오?" 유인배는 저도 모르게 부용한테 경어를 쓰고 있었다. "그런 거는 아니지만... 배용자가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하고 엉뚱한 말을 했다. "뭐?: 배용자가 병원에 입원을 해?" 이야기가 확 꺾이는 바람에 유인배나 영광도 어리둥절한다. "네, 골절이래요." "어디가?" "다리요." "어떻게 알았지?" "나하고 함께 가다가 그 봉변을 당했거든요." "봉변이라면?" "남도 아닌 용자의 친언니한테 당한 거지요." "친언니라면 배설잔데? 무슨 얘긴지 도통 모르겠다." "나도 깊은 내막은 모르지만 나하고 용자가 덕수궁 돌담 옆을 지나가는데 그 언니라는 배설자를 만났지 뭐예요?" "그래서?" "다짜고짜 욕설을 하면서 용자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때리는 거예요. 그리고 한다는 말이 네년이 집을 가르쳐주었지, 그리고 또 네년도 감옥에 가서 썩어야 정신이 들 게다, 가슴을 와락와락 흔들다가 떠밀었어요. 얼음판에 나자빠졌지 뭡니까. 그대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에요." "거 배설자라는 계집, 질이 안 좋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 자매간에 무슨 일이 있어 그랬을까?" "마귀같이 생겼대요. 머리칼을 감아쥐는 손가락이며 팔이 꼭 뱀같이 보였어요. 정말 꿈에 볼까 겁나요." "그 계집, 일본의 첩자라는 소문도 있어. 하여간 남자 여자 접근 안 하는게 상수야." 일본의 첩자라는 유인배의 말에 부용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고, 왜놈의 스파이가 되어 제 동족을 감옥에 보내는 사람도 있다, 조금 전에 한 말만 하더라도 배설자를 지목하고서 뇌까린 것 같았다. "유선생님은 용자 언니에 대한 얘길 뉘한테는 들으셨어요?" "음, 그게 그러니까 내 육촌누님인데, 인성현님의 누이동생." 누이동생이라는 데서 유인배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는 유인성의 누이이자 유인경의 동생인 인실의 얼굴은 떠올렸던 것이다. "그 누님은 원래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인데, 배설자가 한때 누님 이웃에 살았다 하더군. 그 무렵 인경이누님은 시부모가 모두 세상을 떴고 집안이 적적했던 참이라 혼자 사는 배설자를, 그것도 독립 운동을 하다가 중국에서 부친이 죽었다, 해서 동정을 했던 모양이야. 왜, 그 배용자도 그런 말 하고 다녔잖아? 중국에서 아버지가 독립 운동을 했느니 어쩌니." "그랬지요." "독립운동을 했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였던 모양인데, 배용자는 그냥 언니가 하는 대로 말했는지 모르지. 성질이 고약하구 푼수 없이 콧대가 높아 그렇지 단순하고, 사악한 여자는 아니지 않아?" 부용이는 영광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제가 보기에도... 용자는 의도적으로 거짓말한 것 같지는 않아요. 다소 허풍떠는 버릇은 있지만." "하여간 사정은 그랬고 배설자는 목적이 있어서 접근해왔겠지만 누님이 피해 본 거는 별로 없다 하더군. 다만 그 집을 드나들던 누님의 친구가 된통 당한 거야. 혹 나일성 씨는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권오송이라고 극작간데." "나는 모릅니다." 다리의 통증 때문에 영광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였던지 술자리에서 유인배가 배용자의 언니 배설자에 관해 얘기한 것은 영광이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튼 누님의 친구는 그 권오송 씨 부인이었는데 감정적인 데다가 서둘러대는 성미라 남편까지 동원하여 배설자를 도와주었다 하더군. 말하자면 무용발표횐가 뭔가를 후원해서 무용에다가 그놈의 가짜인지 가짜인지 그것을 붙이게끔 해주었다는 게야. 그런데 그 행실 나쁜 계집이 권오송 씨 유혹하려다가 그게 먹혀들어가지 않으니까 원한을 품었고 그 복수심 강한 계집은 벼르고 기다렸던 모양이라. 지금 권오송 씨는 형무소에 수감돼 있어." "무슨 죄목으로요?" 영광이 물었다. "죄목이야 붙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있지요. 반전 반일을 선동한 죄, 뭐 그런 거 아니겠소? 권오송 씨는 그런 올가미 씌우는 것을 경계하며 진작부터 낙향을 했는데 이미 배설자에게 찍혔으니 어쩌겠수? 그를 시골에서 불러올리는 데 배설자의 강한 입김이 있었다는 겁니다." "배설자라는 그 여자의 지위가 그리 대단한가요?" 영광이 또 물었다. "배설자의 지위가 대단하기보다 동서하고 있는 일본인이 그 바닥에서는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고 원래 배설자는 그놈의 끄나풀이라 하더구먼." "음..." "서울로 끌려온 권오송 씨에게 전쟁을 찬양하고 승리를 기약하는 연극 대본을 써라, 일은 그렇게 되었는데 결국 응하지 않으니까 집어넣은 것 아니겠소? 배설자가 노린 것도 바로 그거였을 게요. 세상이란 참, 요지경, 요지경이오. 한때는 권오송 씨 적들이 그 사람을 변절자로 몰았고 동지를 팔아먹은 배신자로 낙인 찍은 일이 있었지요. 과년에서 돈을 받아 잡지를 하느니, 극단을 운영하느니 하고, 이원진과 가깝다는 것이 그 혐의의 발상이었지요. 그때 인성형님하고, 서의돈이라고 굉장한 걸물이 있어요. 그 두 사람이 들어서 불길을 잡아주었지요. 내가 요지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무렵, 권오송을 매도하던 무리들은 정세가 험악해지면서 거의 대부분 전향을 하고 일본에 빌붙어 진충보국을 맹세했는데 변절자, 민족 반역자로 몰렸던 권오송 씨는 형무소에 들어가 있으니 말입니다. 참말로 웃기는 세상 아닌가요? 인간이란 도대체 몇 겹의 인두겁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해결해주는 거 아닐까요?" 부용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부용이 거듭 말했다. 다소 놀란 듯 유인배는 부용을 내려다보다가 "그런 똑똑한 말 할 줄은 몰랐다." "그러면, 유선생님은 여직까지 저를 백치로 아셨어요?" 하면서 부용은 젓가락 끝으로 유인배의 무릎을 찔렀다. "그렇지는 않지만 남자를 꽤나 좋아하는 여자로만 알았지." "너무 심한데요?" 부용은 빤히 올려다본다. "양해 사항인데 뭘 그래." "성질대로 하자면 얼굴에 술잔이라도 던지고 싶지만 말은 살을 파고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형무소에 끌어들일 그럴 내용도 아니니까, 유선생이 섭섭 그러는 거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섭섭해 할 거 뭐 있누." "제가 한 번도 유선생을 유혹한 일이 없었잖아요." "이쿠." 유인배는 손바닥을 자기 이마를 탁 쳤다. "유선배 오늘은 여러 번 당합니다?" 영광이 웃었다. "부인이 친정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공연히 저한테 분풀이하는 거예요. 진득이 참고 기다려면 돌아올 건데 저 호들갑이지 뭡니까?" "뭐, 어째? 말 다 했어?" 부용은 까르르 웃었다. "다 안 했지만 관둘게요. 대신 설탕 구해준다 하셨지요? 그건 약속이니 꼭 지켜야 해요." "알게 뭐람. 그보다 시간이 늦었는데 나일성 씨, 집에 가기는 틀린 일이오." "늦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다리가, 가게 안 돼 있습니다." "그러나 밤을 지샐 수도 없고, 여기서는 두 사람이 잘 수도 없어요. 부용이한테 신세져야겠수." "그렇게라도 해야겠습니다. 우선 다리에 찜질부터 해야겠는데." 영광은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찜질해 드릴께요." 부용이 얼른 말했다. "부용이는 좋겠다." 유인배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감아 보인다. "대신 난로에 석탄 넣는 것 잊지 말구, 알았어?"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했으나 부용은 유인배가 생각한 것만큼 기뻐하거나 수줍어하지 않았다. 부용에게 의지하며 계단을 내려온 영광은 가까스로 찻집 부용으로 들어갔다. 텅 빈 홀에는 냉기가 돌았다. 난로가 꺼진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많지도 않은 손님들은 벌써 돌아갔을 테고 주방일, 차 나라는 일을 겸해 하고 있는 은이엄마도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하기야 뭐 비워놨다고 도둑이 들 시절도 아니고 도둑맞을 만한 것도 없었지만. 부용은 영광을 부축하여 홀 뒤켠에 있는 작은 자기 방으로 데려가서 자리를 깔고 누인다. "미안해 어쩌지?" "걱정 마세요. 곧 찜질해드릴 테니까요." 부용은 부엌인지 어딘지를 나가더니 한참 만에 더운 물과 수건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새 영광은 피곤한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부용은 영광의 바지를 벗기고 무릎 전후에 더운 수건을 올려놓는다. 영광은 잠시 실눈을 뜨고 보다가 더욱더 깊은 잠에 빠지는 것 같아TEk. 부용은 수건을 갈아내고 뜨거운 것을 다리에 올려놓곤 하면서 하염없이 사내 얼굴을 바라본다. '저렇게 생겨가지고 어찌 운명이 순탄하겠어.' 부용은 점쟁이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잠든 영광의 모습은 속세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두운 그늘, 지친 듯 창백한 낯빛, 이따금 눈 밑에 이는 경련까지,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남자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통곡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부용은 자신도 통곡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치감이었는데 한편 멀고도 먼 곳으로 사라지는 울음 같기도 했다. '어느 여인이 이 남자를 낳았을까! 왜 이 남자는 항상 영혼을 닫아놓고 있을까?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 왔을까? 여자를 품을 때도 나일성 씨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어.' 식은 수건을 들어내고 더운 물에 적신 수건을 올려놓은 뒤 부용은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와 더운 물을 떠왔다. "양현아! 그러지 마! 그, 그러지 마! 안 돼!" 방에 들어섰을 때 영광은 잠결 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다리가 아팠던지 신음하며 돌아누웠다 밤은 조용 조용히 깊어갔고 두 시가 지났을 때는 다시 밤은 조금씩 조금씩 아침을 향해 기어가는 듯 느껴졌다. '양현이? 양현이가 누굴까? 양현이... 그러지 마! 안 돼?" 부용은 두 무릎을 안고 웅크리며 눈만 치뜨고 영광의 옆모습을 내려다본다. '아무도, 어떤 여자도 이 남자하고 살 수 없을 거야. 그건 틀림없는 일일 거야.' 좁은 방이었다. 영광이 옆에 부용이 드러누우면 가득 차버리는 그런 방이었다. 벽에는 옷가지가 커튼처럼 주렁주렁 늘어져 있었다. 세 시가 지났을 때쯤, 부용의 눈꺼풀도 무겁게 아래로 내려왔고 찜질도 그만둔 상태였다. 영광이 눈을 비비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대답 대신 부용은 식어버린 물수건을 들어내고 이불자락을 당겨 영광의 아랫도리를 덮어준다. "다리는 좀 어떠세요?" 그럴 필요도 없는데 부용은 어색하게 이불을 다독거리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한결 가벼워진 것 같소." "찜질은 더 안 해도 괜찮겠지요?" "괜찮소." "그럼 주무세요. 날 새려면 아직이에요." "부용씨는 안 잘 거요?" "제 걱정은 마시구요. 세 시가 좀 넘었나 봐요." 부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 옆에 와서 누워요." 하고 영광이 말했다. 위로하듯 아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옆에 가서 누우나마나 눕게 된다면 바로 옆이며 자연 몸은 밀착하게 돼 있었다. "자아." 팔을 잡아끈다. "잠깐만요." 부용은 걷어올린 머리를 지탱하게 하는 핀을 풀었다. 검은 머리가 양 어깨에 쏟아져내리며 흩어졌다. 천천히 털 재킷을 벗고 몸빼도 양말도 벗었다. 하얀 속치마에 연두색, 하늘거리는 새틴 브라우스의 모습은 사치스러우면서 정감적으로 보였다. 팔을 뻗어 전등을 끈다. 찻집 홀과 반대 방향 벽면에 나 있는 작은 창문 유리창이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부용은 등을 돌리며 영광이 옆에 눕는다. 영광은 여자의 몸을 돌려놓고 그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쉰다. 부용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세차게 어지럽게 뛰고 있었다. 입술을 찾아 열광적으로 입맞추며 영광은 고향을 그리워하듯 가슴을 더듬는다. 남자와 여자, 원초적 남자와 여자의 행위를 검은 면사포를 쓴 여신같이 어둠은 지켜보고 있었다. 지구상 시간은 정지하고 있었다. 절정을 넘어섰을 때 갑자기 시간은 되살아나서 똑딱거리며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게 했다. 다만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레일을 넘어가는 기차바퀴처럼 시간은 순간을 밀어내고 있었다. 감아놓은 태엽이 풀리어 나가듯, 눈금 하나하나가 사라져가듯, 권태스런 일상이, 세월이... 영광은 한숨을 삼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불 좀 켜봐요." 영광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용은 휘청거리듯 일어서서 전등을 켰다. 영광은 시계를 들여다본다. 순간 부용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그늘이 지나갔다. 삶의 허망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마지막까지 혼자 떠나야 하는 사람의 운명에, 한순간 불꽃 같은 환상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감을 더했을 뿐이다. "아직, 통행 금지가 해제되려면 한참 있어야 할 거예요." "..." "좀 기다렸다 가셔야 할 거예요." "물 좀 주겠소?" "예." 따뜻하게 데운 보리차를 부용이 가져왔을 때 이부자리는 아랫목에 밀어붙여 놨고 영광은 바지랑 윗도리를 다 챙겨 입고 떠날 사람 같이 앉아 있었다. "드세요." 물그릇을 내민다. "음." 물그릇을 받아 바닥이 나게 마신 영광은 천천히 담배를 찾아서 붙여문다. 부용이 재떨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타인같이 나그네 같이 떠나게 될 사내의 얼굴을 덤덤히 바라본다. "정말 다리는 괜찮은 거예요?" "괜찮소."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요?" "그런 모양이오." 건성으로 대꾸하며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사이로 흐려지기도 하는 부용을 바라본다. "부용씨는." "그 씨는 좀 빼줄 수 없나요?" "..." "정말 인색하네요. 좀 가슴이 넓어도 되는데, 발가벗고서 격식 차려 인사하는 것 같네요." 부용의 말은 신랄했다. 영광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순순히 어투는 바꾸었다. "부용이는 이 바닥을 왜 떠나지 않고 있지?" "갈 곳이 있어야 떠나지요." "이곳이 좋아서 그런 거는 아니구?" "정도 들었겠지요." "그럼 앞으로도 안 떠날 거요?" "그냥 있는 거지요 뭐. 떠난다, 안 떠난다,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어요." "음... 부용이는 어디서 왔지?" "그건 물어서 뭣하시게요?" "하긴 그래." 아까 영광이 잠들었을 때 부용도 마음속으로 뇌어본 말이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 왔을까 하고. "나일성 씨는 어디서 왔지요?" 역습하듯 부용이 물었다. "그런 것 물어서 뭣하게?" 부용과 같은 대답을 하고 나서 영광은 픽 웃었다. 부용도 피시시 웃었다. "어디로 멀리 가볼 생각 없어?" "어디루요? 시베리아? 사하라 사막?" "만주 같은 곳에." "그건 또 왜 그러지요?" 커다란 눈동자에 의혹이 잔뜩 실린다. "별 이유는 없고 내년, 북지 위문 공연 때, 나 만주에서 떨어질까 싶어서." "그럼 저더러 동행하자 그 말씀인가요 ?" "굳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영광의 얼굴에 막연해하는 빛이 떠돌았다. "그때는 애인과 함께 가야지요." "...?" "양현이가 누구예요?" "뭐라구!" 얼굴빛이 확 변한다. "꿈속에서 부르던 이름이지 않아요? 그런 곳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인걸..." "네? 나일성 씨한테 아이가 있었어요?" 부용이 깜짝 놀란다. "내 아이는 아니지만 어려. 아주 어려." 하다가 영광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왜 웃는지 부용이도 몰랐고 영광이 자신도 알 수 없는, 흐느끼듯 웃었다. 연 신 웃으며 영광은 일어섰다. 겨우 웃음을 멈추며 "나 이층에 가 있겠어. 외투도 거기 있구." 하고 말했다. "그럭허세요. 해장국 끓여 갈게요." 영광은 이층으로 올라왔다. 방안이 썰렁했다. 곯아떨어진 줄만 알았던 유인배가 "신방 잘 치르었소?" 하고 말을 걸었다. 그는 책상 위에 담요를 쓰고 앉아 있었다. "아니! 여태 안 주무셨습니까?" "조금 전에, 추워서 잠이 깼어요. 지금 난로에다 불을 피우느냐 마느냐 생각중이오." "따뜻한 방에서 잔 죄로 제가 피우지요." 영광은 신문지를 모아서 꾸겨가며 난로에 넣고 난롯가에 굴러 있는 나무토막도 던져넣고 불을 피운다. 나무토막에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보고 석탄을 몇 삽 퍼넣는다. "부용씨가 해장국 끓여 온다 했으니 춥더라도 좀 참으시오." 영광은 벗어놨던 외투를 걸치며 책상 위로 올라가지는 않고 걸터 앉는다. "어젯밤에는 될 소리 안 될 소리 많이 지껄였지요?" 유인배가 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될 소리 안 될 소리는 아니었지만 유선배한테도 감상이 남아 있더군요." "감상이라구요? 하하핫 하핫... 핫 나 원래가 그래요. 해서 용이 못 되고 이무기가 된 거지." "아무나가 용이 되겠습니까? 용이 된들 뭘 합니까." "그래요. 옳은 말이오. 따뜻한 방에서 잔 나일성 씨나 밤새 꽁꽁 언 이 유인배나 다 같이 아침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오. 그나저나 다리는 좀 어떻소? 괜찮소?"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찜질한 덕분에 걸을 만합니다." "그렇군. 역시 일기가 차면 통증이 도지는 모양이지요?" "...?" "누구한테선가 들었어요. 나일성 씨 다리는 후천적으로 그리 됐다는 얘길." "자업자득이지요. 죽었든가, 이리 되지 말아야 했든가." 드물게 영광은 마음을 열어주듯 말했다. 그것을 느낀 듯 유인배는 형님이나 된 듯 자상하게 "그래도 죽는 것보담이야 사는 게 낫지. 인생은 사는 데 뜻이 있는 거요. 부귀영화야 말로 꿈이오." "실패한 사람의 자기 위안 아닌가요?" "나는 가끔 거지가 부러울 때가 있소. 그들은 자유인이니까." "정말 자유인일까요?" "아암, 자유인이지요. 그들에게는 집착할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한끼 걱정만 하면 되니까." "그것은 유선배가 그런 처지에 있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지요. 본인들은 결코 자유인이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간혹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아 아니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건이 달라진믄 것은 아 니지 않소. 그들은 가진 자보다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무 형 유형으로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유는 저당잡히게 마련 이니까, 내 얘기가 틀렸단 말인가요?" "그래도 모든 사람은 유형 무형 많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습 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미망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하지." "하면은 유선배께서 목하, 연습을 하고 께시다 그 말입니까? 담 요 쓰고 추운 방에서." "나는 틀렸어요. 그게 안 되거든. 최후의 줄을 놓아버릴 용기가 없어요." "오늘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집으로..."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유인배도 그 생각을 했던지 "못난 여편네." 하며중얼거렸다. 영광은 부용이가 끓여 온 해장국을 유인배와 함께 먹고 통금이 캄캄한 거리에 나왔다. 사방은 어두웠다. 도시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 있지 않은 것 같았고 환하게 전등을 밝히고 종을 땡땡 치며 지나가는 전차 안에도 승객은 거의 없었다. 담배를 꺼내어 물고 바람을 맞으며 담뱃불을 붙이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슴에다가 불을 댕가리라도 한 듯 환국에 대한 그리움이 영광이 마음에 치솟았다. 그를 만나지 못한 지가 벌써 석 달 가까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도 지금 힘들 거야.' 걸음을 옮긴다. 아픈 다리가 거뜬하고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걸을 만은 했다. 그러나 한겨울의 새벽 바람보다 영광의 가슴을 매섭게 에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전차를 타고, 쓸러놓은 듯 사람 없는 거리, 헐벗은 가로수, 굳게 문을 닫은 건물들을 내다본다. 그러나 영광의 속의 풍경은 그 끝없는 염전, 끝간데 없이 이어졌을 바다를 아득한 곳에 둔 그 염전 풍경이었다. 돈암동 종점에서 영광은 내렸다. 거리는 연옥색 안개에 묻혀 있었다. 그 안개 속에 오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도 눈에 띄었다. '환국이한테 가볼까?' 이미 혜화동을 지나왔는데 영광은 중얼거렸다. 만나러 갈 수 없었다. 그와의 우정이 끝났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스스럼없이 찾아갈 수 없었다. 왜 하필 이런 아침에 그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가, 영광은 그 생각을 하며 골목을 지나서 집 앞에 이르렀다. "어머니." 낮은 목소리로 부르며 살그머니 대문을 흔든다. 그 순간 방문 여는 소리, 발짝 소리, 대문의 빗장 푸는 소리, 영선네가 얼굴을 내밀었다. 손목에는 염주를 걸고 있었다. 옷매무시는 단정했고, 그는 대문 흔드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순한 양과 같이 심약해진 것 같은 영광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던 영선네는 "아니다, 좀 일찍 일어났다." 대답을 하면서도 얼굴을 피하는 영광을 계속해 쳐다본다. 집 안으로 들어간 영광은 자기 거처방으로 곧장 들어갔고 영선네는 우두커니 마루에 선 채, 거부하는 것과도 같이 닫혀진 아들 방의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염주를 팔에서 벗겨 안방에 놔두고 부엌으로 내려간다. 자랄 때부터 그랬었다. 영광은 아들이기보다 어렵고 힘들었으며 두려운 존재였다. 어렵고 두려웠다는 것은, 그것은 숭배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 감정은 맹목적이며 신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영선이나 막내 영구는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영선네에게는 그냥 딸이며 아들이었으나 영광은 그렇지 않았다. 부산에 있을 때, 혜숙의 어머니가 쳐들어와서 백정의 자식이 어디 감히 남의 집 귀한 딸 자식을 넘보느냐, 하며 갖은 수모를 가하고 떠났을 때, 영선네는 내 잘난 아들! 하며 울었다. 영선네의 그 숭배감 속에는 깊은 죄의식이 있었다. 백정의 피를 물려준 죄의식이었다. 그것은 결코 영선네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으며 그 또한 피해자였건만 그것을 운명적인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고 오로지 자기 탓으로만 치부하는 영선네였다. 좌절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진주에서 농청과 형평사 운동이 크게 충돌했을 무렵, 학부형들 압력에 못 이겨 영광이 보통학교에서 쫓겨났고 그 길로 부산으로 가게 되었을 때도 그랬었고 중학교에서도 연애편지 정도면 근신이나 정학 정도로 그칠 일이었는데 혜숙이 집에서의 강경한 항의로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영선네는 세상에서 숨어 사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잘난 내 아들을 위하여 아주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절에 다니면서 열렬하게 부처님한테 귀의하지 않았던들, 영선네는 죽었을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무슨 죄졌습니까? 우리가 남한테 무슨 몹쓸 짓이라도 했습니까? 왜 세상을 그렇게 두려워하십니까.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언젠가 영광은 그런 말을 했다. "기운 좀 내십시오. 화도 내고 악도 쓰고 남들같이 좀 그래보십시오. 장바닥에서 생선 파는 아지매와 같이 시비도 걸고 억지도 쓰고, 왜 그리 노상 움츠리고만 계십니까." 그런 말도 했다. '자아가 전과 같지 않다. 어디 몸이 아픈 거는 아닐까?' 영선네는 쌀을 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닌게아니라 영광은 요즈막에 와서 많이 수척해졌다. 방에서 나오는 기척이 있었다. 영광은 수돗가에 가서 냉수로 얼굴을 씻는 모양이었다. 영선네는 바가지로 솥의 더운 물을 얼른 펐으나 들고 나가지를 못한다. 청하지도 않았지만 이미 영광은 세수를 끝낸 듯 들고 나온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제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밥을 안쳐놓고 부뚜막에 걸터앉아 파를 다듬으며 영선네는 또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몸이 성찮은갑다.' 영선네 눈에 비친 영광은 늘 어딘지 모르게 거친 바위같이 거세었다. 그런가 하면 얼음장같이 냉엄하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독불장군, 부모나 형제에게도 마음을 열려 하지 않았다. 원체 영선네도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거의 한 번도 모자간에 속마음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한데 영선네는 그런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남을 불편하게 하는 성품을 영선네는 대단히 존엄스런 것으로 생각했다. 꼬리표를 달고 다니든 간에 아들을 부도덕하다 생각한 일이 없었고 악극단에서 나팔인가 피리를 분다 해서 퇴폐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집을 뛰쳐나갔고 수년을 소식 한 장 없이 지냈다 하여 불효막심한 자식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학생과 편지질을 했다고 해서, 동경서 부모의 허락도 없이 여자와 동서 생활을 했다고 해서, 대학에 진학하라는 최참판댁 제의를 마다하고 딴따라 패거리를 따라다닌다 해서, 불량배같이 일본인과 쌈질을 하며 몸을 망가뜨렸다 해서, 그러한 일들이 아들에 대한 판단을 좌우하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그럴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영선네는 믿고 있었다. 아들이 천박하고 비천하지 않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범치 못할 힘을 가진 존엄한 존재로 아들이 눈에 비쳤던 것이다. 그랬는데 근래에 와서 그런 아들의 모습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디가 아픈지 모른다는 생각은 다만 육체적인 데 대한 기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선네가 조반상을 들고 들어갔을 때 영광은 이불 위에 엎드러져 있었다. 잠든 것은 아니었고, 그는 밥상이 놓이기 전에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에 슬을 마셨냐?" "네." 하고는 모자간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영선네가 일어서 나가려 하자, "어머니." 하고 영광이 불렀다. "일전에 부산에서 뭘 가져왔다 하셨는데 그게 무슨 얘기지요?" "내 말하지 않았던가?" "말씀하신 것 같은데 무심히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주로 떠나기 전에 이웃간에 허물없이 지낸 사람한테 살림 부시래기를 다 주고 갔지. 하도 급히 떠나는 바람에 팔고 어쩌고 할 새도 없었네라. 그때 너 책도 그 집으로 옮겨놨제. 그것만은 좀 보관을 해두었다가 찾을 때 내달라고 했다." "그걸 가져왔다 그 말씀입니까." "음, 다 가져올 수는 없고 조금 가져왔다." "그거 어디 있습니까?" "골방에 있는데 가져다 줄까?" "아닙니다. 제가 가져오지요." "그래 그라믄 그래라. 부산 그 집에 남아 있는 책도 수월찮다. 오면가면 찾아다 놓을 작정이다." 영광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 '도대체 그 책들이 내게 무슨 필요가 있지?' "그 책들을 할아부지가 장만해주신 거나 다름이 없제. 그래서 버릴 수가 없었다. 네가 보든 안 보든." "잘 하셨습니다." 하고 영광은 수저를 놨다. "어째 그것밖에 안 먹노?" 그 정도의 말도 생략하고 사는 것이 이들 모자의 일상이었지만 영선네는 책 얘기가 나온 김에 뭔지 모르지만 영광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 것 같기도 하여 말을 이었던 것이다. "해장국을 먹고 왔습니다..... 할아부지가, 그렇지요. 내 책은 모두 할아부지 쌈짓돈으로 산 거니까요." 영광은 쓸쓸하게 웃었다. 영선네는 그 쓸쓸한 웃음도 아들에게서 처음 본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 그렇다고 생각을 해야 할지, 영광에게 큰 변화가 오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할지 영선네는 어떤 분명치 않은 예감에 쫓기듯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왔다. 그리고 숭늉을 떠서 아들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머니." "와." "지가 참 불효막심한 놈이지요?" "멋 땀시 그런 말을 하노." "지도 사람의 자식이니까요." "꽤깡시럽게 와 그런 말을 할꼬? 숭늉이나 마시라." 영선네는 그릇을 내민다. 그걸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방바닥에 그릇을 놓은 영광은 "여태 할아버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믄 머하노. 눈 한분 감으믄 그만이제." "어머니도 생각 안 하십니까?" "나야..... 생각하지. 생각한다." "저한테는 할아버지가 아버지 같았지요." "그런 소리 마라. 니 아부지 맘 니는 모린다. 니 아부지도 나 겉은 사람 만내서, 하시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싰다." 순간 영선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영선네의 눈물은 영광을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영광이 이상으로 당황한 것은 정작 영선네였다. 그 자신은 전혀 예기치 못한 눈물이었고 스습하기에도 매우 난감했던 것이다. "제가 뭐, 아버지를 비난해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아, 안다." 하더니 영선네는 도망치듯 급히 방에서 나갔다. 한참 후 영선네는 낑낑대며 보따리 두 개를 영광의 방에다 옮기는 것이었다. 지난 초가을, 갑자기 영광이 내려가라 해서 통영 영선의 집에 다녀오던 길, 우연히 들른 옛날 이웃집에서 미리 작심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영선네는 책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왔던 것이다. "어머니." "....." "좀 앉아보시지요." "바쁜데.... 설거지," 하다 말고 영선네는 무안 타는 아이같이 표정이 어설퍼진다. "우리 옛날 일은 다 잊고 삽시다." 뜻밖의 말에 영선네는 놀라기도 하고 어리둥절 하기도 한다. "제가 우리 가족한테 무슨 원망이 있었겠습니까. 원망은 아버지가.....저를 원망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우애 원망 하겄노. 아이다." "철이 늦게 들어서." 영광의 얼굴도 무안을 타는 아이 같았다. 어머니를 눈부셔하는 것 같았다. '니가 잘난 탓이제. 니 외할아부지 말씸대로 아무렇게나 생기났으믄 대대로 짝을 만내서 자식 낳고 안 살았겄나. 내가 무신 벵이 도져서 책을 가지왔는지 모리겄다. 그렇기 책을 많이 읽고 노심초사 안 했이믄 세상을 그러려니 함서 살았을 긴데.....' "어머니." "와." "지는, 그렇지만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요, 내 가족들하고 양지 바른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아부지가 어때서? 다 우리 살게 해놓고 가싰다. 니 아부지 겉은 사램이 어디 있어서? 마음으로는 자개 식구들이 은금보화였제. 어이서 어떻기 돌아가싰는지 흔적도 모리는 부모, 우짜다가 나 겉은 거를 만내서 생기난 너거들, 그기이 다 니 아부지 가심에 맺힌 한인기라. 그 한이 없었다믄 멋 땀시 찬서리 맞아감서 그리 살았겄노." "압니다. 알지요. 그러나 저는 그 한을 버릴랍니다." "한이 어디 안 가지겄다 해서 안 가지지는 기가? 또 한이 없는 사램이 어디 있일 기고. 니가 그런 말을 한께..... 아까 가족들하고 살겄다 했제?" "....." "그렇다믄 장개부터 들어라. 부모형제사 떠나는 사람 아니가." "차차, 차차 갈 때가 되면 가야겠지요." 주저앉듯 하는 말에 영선네는 오히려 자신이 지나쳐 왔다는 생각을 했는지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몸짓을 했다. "하기사 니가 그러이 내가 무신 말을 또 하겄노." 숭늉 그릇을 들고 영선네는 허둥지둥 나갔다. 그리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광은 팔을 뻗어 보따리 하나를 끌어 당겼다. 보자기의 매듭을 풀었을 때 가지런히 쌓아올린 책이 나타났다. 맨 위에 올려져 있는 사륙반절보다, 그러니까 문고판보다 약간 컸는데 앙증스럽고 예쁜 책 두 권이었다. 들어보니까 제법 묵직하게 느껴진다. 양장본이었기 때문이다. 짙푸른 하늘색에 박혀 있는 것은 금을 입힌 활자였다. 지난밤 부용이가 입고 있던 바로 그 재킷의 빛깔과 흡사하다. 정말 손 위에 올려놓고 굴려보고 싶게 앙증스럽고 귀여운 책이다. 그것은 쓰보우치 쇼요가 번역한 셰익스피어 전집 중의 두 권이었다. 한권 한권 들어 내어 본다. 세계 문학 전집 중의 불란서 극대 희곡집]이 있었고 뜻하지 않게 [영시개론]이 있었다. 금서인 히틀러의 [나의 투쟁], 구와바라 다케오가 번역한 아랑의 예술론집, 육백 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도 있었다. '...?' 아무래도 그것은 자기 책이 아닌 것 같았다. 책 뒷면을 들쳐보니 소화 년 5월 발행이다. 분명하게 그것은 자기책이 아니었다. 불과 삼사 년 전에 나온 책인데 어째 그것이 이 속에 들어 있는지 영광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의문인 채 밀어놓고, 영광은 신기했다. 시간이 마치 뒤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책 한권 한권을 사서 모으던 그 시절의 희열이 회상되었다. 할아버지 쌈지 속에서 나오던 꼬깃꼬깃 접은 일원짜리, 때론 오원짜리 지폐, 오십전 십전짜리 주화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영광은 그 책들 중에서 노트 한 권을 들어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시, 습작 노트였던 것이다. 영광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그 시절의 오기가 오늘까지 자신을 지탱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었다. 4장 만리 길을 오가며 오가다의 누님 유키코는 딸의 몸풀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 아주 가늘고 흰 털실로 갓난아기 양말을 짜고 있었다. 본시부터 다소 겉늙어 보이는 편이었지만 오십을 넘고 또 서넛을 더 먹은 유키코는 아주 늙은 여자로 보였다. 흰머리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얼굴은 주름 투성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끗해 보였으며 교양의 흔적이 암아 있었다. 아이 넷을 기르고 사업하는 남편, 그에게는 늘 근심 걱정이 많았다. 오가다는 그러한 누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태어나도 기뻐해줄 아비가 있나. 이런 전시, 세상에 나오는 아이가 너무나 가여워." 손가락에 실을 감으며 유키코는 혼잣말 같이 뇌었다. 사위가 얼마 전에 전선으로 나갔고, 사위뿐인가, 두 아들도 출정했으며 그중 둘째가 이미 전사를 했다. 간신히 장남 시게루만은 경찰 간부로서 근무지 경도에서 살고 있었다. 하녀가 차를 달여왔다. 유키코는 하던 일을 밀어놓고 동생에게 들라고 권했다. 오가다는 차를 마시면서 "참 조용하군." 하고 말했다. "무서울 만큼." 유키코의 말이었다. "집이 너무 커요." "그렇지?" 유키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가족이었던 집안이 졸지간에 황혼기에 들어선 부부와 하녀 한 사람, 세 식구가 남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 요시에 에이사코는 강한 통제 속에서, 그러나 아직은 현역으로 사업을 끌어나가고 있었다. "소개령이 내렸으니까 어떻게 해야겠지만 도통 궁리가 나지 않아." "갈 곳은 생각해두었어요?" "그게 글쎄... 북해도 쪽에 있긴 있지만 나 혼자 가서 뭘 하겠니?" "시게루는 어떻게 한다던가요?" "그쪽은 아이들이 있으니까, 가게 된다면 친정 쪽과 합류할 모양이더군." "참 큰일이군요." "난 차라리 여기서 죽고싶어." "..." "자식들 다 잃고 살아남아 뭘 하겠니. 살아남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야." "아직은 그리 급박하지 않으니까 너무 극단적인 생각은 마십시오." "소개령은 뭘 의미하는 거니? 폭격에 대비하는 거 아니면 본토를 격전장으로 삼을 의도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요." "만주는 어떠니?" "만주...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미군의 본토 상륙이 먼저가 될지 그건 모르지요. 대개는 비슷하겠지만 안전한 곳은 없어요. 아직은 사이판도가 견디고 있으니까." "그래도 희망은 없어."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식어버린 차를 마신다. "지에코상 소식은 들었겠지?" 뜨개질하던 것을 들면서 유키코는 말을 이었다. "네, 오래 전에요." "최근 소식은 모르겠구나." "그렇지요." "싱코아주머니랑 함께 살아." "..." "싱코아주머니는 여전히 젊으시고 아름다워. 어머니와 딸이 다홀로 되어, 하기야 뭐 그 집뿐이겠니?" "큰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면요." "응, 췌장암인데 돌아가실 때는 참 비참했어." "그 양반, 군인 기질이 아니었는데." "그래. 깐깐하시고 내성적이며 사실은 굉장히 섬세하셨지. 호방한 아버지하고는 전혀 딴판이었다." "지금 살아 계셨다 하더라도 괴로웠을 겁니다." "그랬을 거야. 이나카사라무이(시골무사)가 판을 치는 세상 아니니?"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그래두..." "전에는 창만 찌르면 고기가 잡혔으니까 뽐낼 만도 했지요. 지금은 도끼 든 사람하고 맞대거리를 하자니 본색이 나올밖에요. 사실 그 동안 잠자는 사람들 걷어차고 빼앗은 거지." "글세... 아무튼 그 동안 들떠 있던 국민들, 이제사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가 깨닫기 시작했지. 그러나 나가서 죽어주는 것 이외 무슨수가 있깄니? 진작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너, 그런 점에서 나는 너를 존경한다." "존경이라니요." 오다가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에코상 하번 찾아보지 않겠니?" "글쎄요." "위로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지에코를 슬프게 할 것 같아서, 모르는체 내버려두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럴까? 이런 시국에 묻는다는 자체가 어설프기는 하지만 너 결혼 안 한 거지? 했니?" "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럼 했구나." "..." "하기는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형제가 뭐라 하겠니. 나이도 오십을 바라보는 마당에." 유키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은 언제 오시지요?" "오늘은 좀 일찍 올 게다. 연일 회의다 뭐다 하고 늦었지만." "사업 형편은 어떻습니까?" "사업이라니? 참, 그말만 하면 난 골치가 아파. 국책공장의 감독이다, 감독. 자세한 거는 령님 오거든 물어봐." 유키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디 사는 거니? 딸애들은 모두 정신대로 공장에 나가야 하구, 주부는 부주대로 방위대에 편입이 되어서 죽창훈련까지 받으니, 그러니까 우치지니하는 준비를 하라는 얘기 아니겟어? 관공서, 학교,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는 모조리 군대 아니면 징용이야. 이 전시라는 비상조치에서 빠져나갈 사람은 대일본제국에는 단 한사람도 없어." "조선인들 징용에 비하면 일본인들 징용은 천국입니다. 조선인 노동자는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계지요. 일본은 언젠가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 얘기는 나도 들었다. 몹쓸 사람들... 조선 여성들 정신대 얘기도 들었어." "도시락 싸들고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젊은 여자들, 그들이 불만에 차서 못 견디겠다, 못 견디겠다 하고 있을 때 전선에서는 마구 무차별로 끌고 온 조선 처녀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 심할 때는 오십 명 이상의 군인놈들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유키코 얼궁에 피가 모여들었다. 수치와 분노였다. "나는 내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데 대하여 세 번 절망하고 증오했습니다." "..." "한번은 남경학살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조선의 처녀들, 그 더러운 짐승들의 지옥 간은 형상을 생각할 때였습니다." 오가다는 세 번째 절망과 증오에 대해서는 할하진 않는다. 그것은 중국인들의 목을 잘라서 그것을 배추같이 무더기로 쌓아올려 놓고, 죽인 중국인 남근을 베어 목이 잘린 그 입에다가 마치 시가처럼 물려놓고 무공을 자랑하게 위하여 그 앞에서 사진을 찍어 가족에게 보냈다는 얘기다. 누이였지만 그도 여성이라 오가다는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키코는 수치와 분노를 삭이느라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기계적 으로 실을 바늘에 감으면서 갓난아기 양말 짜는 데만 열중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흰 실뭉치는 구르다간 멎곤 햇다. 전등이 들어왔다. 유키코는 한숨을 쉬며 오가다를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나서 앞에 한 말들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화제를 돌렸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김빠진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사과궤짝에 토마토 당근 같은 걸 심어 먹고, 식량난에 허덕이면서 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는데 총리 그 사람은 도시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지 글쎄 남의 가정집 주방이나 기웃거리고 쓰레기통을 뒤져보질 않나." "정말 그랬답니까?" "그래. 기가 막혀서. 정말 상식 이하도 이만저만이야? 뭐야? 쌀알 하나 하수구에 버렸나 안 버렸나 그거 감시하자는 게야 뭐야. 명색이 재상인데 그런 짓거리를 하고 다녀? 일의 선후도 모르는 사람이 나라 중책을 맡았으니 승산 없는 전쟁을 시작했지.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감추기 위하여 항공모함 제 척을 잃고도 한 적 침몰했다. 그 따위로 국민을 속이면서, 정말 말도 안 돼." 총리대신 도조가 틈을 내어 시민들 주방을 살펴보고 쓰레기통을 들여다보고 다닌 것은 사실이며 그 일 때문에 비웃음을 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차츰 흥분하기 시작하는 유키코의 태도도 다분히 신경질이었다. "그만큼 자상하니, 뭐가 나쁘지요?" 비꼬듯, 흥분하는 유키코를 놀려주듯 오가다가 말했다. "그 사람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시국을 다소 아는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야. 모두 쉬쉬하기는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신문기사의 사소한 잘못, 그러니까 비판적 색채겠지, 그것 때문에 기자들 모가지가 짤리고 아카가미를 발부하여 전선으로 보낸다지 않아." "누님 그 방면의 소식이 밝군요." "반전론자를 국적으로 규정하고 매도하며 성토하던 국민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난 그것이 궁금해." 좀처럼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오가다는 그러한 누님의 흥분된 모습을 거의 본 일 없었다. 아이들 키우고 가정을 말없이 지키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던 유키코, 그러나 남다른 점이 있었다면 대단한 독서가였다는 것인데, 해서 옛날부터 집안에서는 유일하게 오가다를 이해해주었고 서로 말이 통하기도 했다. 남편 요시에조차 온순한 아내의 박식을 존중했으며 때로는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도 있었다. 유키코가 존경하는 사람 중에는 고토쿠 슈수이와 오스기 사카에가 있었다.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그런 이데올로깅 공명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사회주의자였던 한 사람은 노일전쟁 당시 반전론을 펴다가 가회으이 지탕과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며 결국에는 형장이 이슬로 사라졌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나키스트로서 관동진재 때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콩게 샐해되어 아내, 조카와 함께 우물에 던져져서 생을 마쳤는데 유키코는 비극적인 그들 생애에 대하여 숭배감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아무튼 유키코는 대단한 식견을 가진 여자였다. 물론 아들 하나를 잃었고 또 아들과 사위를 전선에 보낸 어머니로서의 근심과 분노가 없지는 않았겠으나 일본 정부, 특히 군부와 일본 국민을 보는 그의 시각이 부당햇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신경질적인 표현속에는 암담한 미래에 대한 초조감, 절망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생필품 구하기가 힘드는데 누늠은 용케 그런 털실을 구햇군요." 오가다는 자신의 감정도 그랬고 유키코의 흥분도 가라앉힐 겸, 화제를 돌렸다. "뭐? 어디서 구했느냐구? 지금 동경 바닥에서는 노끈 같은 혼방사도 구하기가 힘들어. 이것은 옛날에 쓰다 남은 것이야." 유키코는 실뭉치를 집어들고 눌러보변서 말했다. 갓난아기, 갓난아기의 양말,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하얀 털실, 오가다는 삶의 모습이 그 얼마나 가냘픈 것인가를 느낀다. 그리고 아들 쇼지의 모습에 따갑게, 눈앞에 떠올랐다. 마침 유키코의 남편 요시에가 돌아왔다. "어, 왔구나!" 우울한 표정으로 들어서던 요시에는 처남을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활짝 웃었다. 두루뭉수리한 동안에 몸은 비대한 편이었다. "왔다는 얘기는 들었지. 그러지 않아도 꼭 한번 만나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야. 잘 왔다." "건강해 뵈는군요." "건강? 말도 말어. 죽을 지경이다. 눈칫살이 찐 거지. 여보." 요시에는 아내를 건너다 보았다. "왜 거 배급 받아놓은 술 있지요?" "저녁은 어쩌고요?" "저녁 먹으면 술 할 수가 있나, 모처럼 지로가 왔는데. 정말 할말 이 많아. 태산만큼 할말이 많소." "여기서 하시겠어요?" "아니 내 서재에서, 술상은 그리로 갖다주시오. 자아 서재로 가세나." 요시에는 오가다의 팔을 잡아 끌며 서둘렀다. "성미도 급하십니다. 옷부터 갈아입으셔야지요." 딱하다는 듯 유키코가 말했다. "앗, 참 그런가?" 요시에는 침실로 들어가서 도데라 (솜을 두어 크고 편하게 만든 일본 옷)로 갈아입고 나왔다. 서재에는 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집 안에서는 가장 후미진 방이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하녀가 자부다이(낮고 작은상)를 들여다 놓고 갔다. 간빙에는 다뜻한 일본술이 들어 있었다. 사카쓰키에 술을 부어서 두 사내는 말없이 마신다. 아까 몹시 반가워하던것과는 달리 으시에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자네하고 술 마시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아니야, 우리 솔직해지자고." "..."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야." 활짝 웃었을 때는 양같이 어질어 보이던 요시에늬 눈이 칼날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왕년에 수재로 이름을 날렸고 동경대 경제과를 나온 그는 학문의 길로 가려다 말고 실업계에 투신할 만큼 보기와는 달리 매우 예리한 사람이었다.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죽으라면 죽었지 군소리하는 국민이 아니지 않습니까." "빈정거리지 말고." "빈정거리나마나, 꿀먹은 벙어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쩌겠어요. 잡아볼 지푸라기만한 기회도 없어진 거 아닙니까." "내 말은 망하더라도 어떻게 망하느냐 그걸세." "도조가 있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그래,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영웅주의며 히틀러보다 질이 덜어지는 독재자야. 이미 통치권, 통수권은 천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도조가 쥐고 있어. 헌병과 경찰은 도조의 사병으로 국민은 물론 정객들, 심지어 중신들까지 철저히 감시하고 있고 모모한 사람들은 도청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사람은 천천히 술잔을 비운다. "소용없는 그깟 일 다 그만두고 요즘 형님 형편은 어떻습니까?" "나? 나 말인가? 지금 시국에 내가 어디 있어? 대일본제국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나라는 것은 없다." 말하고서 요시에는 헛웃음을 웃었다. "형님 얘기가 아니고 사업 얘깁니다." "그게 그거지." "대강 짐작은 합니다만." "내 형편 같은 건 말할 필요가 없고 일본의 경제 돌아가는 얘기나 하지. 자네가 짐작하는 대로지만 구제불능이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도조라는 인간은 기구나 조직을 바꾸는 것이 취미인 모양이야. 만들었다가는 망가뜨리고, 만들었다가는 망가뜨리고, 장난감쯤으로 알고 있는지 그게 능산데, 시시각각 뭐가 어떻게 변할지 알수 없지만 경제기구가 확대되고 통합되어 회사나 공장이 수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야. 결국 거대한 기구 하나가 국가 경영으로 가는 거 아니겠어? 하기야 그 전에 일본은 망하겠지만 말이야. 지난 유월 발표한, 전력 증강 기업 정비 요강에서도 명시되었듯이 제1종 섬유공업과 제 3종 일용품공업은 제2종의 항공기 제조공업을 위해 금속류를 회수하고 그 설비, 자재, 인력까지 제2종에는 전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어. 결국 그렇게 되면 정부는 보다 많은 국채와 공채를 국민한테 강매하게 되고 저축운동도 한층 강화할 거 아니겠어? 결국 국민들은 바늘 한 개도 나무 바늘을 만들어서 쓰게 될 것이며 원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뻔하고 또 국민들 호주머니를 언제까지 털어내겠느냐, 아까도 말했지만 그러기 전에 망하기야 망하겠지. 더 간단하게 얘기하면 끝없이 쇠붙이를 바다에 내다버리고 나면, 그러고 나면 어절 것인가." "원시인이 되는 뭐가 되든 사람 자체가 전쟁 물자 아닙니까. 오히려 가장 요긴한 자원이지요. 인체에서 기름도 짜낼수 있고." 하다가 두 사내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못한다. 마음들이 격해 있기는 했으나 너무 끔찍스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망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이나마 건지려면 도조를 타도해야 해. 반드시 타도해야 해." "그러나 현재 그걸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걸 못하고 있지. 일본인이 용감무쌍하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가장 겁이 많은 사람들, 이러한 통제하에서 꼼짝 못하고 순종하는 민족을 어찌 용감무쌍하다 할 수 있으리.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약한 무리의 특성 아닌가. 명치 이후, 과거에도 그랬었지만 혁명이다, 쿠데타다, 수없이 요란했던 그 사건들만 해도 이념에 의한 혁명은 물론이고 핍박받고 억압당하여 일어선 경우는 없었다. 군부를 등에 업은, 즉 강자들의 난동이었지. 칼 쥔 놈들의 짓거리 아니었어? 그것은 천황을 위하고 국가를 원하고, 어떤 미사여구로 꾸며대어도 결국은 정권 차원 아니었나 그 말일세.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있다. 전쟁은 군부의 승리로써 나타난 현상이지. 그야말로 호골로 자처하는 고로쓰키들, 청렴하다 하는 것들은 융통성 없는 돌대가리들이고 옷초코초이(경박) 재서연하는 것들, 그런 긋들의 집단이 군부 아니었나 말이야. 군인 정신이란 하부 구조를 다지는 수단에 불과한 거고, 술수만 능했지 nt무식한 것들이 모여서 결국 나라를 말아먹는 거야." 요시에는 신랄했다. "사실 그들이 싫어하는 게 지식 분자지요." "지식 분자라는 것도 그렇지. 어용 아닌 지식 분자가 어디 있나요?" "국체가 바뀌지 않는 한, 어용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요시에는 깜짝 놀라며 오가다를 쳐다본다. "그렇다면?" "군주가 현인신인 이상 진리 진실의 추구는 불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역사적으로 항상 남의 것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원인이 거기 있지요. 일본이 칼, 무기말고 해놓은게 뭐 있습니까? 진리 아닌 것이 대본으로 되어 있는 이상 군부는 영원히 그 국체라는 것을 떠메고 다닐 겁니다. 형님 생각은 어떠시오?" 글쎄 그것까지는...' "기만이지요. 기만을 위해 국민들은 목숨과 충성을 바쳐왔습니다. 군부에서 지식 분자를, 그나마 어용인데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닐까요? "..." "다 부질없는 얘기지요." 요시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녀가 데운 술을 가져왔다. 그리고 절을 하고 나갔다. "학병제도 실시하게 되었고, 소개 명령도 내려졌어." 요시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정이 이쯤 됐으면 앞으로 도조는 어떤 곡예를 할까?" "곡예나마나 그것도 그럴 여지가 있을 때 얘기지요. 카드는 본토결전 하나밖에 더 있습니까. 화평을 결심하지 않는 한." "화평이라... 화평." 중얼거리다가 요시에는 오가다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본다. "자네 같은 사람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얼마나 일본인들 터무니없는 호기로 일 그르쳐왔는가, 설명은 충분하다. 화평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무조건 항복이야, 무조건 항복!" 천황제를 부정하는 오가다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던 요시에였으나 화평이라는 말에는 그 엄청난 허위성에 분노하는 것이었다. "형님도 딱하시오. 천황제를 부정 못하는 형님 앞에서 무조건항복이라니, 그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나?" 두 사람은 동시에 허탈한 듯 웃는다. "그래 맞다, 맞어. 일분인에게 항복이랑 있을수 없지. 정복, 정벌이라는 그 달콤한 말에 길들여져 왔으니까, 정말 일본인들은 모두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걸까?" "천만에요. 다만 죽을 각오를 강요당하고 있을 뿐이지요. 죽음을 강요하는 그 열령한 분자야말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할 걸요? 국번을 제물로 삼으려는 의도가 뭡니까?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본능 아니겠어요? 그 본능 때문에 눈이 어두워 이미 사라 판단을 못하고 있어요. 만일 자신들이 죽겠다한다면 국민은 살릴수 있겠지요. 군부나 황실이나."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없이 술을 마신다. 어쨌든 이들은 좋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다. 아주 상층은 아니었지만 상층의 하위쯤 될까, 중류의 상위쯤 될까, 참략과 약탈 덕분에 , 저변의 그 많은 생명들이 남의 산하에 뼈를 묻어준 덕분에 누릴 수 이쓰었던 좋은 시절, 그렇다고, 보낟면 이들 역시 나라의 은공을 부인 할수 없을 것이며 그 숱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들 아닌가. 미묘한 심리적 딜레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를 성토하고 비난할 것인가. 참담한 기분이다. 청일전쟁, 일로전쟁, 한반도 점령,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 그리고 미일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민(공범자)의 환호 속에서 분명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아니었다, 침략을 애국으로 날조하여 국민을 전선으로 전선으로 내몰았던 그들, 침략과 약탈이 덕적인 만큼 제 아무리 정의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워도 그것은 범죄자이며 짐승의 본능이며 남경대학살 같은 지옥은 전개되게 마련이었다. 하루에 수십 명의 병사를 받아내암한 했던 정신대의 존재도 필요했을 것이다. "사이판도만 무너지면 오키나와가 깨질 게고 그런다음 본토가 될 것인데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국토를 초토로 만들겠지." "초토화된 국토에서 노약자 부녀자들은 죽창 들고 대양할 거구요." "참 만화 같은 얘기야. 포화 속에서 죽창 들고 아녀자들이 멀 어쩌겠다는 거지? 비장한 것도 정도껏, 않고 적진에 뛰어들 폭탄도동이 났다는 얘기야? 세계 어느 곳에 이같은 포악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당장 눈 앞에 들이닥친 일도 아니니 간둡시다. 혹 누가 압니까? 그때가 되면 가미카제가 와서 도와줄지. 아세아에서 온갖 잔혹한 짓을 도맡아 하면서도 일본은 늘 천우신조에 의지해 왔으니 말입니다. 신은 아마도 늘 악마 편에 선은 모양이지요?" "이건 내가 들은 얘긴데." 요시에는 빙정거리는 오가다 말으 귀담아 듣지 않고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 보며 말했다." "아주 얘기가 고약해." "..." "천황을 만주로 모셔간다는 육군의 계획이 있다는 게야." "만주로? 그러면 만주로 천도한다 그 말인가요?" "그렇지." 요시에가 들었다면 그것은 세간에 떠도는 단순한 풍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주변이나 친구들 중에는 요로의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국은 어쩌고요?" "그거야 관동국들한테는 식은죽 먹기 아닌가. 명분 따질 겨를이 어디 있어?" "하기는 있을 법한 일이군요. 만주 사변을 저질렀던 무리들도 그당시, 정부에서 응하지 않는다면 만주에서 저희들이 건국하겠다며 협박한 일도 있었으니깐." "민일에 천황이 응하지 않는다면 다른 황족을 옹립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런 말도 있어." "..." "사실 황족이나 중신들 중에는 전쟁을 이 정도로 끝내자, 상당수 그런 생각들 하는 모양이지만 군부가 무서워서 벙어리에다 귀머거리 행세. 죽어도 좋다는 사람이 몇 있어야, 그래야 도조를 들어내도 낼 거 아니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음." "용감무쌍한 일본인 실상이 바로 그거 아닙니까? 무관 앞에서는 큰소리 한번 못하는 문관, 우리 역사가 바로 그거 아니던가요? 영원한 군정." "작년 10월 임시국회가 열렸을 때 국회의원 나카노가 할북 자살한 사건 자네도 알지?" "압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나하고도 아는 사인데 아까운 인물이야. 문장가에다 그만한 웅변은 드물어." "하자가 없는 것도 아니지요. 고노에 시대에는 친군파였잖습니까?" "몇 가지 잘못은 있었지. 삼국동맹을 추진한 일도 그렇고, 여하튼 그의 죽음은 아사히신문에." "전시 재상론 말이지요? 그건 저도 읽었습니다. 도조에 대한 맹렬한 규탄이더군요." "아사히신문은 그 일 때문에, 지난 정월이었지? 발금 처분을 받았는데 뒤늦게 10월 조언비어의 죄목으로 나카노는 헌병대에 끌려갔거든. 그러니까 10월 26일 국회가 열리게 됐으니 어쩔 것인가. 국회의원의 역류는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거든. 하는 수 없이 26일 나카노는 석방이 됐는데 이튿날 배를 가르고 죽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하여 어느 누구 한 사람 진상을 알려고 하지 않아.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는 말 이외는, 시절이 이러하니 황족이나 중신들이 몸조심할밖에. 사실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나." "만주로 천도를 한다면... 다른 황족을 옹립할 가능성도 있고, 그야말로 단노우라의 비극이란 헤이안조 말기, 권세의 절정에 있던 헤이커는 그 일문의 총수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죽음로써 쇠퇴의 길을 밟게 되고 드디어 겐지에게 쫓기어 진기와 어린 천황 안토쿠를 데리고 단노우라에 이르게 되며, 이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고 헤이케는 전멸하게 되는데 그때 기요모리의 아내이자 안토쿠의 외조모인 니이노아마가 안토쿠를 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역사적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군벌이 현인신인 천황을 죽이고 유폐하고 머리를 깎아 중으로 살게 왕위를 박탈하고 불모로 삼고, 그와 같은 비정한 사건들은 일본 역사에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만주 천도나 새로운 황족의 옹립이라는 말은 이들 두 사나이에게 실감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오가다는 그같은 상상이나 예측을 뒤집어듯 말했다. "어째서? 그곳에는 관동군이 있어." "소련을 생각해보십시오." "..." "독일이 나가떨어진 지금, 소련이 뭣 때문에 주저하겠습니까. 게다가 중공군은 어떻고요? 만주 일대 중공의 조직은 상당히 강력한 것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흠." "군부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할 것입니다." "자네는 어쩔 것인가." "어쩌다니요?" "귀국할 생각이 없는가." "그럴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오가다는 아들 쇼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그는 아들을 위해 일본으로 돌아올까 생각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만주를 뜰 수가 없었다. 쇼지가 조찬하 부부라는, 절대적 안전지대에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인실이 숨쉬는 하늘 밑,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의식이 그를 만주서 뜨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일이 년이야 뻗댈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뜬구름인데요 뭐. 형님은 어쩌시렵니까?" "어쩌고 자시고가 있나. 죽을 때가 오면 남부끄럽지 않게 죽는 거지." "그런 사정이야 만주에 있는 일본인도 다 마찬가집니다." "좋은 시절, 흥청거리다가 벌받는 거지 뭐." "좋은 시절이 멍에였지요." "자네 형은 요즘 어떻게 지내나. 만난 지가 오래됐어." "용감무쌍한 일본인이지요. 관료주의가 골수에까지 박혀버렸으니 만나도 재미없을 겁니다." "자네는 집사람하고 많이 닮았어. 자네 쪽이 훨씬 더 순수하지만 말이야. 그래 언제 떠날 건가." "이삼 일 후에 갈까 생각하는데." "그럼 어디에 있나." "여기저기, 형 집에도 있고." "갈 때까지 여기서 묵으면 어때? 나도 답답하고, 마음 털어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어." "털어놓고 말할 수 없는 사정이야 다른 사람들이라고 안 그렇겠어요?" "그럴게야."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요,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해?" "사람들은 각각 자기 의식에다 빗장을 굳게 질러놓고, 빗장을 질러놓은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 "거대한 그 집단이 같은 방향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현상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견디는 걸까요? 아니면 아주 고착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못 알아듣겠군." "형님도 그 무리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요? 그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아비를 잃고 아들 남편을 잃었는데 어찌해서 일본 열도에는 통곡 소리가 없을까요? 흐느끼는 소리, 눈물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참 기괴한 일이지요. 그로테스크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훈련된 민족이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요. 도대체 일본인은 몇 겹이나 허울을 쓰고 살아야 합니까? 울지 않는 민족이 어디 또 있습니까." "남몰래 울겠지." "저는 자자부레한 그런 것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절제를 지나서, 긴 역사를 흐르는 동안, 굳어버리고 완전한 습관이 돼버린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일본인들은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정직하기도 하지만 가슴에 묻어둔 불씨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 냉담함, 사실 마음속 깊이에 통곡이 울음이 없고서 어찌 사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에 귀의할 수도 없지요. 진리를 탐구하고 문화를 형성할 수도 없습니다. 일본인에게 진정한 종교가 있습니까?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있습니까? 종교는 습관으로서 존재하고 이데올로기는 심한 말로 유행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1920년대, 뭔가 달라지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요. 어쩌면 그렇게 일제히 순식간에 원대 복귀를 하느냐 말입니다. 뭐가 일본인들은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칼입니다. 거짓도 믿게 하는 칼 말입니다." "자네는 변함이 없는 이상주의자구먼." "칼과 현인신의 맹신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일본인은 언제까지나 차디찬 가슴으로 살아야 할 겁니다. 정말 슬프지요." "아닌게아니라 집사람도 그 비슷한 말을 하더군. 어찌 이 땅에는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자유도 없는가 하고, 둘째가 전사한 후로는 영 사람이 달라졌어. 셋째마저 죽을 거라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애. 옛날 마비키하던 시절을 생각해서 참아라. 내가 그렇게 말했으나 그게 그렇게 안 되는가 봐." 그런 말을 하는데 요시에 눈가가 빨개졌고 심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오가다는 새삼스럽게 별로 늙지 않는 동안을, 그러나 반백이 된 자형의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항상 밝았고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었는데, 하고 오가다는 생각한다. 마비키란 솎아낸다는 뜻인데 옛날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일본에서는 아이를 솎아내듯 죽였던 것이다. 요시에랑 함께 자고 이튿날 조반도 그곳에서 먹은 오가다는 열시쯤 또 들르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집을 나섰다. 거리는 작년에 왔을 때보다 또 달라져 있었다. 겨울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도시에는 작년보다 현저하게 색채가 줄어든 것 같았다. 헐벗은 가로수처럼, 이따금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 중에 신사복과 외투 입은 모습이 눈에 띄긴 했으나 그것도 어딘지 모르게 꼬질꼬질, 늙은 모습과 더불어 입성도 낡아만 보였다. 오가다는 자기 자신도 저 나이쯤 되면 저러려니, 인실이는 어떻게 변하여 나타날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히기는 그 나이가 되도록 살아 있을지, 생전에 인실이를 만나게 될지, 오가다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동경의 낮게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턱을 쳐들며 올려다본다. 조오후에 있는 조찬하 집에 갔을 때 노리코가 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검정 몸뻬에 감색 윗도리를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천으로 만든 큼직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머나, 이제 오세요?" "네." "쇼지가 아빠랑 함께 늦게까지 기다렸습니다." 활짝 웃으며 말했으나 매번 느끼는 일이었지만 노리코 눈에는 일종의 원망 비슷한 것이 있었다. 사실 노리코의 그 눈빛 때문에 어젯밤엔느 돌아오지 못하고 누님 집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어디 가십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부인회에 갑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라 할지 모르지만 어서 들어가보십시오." "네, 그럼 다녀오십시오." 오가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노리코는 걸음을 빨리하며 가낟. 그 뒷모습을 오가다는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 속에 원망하는 눈빛, 그것은 오가다의 느낌만은 아니었다. 사실 노리코는 오가다에게 원망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무척 자제하는 것 같았지만 오가다가 와 있는 동안 노리코의 감정은 슬픔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얼빈에서 쇼지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동경을 다녀간 후 오가다는 매년 정초를 전후하여 동경에 오곤 했다. 어떤 때는 일주일, 길어야 십 일 정도, 찬하 집에 머물기도 했고 형네 집에 유숙하기도 하면서 찬하 집을 오가며 쇼지를 바라보고 얘기하며 때론 함께 나타나기도 했다. 이번에도 동경에 와서 사 일이 지났다. 하룻밤은 찬하 집에서 보냈으나 노리코의 눈치가 보여 형네 집으로 갔고 어젯밤은 누님 집에서 잤다. 그러나 낮에는 어김없이 찬하 집을 방문했다. 그러한 오가다의 행동이, 또 쇼지에게 나타내는 그의 애정이 심상치 않음을 노리코가 느낀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무심한 여자일지라도, 핏줄이 닿은 그들 모습에서 여행한 찬하와 함께 욌기 때문에 무망중 그것을 깨달지 못했으나 이듬해 오가다가 나타났을 때, 애절하게 쇼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노리코는 전류같이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 그것은 바로 경악이었다. "여보, 저한테 정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드디어 노리코는 찬하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가다상, 우리 쇼지의 생부지요? 틀림없어요. 그렇지요?" 찬하는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머쓱햊니 얼굴로 노리코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은 참 무서운 분이군요." "..." "어쩌면 십여 년 동안 그렇게 감쪽같이 절 속일 수 있었을까요." "속인 것은 아니었소." "속인 것 아니라구 말씀하셨습니까?" "다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어째서요?" "실은 오가다상도 모르고 있었소." "모르다니요?" "말하자면 오가다상에게도 당신에게처럼, 속였다면 속인 거지요." "왭니까? 어째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약속이었으니까... 내 동족과의 약속이었소." "그렇다면 결국 그 약속을 지켜지지 않았다 그 말씀이군요." "아니." "...?" "그건, 그건 내가 깬 게 아니오. 물론 그렇게 하게끔 작용은 했지만 상대방에서 오가다상에게 알린 거요." 노리코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절박한 심정, 복잡한 사정은 상상할 수 있었다. 찬하에 대한 노여움도 어느 정도 풀어졌다. 그러나 노리코는 의기소침했다. 자세한 진상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었다. 그것은 찬하와의 오랜 생활에서 지켜온 일이며 더군다나 내 동족과의 약속이라는 말에서 노리코는 강하게 자신이 제자당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오가다상이 알았으면 저한테도 얘기해주실 수 있잖습니까. 저만 따돌려놓고 섭섭합니다." "섭섭하다... 하지만 몰랐던 편이 훨씬 낫지. 당신은 지금 섭섭한 게 아니오. 겁을 먹고 있어요." "..." "아까 약속이라 했지만, 물론 약속이었지요.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오가다상이 영원히 모르기를 바라는 그런 못된 욕망도 있었소. 사실 나는 요즘, 당싱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물론 그럴 것이오. 당신이 쇼지를 사랑했다는 것은 쇼지에게만이 아니라 그 아이외 관련된 모든 사람에 대한 축복이었소." "아, 아닙니다. 쇼짱은 저에게 큰 빛이었습니다. 저는 그 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젖을 물려서 기르지는 않았지만 저는 엄마였으니까요." 노리코는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당신과 어떤 여자와의 사이에서 쇼짱이 태어났더라면, 그 편이 훨씬 좋았을 걸, 데려가지는 않을 거 아니예요?" "데려가지 않아. 걱정 말아요." "언젠가는." "자식은 누구나 어른이 되면 떠나는 거요. 당신 그러고 보니 날 의심하기도 한 모양인데?" "가끔은 그랬습니다." "당신하고 살면서 나 그런 짓 안 해. 아이까지 낳을 지경이면 이혼하지." 하는데 찬하 뇌리를 스치고 가는 얼굴, 명희였다. 노리코 모르게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여자. 이제는 타인으로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한 임명희의 모습. 거의 잊고 있었으며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기 사랑의 허무를 이제는 새김질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그 쓰라림보다 강하게 찬하 가슴에 와닿는 것은 동반자로서 노리코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가정이라는 우대가 얼마나 강인한 것인가 그것이었다. 그 자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생존 본능과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쁘게 생각하면은 인생을 정리해가며 더 이상 덫에 걸리지 말고 괴로움과도 작별하고 싶은 노회한 계산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찬하는 자기 입지나 정신 세계를 분석하려 하지 않았고 방황하려 하지도 않았다. 근지에 와서 그는 일년에 몇 차례씩 하던 여행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방황을 끝낸 것이다. 그것은 또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 노리코는 남편의 진실을 확인한 것 같았다. 당신과 살면서 나 그런 짓 안 해! 그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오가다가 쇼지의 생부라는 것을 알고부터 노리코는 미묘한 갈등에 빠졌다. 오가다가 나타날 때마다 그가 침입자로 느껴졌고 자신이 소외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가다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며 거듭거듭 자신을 타일렀지만 눈빛에서까지 그것을 감출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함께 느끼고 있었다. 서로가 내보이려 하지 않았건만 어쩔 수 없이 서로는 그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쇼지와 오가다의 관계가 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 번도 터놓고 얘기한 적은 없었다. 마치 성난 부스럼에 손을 대는 것을 무서워하듯 그것을 두려워했다. 오가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찬하는 거실에서 찬 한 잔을 앞에 두고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간밤에는 어디서 잤소?" 신문을 접고 찻잔을 들며 찬하는 물었다. "설마 노숙한 거는 아니겠지요?" 농담이었지만 오가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심사가 배어 있었다. 노리코를 의식하여 처신에 신경을 쓰는 오가다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누이 집에서 자형과 한잔 걸쳤지요. 무력한 사내 둘이 이불 밑에서 활개치는 그 따위 한심스런 소리나 지껄리면서 밤을 샜어요." 오가다는 찬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저기서 끌려간다는 소문인데 당신 같은 피라미, 입조심해야 할 거요." 무엇을 지껄였는지 대강 짐작을 한 듯 찬하는 충고 비슷한 말을 했다. "나 끝까지 살아남을 거요. 걱정 마시오." "술이 있었으니 그래도 그 댁 사정은 괜찮은 모양이군." "배급받은 술이라 하더군요." "나는 어제 양주 두 병 구해다가 모셔놓았소." "도조가 쓰레기통 검사하고 다닌다 하던데 비국민 소릴 듣겠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지. 우리 같은 새우, 등 터지는 것만도 억울한데, 사실 나냐 비국민이지 뭐?" 하는데 목소리를 들었던지 쇼지가 거실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아저씨!"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옛날같이 앳되고 앳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니다. 오가다가 돌아보며 웃는다. 쇼지는 이제 중학생이었다. 키도 많이 자랐고 몸은 튼튼해 보였다. "아버지하고 늦게까지 기다렸어요." 오가다 옅으로 다가오며 쇼지가 말했다. "내 핑계 하지 마. 너 혼자 기다리고선." 찬하가 시치미를 떼었다. "아저씨 오시면 술병 딴다 하셨잖아요." 어글어글하고, 쇼지는 몇 년 전보다 더 미소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해마다 오는 오가다 눈에도 쇼지는 몰라보게 큰 것 같았고 다듬어져 한층 빛나는 것 같았다. 과연 이 아이가 내 아들일까? 싶으리만큼. "아버지." "왜 그래? 이 배신자야." 눈을 부릅뜨다가 찬하 얼굴에는 저절로 웃음이 떠오른다. "또 오가다상한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거야?" "안 그럴게요. 아버지." "그럼 요구 사항이 뭐야?" "아침에 생각했는데요." "뭘?" "우리 아저씨랑 함께 여행가요." "여행? 어딜?" "삿포로 안 될 까요?" "삿포로라... 거긴 어째서?" 묻다가 찬하는 오가다를 쳐다본다. 오가다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혹시 두 사람이 모의한 거 아니오?" 하니까 오가다는 팔을 내져으며 "그런 억울한 소리 마시오." 했고 쇼지는 쇼지대로 "순전히 이건 제 생각입니다. 아버지." 하고 항의를 한다. 찬하가 모의를 했다 한 것은, 한때 오가다가 삿포로에 거주하면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의를 안 했다 하자, 하지만 왜 하필이면 삿포로냐? 아버지 생각에는 겨울이니까 북쪽보다 남쪽이 좋을 것 같은데?" 찬하는 웃으며 쇼지에게 물었다. "그거는, 그거는 말이지요." 막상 말을 하려니까 막연한 것 같았다. "저어... 구보 사카에 고향이잖아요?" "뭐라 했나?" 그 말은 오가다 입에서 튀어나왓다. "그리고 또오, 아리시마 다케오도 삿포로 농과대학을 다녔구요." 찬하는 싱글벙글 웃으며 들었으나 오가다의 눈은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래서?" 서두르며 오가다는 쇼지의 말을 재촉했다. 그러한 오가다 태도에 주눅이 들었던지 얼른 말을 못하다가 "구보 사카에가 쓴 [가산바이치]를 읽었습니다." "그건 희곡이다!" 극작가가 쓴 [가산바이치]가 희곡인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데 오가다는 강조하듯 말했다. 구보가 소설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희, 희곡입니다. 그리고 아리시마의 [카인의 후예]도 읽었는데 모두 북해도가, 북해도에 관한 얘기라서." 오가다는 아연실색 말을 잇지 못한다. "거 이상할 것 없어요. 소학교 때 세계문학전집을 읽어버리는 애도 있었으니까. 쇼지가 서고를 들락거리면서 그런 책들을 빼내 와서 읽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작픔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그 얘기로구나." "저기 그러니까, 작품에 나오는 황량한 풍경을 실제로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냐?" 하다가 찬하는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거 같더니 "쇼지, 그러면 우리 더 멀리, 북쪽으로 가보는게 어때? 더 황량한 벌판으로 말이야." "그게 어딘데요, 아버지." "만주." "네." 쇼지와 오가다는 동시에 놀란다. "정말입니까?" 오가다가 물었다. "전에도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소. 쇼지를 데리고 만주를 한바퀴 돌고 올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오가다의 안경 속의 눈이 빨개졌다. 순간 "만세!" 하며 쇼지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방학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가게 된다면 서둘러야 할 게야." "네 아버지." "그리고 쇼지." "네." "우리 셋이 모의한 거니까 넌 입 다물고 있어야 해. 엄마한테는 내가 공작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모레쯤 떠날 수 있겠소?" 오가다는 물었다. "저는 언제든지요., 언제든지 좋습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흥분 때문에 오가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찬하도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여행, 오래간만에 하게 될 여행에 대한 설렘을 나타내었다. "그럼 아버지 저는요." 하다 말고 성급한 몸짓을 하며, 꽁지에 불붙은 듯 쇼지는 거실에서 물어나가는 것이었다. "정말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하는군요." "기분 나쁘지는 않지요?" 장난스런 찬하 말에 "물론입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가다는 "쇼지가 아리시마의 소설을 읽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가산바이치를 읽었다는 얘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뭐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읽은 거는 아닐 것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우연히 읽었을 게요." "물론 그런 줄은 알지만 어쩐지 그 쪽을 선호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이제 나이 겨우 열 네 살인데." "걱정이 되어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신기해서요. 수준이 월등하지 않습니까? 좀 상상이 안됩니다." "나도 중학 이학년 때 죄와 벌을 읽었어요. 입센의 희곡집도 읽었고." "그렇게 말하니까, 하긴." "부모는 다 자기 자식을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아리시마나 구보는 다 같이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다. 특히 구보는 사상적 입장이 확고했으며 드물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론과 예술적 형상화를 일치하는 데 성공한 작가로서, 리얼리즘 연극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사람이었다. 1935년 리얼리즘 논쟁 때도 식민지 조선인 동지에게 뜨거운 애정과 연대감을 나타낸 시,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을 쓴 나카노 시게하루와 극작가 무라야마 도모요시를 비판하여 구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계적인 도입에 반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 사회주의자로서 신극 운궁의 주류였으며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할 수 있고 일관되게 활동해온 사람이다. 몇 해 전에 검거되었다가 보석된 후 현재는 침묵 상태다. 쇼지가 읽었다는 가산바이치는 그의 대표작으로서 북해도 도카쓰라는 화산재 지대를 배경으로 가혹한 자연과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 제도와 인습의 상충, 삶과 맞서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현지인의 생활과정을 그린 것으로 내용이 가득 찼고 구성이 탄탄한 구보의 대표적 희곡이라 할 수 있고, 중일전쟁 초기, 그 살벌한 전쟁 분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한 지경에까지 밀고 나간 작가의 저항 정신을 나타낸 작품이다. "그 애가 아리시마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은 보았지만 구보의 희곡을 읽었다는 얘기는 오늘 처음 들었소. 그러고 보니 그새 세월이 많이 흘렀구먼." 찬하는 감회가 새로운 듯 말했다. "우리도 늙었구요." "늙었지요. 아이들한테 백기 들 날이 얼마 남았겠소? 쇼지가 카인의 후예를 읽고서 내게 질문을 하더구먼요." "뭐라구요?" "아버지도 읽었는가, 읽고 난 뒤 기분이 어떻든가, 뭐 그런 질문이었는데, 그래서 농담 반 진담 반, 고리키의 처르캇슈를 흉내낸 거라 했지요. 쇼지의 얼굴이 벌개지더구먼." 찬하는 그때 일이 생각났던지 빙그레 웃었다. "그것도 읽었던가요?" "내 말을 듣고서 찾아내 읽은 눈치였는데 쇼지는 다르다고 주장하더구먼. 그리고 또 아리시마가 북해도에 있는 자기 농장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준 일에 대해서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묻질 않겠소?" "거 참 맹랑하군." "그래서 또 농담 반 진담 반, 대답했지요. 그거는 틀스토이 흉내를 낸 거라구, 얼굴이 또 시뻘개지더군요. 그러면 아버지는 그게 나쁘다는 얘깁니까? 하고 따지질 않겠소?" "혼났군요. 그래서 뭐라 했습니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것은 아리시마의 고뇌라 했지요." "아리시마의 고뇌라..." 한번 뇌어보며 오가다도 싱긋 웃었다. "일상에서 볼 때는 아직 어린데 그 방면에서는 조숙한 것 같소." "서고를 개방해놓은 탓도 있겠지요. 뜻을 몰라도 많이 읽어두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나이 들면 책도 못 읽어요." "다 한가지 얘기지 뭐." "자기 독자가 십사 세 소년이라면 아리시마도 좀 놀랄 걸요." "사라지고 없는 사람, 놀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그 사람 죽은 지도 이십 년, 아마 그렇게 될 걸? 불행한 사내지요." "우리보다는 덜 불행하지요." 오가다는 말뜻을 생각해보듯 찬하 얼글을 바라본다. "독자들에게는 남의 아내와 동반 자살한 그의 생애와 최후가 매우 로맨틱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과연 그의 생애가 로맨틱했을까? 또 한편에서는 그의 출신 성분과는 상관없이 그를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보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아리시마는 허무주의, 아나키스트로 종시했던 사람 아닐까요?" "동감이오. 하지만 신카상은 어떤 뜻으로 그가 우리보다 덜 불행하다 하는 거요?" "우리라기보다, 나라 해야겠지. 구차스럽게 살고 있으니 말이오." "그건 자학이오. 지금 구차스럽게 살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것도 자위고." "그렇담 결론이 없는 거 아닙니까?" 오가다의 목소리는 좀 날카로웠다. "그래 맞아요. 맞소. 특공대가 되지 않는 이상 입 다물어야지. 하하핫..." 점심때가 되어 찬하의 딸 후미랑 네 식구가 식탁에 마주앉았다. "쇼짱 무슨 좋은 일 있니? 아까부터 싱글벙글 왜 그리 웃어?" "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쇼지는 찬하를 보면서 당황하며 성난 얼굴이 된다. 사실 쇼지는 여행 얘기를 누나에게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입속에 밥을 밀어넣으며 쇼지는 후미에게 곁눈질을 했다. "아저씨." "응." "쇼짱하고 약속했어요? 어디 가기로?" "아, 아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야." 오가다는 시치미를 떼면서도 눈을 꿈벅거렸다. 쇼지도 시치미를 떼자니 좀 괴로웠던지 찬하 눈치를 힐끔힐끔 살핀다. 아버지 그만 얘기해요, 하듯. 후미는 그런 쇼지의 눈길을 재빨리 잡아채고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이제 나한테 화살이냐?" "남성들끼리만 무슨 일 꾸민 거지요? 그렇지요? 저랑 어머니만 빼놓고, 아무래도 수상해." "냄새를 맡는 후미 너의 코는 엽견보다 예민히다. 당할 재간 없구나." "거 보세요. 저의 직감이 빗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후미는 의기양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항복이다." 찬하가 말하자 쇼지도 두 팔을 드는 시늉을 하며 "누나, 나도 항복." 하고 킬킬 웃는다. "이 배신자, 아저씨도요." 쇼지와 오가다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으르렁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실토해." 후미는 쇼지를 윽박지른다. "실은 말이야. 아저씨 따라서 만주 다녀오려구." 찬하가 대신 말했다. "물론 쇼짱도 가는 거지요?" "그래." "그럼 저도 갈 거예요." "무슨 소리야?" "왜요, 아버지?" "안 돼." "왜 안 되지요?" "여자니까." "남녀 구별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같은 분도?" "구별하는 게 아니다." "그럼요?" "그곳은 너무 살벌해." "왕도낙토라 하던데요?" 찬하를 놀리 듯 말했다. "팔로군이 곳곳에 숨어 있어서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도 모르고." 찬하 역시 딸을 놀려대듯 말했다. "실력 있어요. 학교에서 사격술을 배웠거든요." 따라나서지 않을 것을 빤히 알면서, 결코 데려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 부녀간에 괜히 해보는 수작이었다." "팔로군한테 잡혀가거든 나는 조선인 딸이오, 그 말을 잊지 말고." "나 조선 귀족의 딸이오. 하면 안 되겠지요?" 그 말에 웃음판이 벌어졌다. 후미는 조선인 아버지에 일본인 어머니, 그런 남다른 환경에 대하여 저항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노리코는 저녁때가 거의 다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 어머니!" 그가 들어서자마자 후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왜 이리 소란이냐?" "쇼짱 만주 데려간대요!" "뭐?" 노리코의 낯빛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어머니, 왜 그래?" "만주에 데리고 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아버지 여행하시는데 함께 데리고 간다 하셨어요." "여행에 따라간단 말이지?" "네. 난 억울해." 거실로 들어온 노리코는 혼자 있는 찬하에게 대뜸 "오가다상은 어디 갔어요?" "누님댁에 간다면서." "후미가 하는 얘기, 그게 무슨 뜻이지요?" 낯빛이 달라진 노리코를 놀란 듯 찬하는 바라본다. "쇼짱을 데려간다는 얘긴가요? 여행을 함께 한다는 뜻인가요?" 찬하는 행여 아이들이 들어올까 염려하는지 문 쪽을 살피다가 일어섰다. "할 얘기 있으면 날 따라오시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에서 마주앉은 부부는 서로를 망연한 얼굴로 바라본다. "당신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 같소." "제 말에 대답부터 해주십시오." "쇼지가 여행하고 싶다 해서 얘기가 그리 된 거요. 당신이 그러니까 오가다상이 괴로워하지 않소." "괴로운 것은 제예요." "며칠 있다 돌아올 건데 왜 그러우?" "..." "당신 오가다상한테 부담 주면 안 돼. 지금 당장 데려간다 해도 우리로서는 할말이 없는 일 아니오." "왜 할말이 없습니까. 법적으로도 그 애는 우리 아들입니다." "법적으로 싸우겠다는 거요?"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쇼지를 사랑한다면 그런 말 입밖에 내서는 안 돼요." 노리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흑 하고 흐느낀다. "오가다상은 당신 기분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하고 있소. 그 사람 입장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볼 수는 없겠소? 선량하고 순수한 사람이오." "그건 저도 알아요." 떠날 무렵에는 노리코의 태도도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연락선을 타고 갈 때 뱃멀미를 하면 어쩌느냐, 만주 가서는 한눈팔지 말고 아버지 옆에 꼭 붙어다녀야 한다는 둥, 그곳은 추우니까 동상에 걸리지 않게 털장갑 털모자를 꼭 쓰고 끼고 다니라는 둥, 그답지 않게 늙은이처럼 잔걱정을 많이 하는 것이었다. 후미는 실상 가고 싶은 생각도 없으면서 일부러 심통이 잔뜩 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쇼지는 마냥 들 떠 있었다. 미지의 땅을 향해 날갯짓하는 어린 바다제비처럼 설레고 있었던 것이다. "쇼짱." "네, 어머니." "거기 가면 나 보고 싶지 않겠어?" 역시 서운한지 노리코가 물었다. "일주일이면 돌아올 건데요 뭐." "아버지는 열흘쯤 걸릴 거라 하시던데? 열흘이면 너무 길어." "잠시예요. 어머니." "그럴까?" "어머니, 나 근사한 선물 사오겠어요." "근사한 선물이란 뭘까?" "만주에 관한 책 모조리 꺼내어 봤는데요, 그곳에선 담비털이 유명하대요. 어머니 담비 목도리는 어때요?" "어머나, 그런 걸? 하지만 너한테 무슨 그런 큰 돈이 있을 거라구." "아버지보고 사시라구 제가 조를 겁니다." "그럼 나는, 나한테는 무슨 선물 사올 거니?" 후미가 따지듯 물었다. "누나는 말이야, 그림책에서 봤는데 손에 끼는 거 있잖아. 두 손을 찌르는 털토시 같은 것 말이야." "아아 그래, 영화에서 봤다. 사올 거니?" "아버지한테 부탁할게. 꼭 사달라고." "그새 쇼짱 궁리 많이 했구나. 제법이야." 후미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쇼지는 선물 사오는 것도 여행의 큰 즐거움으로 간직했던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찬하는 "꿈 깨. 공수표야. 요즘 그런 걸 어디 가서 구하니?" "없어요? 정말 없어요, 아버지?" 쇼지는 크게 소리내어 물었다. 그리고 역력하게 낙담하는 표정이다. "혹 있을지도 몰라. 아저씨가 구해볼게." 오가다는 풀이 죽은 쇼지를 달래듯 말했다. "하얼빈 같은 곳에 가며." "하얼빈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오가다의 가슴은 뛰었다. 인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 때문이다. 사실 쇼지와 함께 만주로 간다는 결정을 내렸던 그 순간부터 오가다는 인실이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일행은 출발했다. 노리코가 걱정한 대로 쇼지는 연락선에서 멀미를 심하게 했다. 처음 타본 배였기에 심리적인 것도 있었던 것 같았다. "괜찮다. 괜찮아. 좀 참으면 돼." 하고 찬하는 말했으나 오가다는 안절부절못하고 쇼지를 데리고 선실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또 바닷바람이 거세고 매서워서 혹 감기는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선실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부자를 바라보며 찬하는 안쓰럽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사내자식이, 참아라. 뱃멀미는 뭍에 내리는 순간 깨끗이 없어진다." "이제 괜찮아요, 아버지. 아저씨 죄송합니다." 오가다는 죄송하다는 말이 섭섭했던 것 같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친한 사이에선 그런 말 안 하는 거야." 바다는 한결 잔잔해졌다. 물이 가까워졌는지 갈매기는 울며 날고 있었다. 고깃배도 몇 척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객들은 차차 선실에서 갑판 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다 왔다." 찬하가 말했다.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연락선은 유장하게 뱃고동을 울리며 항구로 들어갔다. 항구에는 불빛이 별같이 돋아나 있었다. 찬하의 말대로 배에서 내리는 순간 쇼지의 뱃멀미는 거짓말같이 나아버렸다. "여기가 조선이에요? 아버지." "응, 너의 아버지의 나라다." 대답하면서 찬하는 마음속으론 다른 대답을 했다. '쇼지, 너의 어머니의 나라다.' 부산 거리로 일행은 밀려나왔다. 부둣가의 불빛들, 낯선 사람들, 낯선 복장,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찬하는 아버지의 나라라 했지만 쇼지의 남의 나라, 이국에 온 것을 실감했다. 아이를 업은 여인이 무거운 짐꾸러미를 이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늙은 지게꾼이 짐을 지고 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참담한 느낌이었다. 이 추운 겨울날 남루한 옷을 입고 열어서 구부러진 손을 내밀며 동냥하는 거지, 그 풍경은 쇼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불쌍하게 살아야 하나요?" 쇼지는 오가다에게 물었다. "차차 알게 될 거다. 차차, 네가 커서 어른이 되면." 뻔한 사실인데, 오가다는 쇼지의 반쪽이 이 나라, 가난하고 핍박받는 조선이며, 그 민족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 내 아들아! 너의 어머니는 바로 저 불쌍한 동족을 위하여 북만주, 네가 보고 싶어하는 황량한 벌판에서 지금 싸우고 있단다. 가해자로서 괴로워하고 있는 일본인, 나를 언제인가 아버지로 네가 받아들이듯 동족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의 여성도 언젠가는 네가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민족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사실도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민족과 민족의 투쟁이 없어지고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투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지상에서 식민지라는 존재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와 나의 슬픈 사랑, 비극도 없어질 것이다.' 잡답 속을 헤쳐서, 가로등의 빛이 달무리처럼 번지고 있는 조용한 거리에 들어선 일행은 일본 여관을 찾아들었다. 오가다와 찬하가 오면가면 이용하는 단골 여관이었다. 뚱뚱하고 지분 냄새가 나는 사십대, 여관 주인이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머, 이 아이는 누구예요?" 몸집과 달리 가늘고 높은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 같았다. 숱이 많은 머리를 틀어올렸고 빗을 꽂은 모습은 전형적이 일본 여자다. "내 아들이오." 찬하가 대꾸했다. "어마나, 그래요? 참 미소년이네. 정말 너무 잘생겼어. 어디 보자아, 아버지는 별로 안 닮은 것 같은데 어머니가 굉장한 미인인가 보지?" 하고 수다를 떠는데 쇼지는 성난 것처럼 서 있었다. "미소년의 아버지를 위하여 술 좀 안 될까?" 술 생각이 간절했던지 찬하는 여주인에게 부탁한다. "누구 청이라구, 네 좋아요. 하지만 많이는 안 돼요." 하고 손을 흔들어 보인다. "고맙소." "저녁은 어쩌시겠어요? 하고 오셨나요?" "이런 시국에 어디 가서 밥을 얻어먹습니까. 오가다상, 일단 저녁을 하지?" "그러지요. 쇼짱이 배고플 테니까." 저녁을 끝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쇼지가 잠든 것을 보고 두 사내는 오가다가 든 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부탁해 놓은 술상을 받았다. "실은 돌아올 때 갈 곳이 있었는데 들르지 못하겠군요." 술잔을 비우면서 생각난 듯 말했다. "어딘데요?" "마산." "마산? 거기는 왜요?" "결핵요양소에 가려구." "아아, 유선생 아들이 있다는 그 요양소 말이지요?" "네." "정성이 보통 아니오." "정성이라기보다 글쎄요. 쇼지에게는 사촌형님 아닙니까." "그렇게 챙기려들면 한이 없지.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죄값인지도 모르지요. 유인성 그분 가슴에다가 저는 대못을 박았으니까요."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든다면 대못 박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오가다상은 그러면 인실씨와의 일을 죄라 생각하는 거요?" "아니오, 천만에요. 하지만 어떤 진실 때문에 피해받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해서 절대선이 없다 할 수도 있고." "그렇지... 대못을 박았다. 하니까 하는 말이오만 내 경우도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지요." 찬하는 서글프게 울었다. "방탕한 자식 이상으로. 가문을 지우려는 내 양심은 진실로 그게 양심이었나 생각할 때가 있어요. 오히려 이기심이 아니었던가, 관념적인 것이지 하하하핫핫..." "네, 알아요. 소작인들한테 농장을 나누어준 것을 두고 산카상은 아리시마의 고뇌라 한 말,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다만 운명에 발버둥치는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거지요?" "그렇소. 덫에 걸린 것처럼 발버둥치는 거지요. 그러나 그게 남이 친 덫이 아니거든. 스스로가 쳐놓은 거지요. 이제는 뭐 그런 것 다 생각하고 싶지 않소. 내가 내 속에다 가두었으면 그런대로 지낼 수밖에요. 밥을 먹고 여행을 하고 술을 마시고... 결백하면 얼마나 결백하겠소. 의적도 활동을 해야 가난한 사람들 쌀말이나 나누어주게 되지. 평생 할 일 없이, 한 일도 없이, 그래요. 부모 가슴에 대못질만 했지. 하하핫핫... 늘 주저앉아서, 잊었는가 싶었는데 털고 일어나서 밖에 나오고 보니 그 따위 망상이 다시 달려드는군. 오가다상." "네." "난 당신이 부럽소." "미안합니다." 하며 오가다는 고개를 숙였다. 의외로 부럽다는 찬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잃지 않을 희망이 있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고 애정이 있고... 당신의 시간이 시시각각 생동하고 있는 것 같소. 개인으로 오가다 당신은 순수하게 인생을 잘 살아왔다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나는 틀렸어요. 철저하게 틀렸어." 좀처럼 자기 내면에 관한 얘기를 하는 일이 없었고 흐트러진 모습을 드러낸 일도 드물었으며 조선조 말엽 권문 세가의 자제로서 몸에 익힌 절도를 유지해온 조찬하였었는데, 그러나 그같은 자포자기적이며 파괴적인 말의 내용과는 달리 온건하고 침착한 일상의 모습으로 찬하는 조용히 술을 마신다. 그의 괴로움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오가다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느 편에도 속할 수 없는 그의 입장의 외로움을 이십 년이 꽉 차는 세월 동안 가까이 사귀면서 지켜보았던 것이다. 아리시마가 자기 농장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준 데 대하여 쇼지가 질문했을 때 농담 반 진담 반, 톨스토이 흉내를 냈다 했다는, 또 그게 나쁘다는 얘기냐고 쇼지가 따져 물었을 때 그것은 아리시마의 고뇌다 하고 대답했다는 찬하,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오가다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가진 것에 대하여 느끼는 콤플렉스, 오늘날의 역사가 어디를 향해 진행하고 있는가,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어왔는가 그것을 자각한 지식인, 특히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며 남에게는 심약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그같은 콤플렉스는 사실 치유하기 어려운 병리현상 이다. 지식인들의 고민과 방황이 대개는 그런 데서 연유되고 또 대개는 한번쯤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진 것을 나누었다 하여 의식이 해방되는 것도 아니며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않는 이상 나누었다는 것은 시혜자로서의 새로운 콤플렉스가 싹트게 마련이다. 계급 의식이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새로운 소외감을 인식할 뿐이다. 더구나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친일파로 살아남을 가문을 짊어져야 하는 조찬하의 처지로서는 실로 갈 곳이 없다. 일본의 정책 자체가 놀고 먹어라, 거들먹거리며 살아보아라. 그것이 조선조 말엽을 산 권문 세가에게 베푸는 일본의 온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 반역자로서 민족이 쏘아대는 화살의 표적이기도 한 것이다 서서히 놀다가 거들먹거리다가 죽어가라, 친일에 광분하며 새로이 부상하려는 분자들에게는 말단 말직이나 안겨서 부려먹으면 되는 거고. 그러나 조찬하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한 것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감정이었다는 데 그의 회한이 있었던 것이다.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는 그의 술회 자체가 회한을 의미한다. 애정 문제로 좌절한 그의 인생의 출발점, 오가다는 파도가 방죽을 치던 그 바닷가를 가끔 생각한다. 자신에게는 인실과의 사랑이 이루어진 곳이자만 찬하는 산산히 부서진 곳이기도 했다. 물빛이 눈부시게 푸르고 호수같이 아름다운 바다였다. 바라크 같은 분교가 있었고 인실의 은사였다는 여자, 찬하에게는 형수였던 검정 옷 입은 여자, 얼음장같이 차다찬 얼굴에 혐오마저 숨기려 하지 않았었다. 그곳에서 오가다는 철저하게 부서지는 찬하를 목격했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 오가다는 피부로 그것을 느꼈다. "시시한 얘기는 다 그만둡시다. 그보다 최씨댁에서는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소."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무슨 말씀이오? 환국이 아버님 때문인가요?" "아니 학병제가 실시됐으니 말이오." "그래서요?" "그 댁 둘째가 걸렸을 겁니다." "아니 졸업하지 않았습니까? 벌써 했을 텐데요?" "졸업이야 오래 전에 했지요. 다시 경제과에 들어갔고 그나마 일년을 쉬었다지요? 운수가 나빴소. 금년이 졸업인데. 하기야 졸업생도 끌고 간다 하기는 하더구먼." "그래요..." 오가다는 말을 끊었다가 "그건 정만 불운이군요. 졸업해서 취직을 했어도 한참 됐을 텐데." "사회 생활 하기 싫어서 그랬겠지만, 아주 명석한 아이였는데... 바깥분은 감옥에 계시고 아들까지, 하기야 뭐 다 겪는 일이니까." "지원을 했을까요?" "안 하고 배기겠어요? 학교 법문계는 다 문을 닫았는데 붕 떠서 어디로 가겠어요? 징용에 끌려갈 텐데." "환국이 그 사람 힘들겠소." "어머님이 젤 힘들지요." "그 동안 그 학생은 더러 만났습니까?" "거의 못 만났지요. 처음에는 더러 집에 찾아오곤 했는데 환국이 하고는 달라서... 작년 봄이었던가? 우연히 요요기에서 친구를 만났소. 아직 재학중이라는 말을 그때 들었어요." "우리가 진주에 갔을 때 아마 중학생이었지요?" 오가다 말에, 다소 멈칫하다가 "그랬을 거요." 싹둑 자르듯 찬하가 대답했다. "그러면 서른 살이 가까울 텐데?" "..." "그건 정말 너무했다." "너무하나마나, 정말 불쌍한 정경이오. 차라리 총점을 내밀고 잡아가는 편이 낫지." "네?" "조선 천지, 지식인이란 지식인, 이름 석 자 한 번이라도 지면에 박혔던 사람이면, 교육자는 물론, 그들을 몰아내어 바로 그들을 하수인으로 학생들을 끌어내고 있지 않소. 내 제자를, 내 뒤에 올 후진을, 민족의 꽃인 학생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는 참혹한 정경 말이오. 그중에서 앞장서서 날뛰는 친일 분자들이 과반이겠으나 죽도 살도 못해 그 짓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게요. 신문 지상에 나타난 글들을 보면 분노보다 오히려 그 참혹함에 눈물이 납니다. 사람의 영혼을 이렇게까지 짜내는 대일본제국의 천황은 그야말로 신이로구나, 절대자로구나, 다만 그도 세상을 하직한다는 사실만 빼놓고." "그런 일이야 어디 어제그제에 시작되었습니까?" "잔혹해, 너무 잔혹해. 학생들은 전선으로 내몰아서 죽이구 지식인들은 모조리 혼을 빼서 죽이구. 감옥에 가두어서 죽이구, 나 같은 존재는 모멸감으로 이미 박체가 되어버렸지만 그나마 글을 쓰고 연설을 하지 않게 되어 구슬픈 다행이긴 하지만 하하하핫..." 찬하는 독약을 마시듯 술을 마신다. 그의 감정은 순전히 갈짓자였다.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여주인에게 술을 부탁하던 찬하, 굴간과 같이, 오직 가냘픈 불빛과도 같은 아이들과 아내를 바라보며 침잠해 있던 그가 몇 해 만에 조선땅을 밟고 보니 온갖 것이 무질서하게 그의 뇌리를 어지럽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말이 났으니, 오가다상은 귀찮게 구는 사람 없어요?" 화제는 다시 바뀌었다. "귀찮게 굴다니요?" "유선생이랑 모두 감옥에 있는데 오가다상도 계명회 사건에 연루 됐으니 묻는 말이오." 그 얘기... 별로 귀찮게 하는 일은 없지만." "일본인이라 그런가?" "피라미니까 그렇겠지요." "그럴까?" "그가 얌전하게 있었지요. 제가 관계한 일도 없구." "아무튼 일본의 진보적 세력이란 그 자체가 수상쩍어." "산카상, 나 공산주의자는 아니오." "알지요. 알어." "비밀에는 함구하는 방관자일 뿐입니다." 오가다는 묘한 말을 했다. "공산당 서기장이라는 자가 천황 밑에 공산주의 체제를 둔다는 말을 안 하나." "그건 지난날 군주제 철폐를 들고 나왔다가 송두리째 무너진 때문이지요. 3.15사건 때 공산당이 당한 걸 생각하면, 이 잡듯 했고 손톱을 뽑는 그 무시무시한 고문을,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고문을 생각하면, 그래도 공산당은 재건되었어요. 나는 산카상처럼 그리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군부와 결탁한 진보 세력도 있었지만, 또 오늘날 그 대부분이 전향을 했지만 사실 3.15의 그 대탄압이 없었더라면 일본이 변혁될 기회는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더라도. 저변의 저항 세력, 그 에너지는 년대에 있어서 폭발 직전이었지요. 소위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보통선거였구요. 그 보통선거는 또 공산주의, 그 밖의 여러 가지 성격의 단체, 그것들의 뿌리를 뽑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요. 조선 인민만 주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천황제 국가인 일본에도 국민의 주권이 없기론 마찬가지지요. 일본의 형편도 조선에서 지금 학도병 때문에 지식분자들이 하수인으로 등장하듯 끊임없이 우익 테러리스트들이 준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치안유지법 개악에 반대하고 나선 야마센이 우익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된 것도 예의 하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국가의 변혁과 사유 재산의 부정이 잠재 의식 속에 있었다고 떼거리를 쓰며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감옥에 처넣는 현실에서 그 치열성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문제는 실전에 약했던 거지." "그것은 인정합니다. 조선에서는 싸움의 터가 있었으니까요. 만주 중국 연해주, 무장할 수 있는 터는 있었지요. 독립이라는 절실한 목표도 있었구요." "그 말에도 일리는 있소. 정말 이런 상황은 존재하기 위한 필연성일까? 그들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존재의 위협을 느껴야 하며 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게 무심한 시간과 공간의 필연성일까?" "나는 그런 생각 안 합니다." "허 참 우리 이런 얘기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찬하는 정신이 든 듯 말했고 오가다는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복도는 말갛게 뻗어 있었으며 호젓했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다. 이층 창 밖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옆방도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이튿날 일행은 북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달리는 동에도 그랬지만 가다가 어느 역두에 머물렀을 때도 쇼지는 지치지 않고 창 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 녹아 들어간 듯한 눈빛이었다. 척박한 철로 연변의 땅이며 대부분 남루한 차림의 조선인들이 쇼지 눈에 어떤 의미를 지니며 다가오는 것일까? 오가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은 부성의 본능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시시각각 일본 본토에 다가오고 있는 전화를 예감하고, 예측 불허, 만주대륙의 상황, 어떠한 대혼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런 것에 대한 강박이 조선땅 산골에다 아이를 풀어놓고 싶다는 황당한 생각을 유발했는지 모른다. 진실로 오가다는 쇼지를 위하여 이 불행한 시대를 절감하는 것이었다. 기찻간에서는 각기 다 말이 없었다. 찬하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었는지., 그는 신문을 보다가 책자를 꺼내어 읽다가 때로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용무가 없는 여행이란 항상 그러한 것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탈출이다. 그러나 배를 탔을 때나 기차를 탔을 때는 그것이 탈출이기보다 유리 현상으로 나타난다. 탈출하는 대지를 잃기 때문에 개체에 응결되는 지각과 동시에 운명과의 수직선을 그으며 불확실한 의식의 세계는 확대된다. 그것은 죽음의 행로가 이러할지 모른다는 쓸쓸함이며, 자유의 개념이란 결국 개체에 대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행을 꿈꾸며 또 여행을 반복한다. 왜일까? 조찬하와 오가다 지로도 그러한 여행을 수없이 반복해온 사람이다. 그러나 오가다에게 이번 여행은 예외였다. 여행을 한다기보다 쇼지와 함께 있다는 의미에 그의 생각은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니며 애정에 대한 갈망이었다. 쇼지를 통한 인실에 대한 갈망이며 인실을 통한 쇼지에 대한 사랑의 갈망이었다. 신경 오가다의 사택에서 여장을 푼 일행은 편안함 하룻밤을 보냈다. 근년에 와서 하숙 생활을 청산하고 사택으로 옮긴 오가다는 만주인 노파 한 사람은 시중꾼으로 데리고 있었다. 요리 솜씨도 좋아서 찬하나 쇼지는 음식에서부터 매사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조반을 끝내고 차를 마시면서 "나는 치치하얼 쪽으로 갈 생각이오." 찬하가 말을 꺼내었다. "가능하면 하일라르에 들르고도 싶고." "무슨 소립니까?" 의아해하며 오가다가 되물었다. "우리 하얼빈에서 합류합시다." "그럼 헤어져서 여행을 하겠다 그 말씀이시오?" 오가다는 펄쩍 뛰었다. "아버지." 쇼지는 깜짝 놀란다. "하도 여러 번 와놔서 신경은 신물이 나서 그런다." "그럼 저는 어쩌구." "너는 아저씨 따라서 구경하구, 하얼빈에서 만나면 돼." "저는 아버지 따라가겠어요." "그것은 안 된다. 그곳은 험하고 추위도 굉장해. 아이들 갈 곳이 못 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험하고 추운 곳이면 아버지도 안 되잖아요?" 오가다는 주거니받거니 하는 찬하와 쇼지를 번갈아 보며 말이 없었다. 찬하가 혼자 가고 싶어하는 심정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쇼지는 찬하에게 설득을 당했고 신경에서 하루를 보낸 뒤 천하는 떠났다. "불안하냐?" 오가다가 혼자 남은 쇼지에게 말했다. "네." 사실 쇼지는 몹시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오가다가 쇼지의 생부가 아니었더라면 찬하는 아이를 오가다에게 맡겨놓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가다는 찬하가 떠난 뒤, 만일 쇼지를 이런 식으로 아주 자기에게 맡겨버렸다면, 그럴 경우의 쇼지를 생각해본다. 쇼지 역시 아버지가 아무리 오가다와 친근한 사이일지라도 낯선 곳에 자가만 남겨놓고 떠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배신감이라고나 할까, 원망스러움을 누를 수 없었고 여행의 흥취마저 싹 가지고 말았다. "불안해할 것 없다. 그곳은 워낙이 추운 곳이라서." "그러면 아버지가 안 가실 수도 있잖아요." "너 아버지 취미가 여행이라는 거 알지? 오래간만에 나오신 거야. 또 앞으론 좀처럼 여행하기도 어려워질 거구." 오가다는 달래었으나 쇼지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자아, 우리도 슬슬 움직여보자." 쇼지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연도 건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그러나 쇼지는 엄청난 가로 너비에는 놀라는 것 같았다. 가로는 벌판같이 넓었고 거의가 직선으로 뚫려 있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우마차와 털모자를 깊숙하게 쓴 만주인 어자, 그 무표정한 모습에는 관심을 나타내었다. 달려가는 일본군 군마의 무리를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일본군의 카키색 군복은 두드러졌고 조화를 깨뜨리고 있었다. "아저씨, 저 마차에는 왜 저리 얼음이 꽁꽁 얼어붙어 있어요?" 앞서가는 마차를 가리키며 쇼지가 물었다. "물을 파는 마차다." "물을 팔아요?" "음, 강에 가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다가 시민들한테 파는 게야.' "수도가 없나요?" "수도 없는 집이 많아서 그래." "왜 그렇지요?" "신경은 신도시니까. 십 년도 채 안 되었거든. 만주 일대가 대부분 그래." "얼음이 두껍겠다." "그럼 두껍지." "뭘로 깰까?" "글쎄다." "치치하얼은 교과서에서도 배워서 알겠는데 하일라르란 곳은 어떤 도시지요?" 쇼지는 시내구경을 하는 동안에도 줄곧 떠나간 찬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곳은 치치하얼보다 훨씬 더 서북쪽인데 그곳에서 좀더 가면 국경 도시 만주리가 있고, 호런바일 고원의 중심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원지대로군요." "그렇지." "거도 바로 그런 곳에 가고 싶었는데, 도시엔 별로 흥미가 없어요." 끝끝내 떠나간 찬하 생각만 하는 쇼지가 오가다에게는 좀 야속했고 어떤 선망을 느끼기도 한다. "요 다음애 갈 기회가 있겠지." 하다가 오가다는 마음속으로 그것이 언제쯤일까? 하고 반문해 보는 것이었다. "요 다음에 기회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하다가 오가다는 마음속으로 그것이 언제쯤일까? 하고 반문해 보는 것이었다. "요다음에 기회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간절히 희망하듯 오가다는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춥고 험한 곳에서 사람들은 뭘 하고 살아요?" "주로 목축을 하고 살지. 사람들은 자연 조건이 냉엄하면 오히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게야. 사람과 사람이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자연과도 투쟁을 하는 법이고, 해서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곳이 문명 사회다. 하일라르에 가면 낙타가 썰매를 끌어." "아저씨는 가보셨어요?" "그럼, 그리고 그곳에는 몽고인들이 많아. 몽고 무역의 요지이거든. 라마승도 많고." "라마교는 불교지요?" "그래 불교다. 라마교의 본산은 티벳이고." "일본 불교하고 다르나요?" "다르지." "어떻게요?" "성스럽지. 그 점이 다르다." 쇼지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들은 시내를 돌다가 황룡공원으로 갔다. 빙판을 이룬 남호는 장관이었다. 아득하게 먼 곳에 숲이 있었다. 야트막한 숲이. 그리고 온통 호수였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건만 워낙이 넓은 호수여서 사람들인 띄엄띄엄 눈에 띄었고 더러는 한곳에 몰려 있기도 했다. 햇빛이 빙판에 미끄러지고 있었다. "굉장해요. 모든 게 다 넓어요. 굉장히 넓어요." "그래 모두가 다 넓지. 생각이 아득해질 만큼 만주 벌판은 넓어. 일본의 국토도 이렇게 넓고 섬이 아니었던들 좀더 멀리 세상을 내다볼 수도 있으련만." "그렇지만 일본은 이 넓은 대륙을 정복하지 않았습니까." 쇼지의 그 목소리는 일본인의 목소리였다. "이 땅의 사람들은, 그러나 결코 정복되지 않았다." "어째서요? 일본의 지배 밑에 있는데도." "일본인은 자만 왔다가 가는 사람이야. 이 땅의 임자는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 이 땅에서 태어난 민족이지. 그것은 쇼짱도 알아두어야 해." "가끔 아버지도 그 비슷한 말씀을 하시지만." "차차 크면 알게 된다." "아저씨는 그 말씀을 꽤 자주 하셨어요. 전 어리지만 말씀하시면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어른들은 너무 걱정은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도 그렇구요." "말을 해도 네가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다. 그리고 말로써 아는 것보다 쇼지 너 자신이 몸으로 느껴서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니까." "아저씨." "응." "지금 일본은 전쟁에 지고 있는 거지요? 그렇지요?" 오가다는 저도 모르게 쇼지를 노려본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지요?" 노려보는 오가다의 눈을 쳐다보는 쇼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오가다도 나직하게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쇼지는 돌을 주워 던지려다 말고 물결치는 호수가 아니며 빙판으로 번들거리는 호수인 것을 깨달았는지 주워 들었던 돌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쇼짱 스케이트 탈까?" "..." "스케이트 빌릴 수 있는데." 쇼지는 고개를 저었다.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만주인이 많겠지요?" "그렇지 않아. 일본인이 훨씬 많을 거야." "왜지요? 여긴 만주국 아니예요?" "크면 알게 된다는 것이 내 입버릇이라면, 쇼짱은 왜지요? 그게 입버릇인 모양이지?" 쇼지는 웃었다. "만주인들은 대개 다 가난하니까. 뽐내는 일본인 꼴도 보기 싫을 거구." "아저씨는 일본인이면서 일본인이 싫은가 부지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하고 친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다. 잘못되어 가는 일본이 싫구 잘못 생각하는 일본인이 싫어. 그러나 옳은 생각을 하며 인류를 걱정하는 일본인도 많단다." "나는 뽐내거나 그러지 않을 거예요. 어른이 되어서도 불쌍한 사람 편에 설 겁니다." "그래야지." "학교에도 목검을 휘두르는 깡패 같은 녀석이 있어요. 참 꼴불견입니다. 졸업하면 아라와시가 되어서 영미 귀축은 씨도 남기지 않고 쳐부수겠다며 큰소리 탕탕 치고 기세가 여간 아닙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 땜에 전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가다는 쇼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마음 같아서는 꽉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제한다. 멀리, 먼 곳 호숫가의 야트막한 숲을 바라본다. '히도미,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어? 당신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생장하여 만주땅을 밟고 있는데...' 숲 위에는 호수 빛과 같은 하늘이 있었다. 그곳은 마치 땅끝같이 느껴졌다. 만주땅에서는 언제나 땅끝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가도가도 땅끋은 없다. 그것은 마치 오가다의 희망 같은 것이기도 했다. "점심때가 다 됐군." 오가다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쇼짱 돌아가자." 시내로 되돌아온 오가다는 단골로 다니는 왜식점 우즈라에 들어갔다. 순 일본식으로 꾸며놓은 식당이었다. 손님들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물론 모두가 일본인이었다. 쇼지를 앞세우고 테이블 사이를 지나가는데 화장이 짙은, 사십 가까워 뵈는 여자가 오가다를 빤히 쳐다본다. 여자는 반백머리의 오십대 중반쯤의 사내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오가다상." 여자 옆을 지나치려 했을 때, 여자는 다소 날카롭게 불렀다. "어!" 오가다는 깜짝 놀란다. 그는 다름아닌 고가 세츠코 였던 것이다. "오랜간만이에요." 다소 비꼬듯 말했다. :오랜간만이군." 오가다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듣던 대로 건재하셨군요." "대련에 산다는 얘길 들었는데."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른 거예요. 여직 결혼 안 하셨다구요?" "그, 그런 셈이오." "여보, 인사하세요, 옛날 알던 사람이에요." 반백머리의 사내를 쳐다보는 세츠코의 눈빛은 차가웠고 어투도 결코 공손하지는 않았다. "아, 그래." 사내는 게걸스럽게 밥을 먹다 말고 젓가락을 놓으며 부시시 일어섰다. "여긴 내 남편이에요.' 세츠코 말에 오가다는 머쓱해하다가 "그렇습니까? 저는 오가다 지로라 합니다. 아무쪼록..." "나는 오오모리 시게요시라 하오." 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이마가 다붙고 입술이 두툼한 오오모리라는 사내는 부유한 것 같았으나 교양은 없어 보였다. 그는 도로 자리에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세츠코는 그러한 남편이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오가다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떠나려 하는데 "무라카미상 소식은 듣나요?" 세츠코는 매달리듯 물었다. "상해에 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소만." "그래요? 나미에상하고는 아주 헤어졌나요?" "그런 모양이오." 오가다는 빨리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어했으나 세츠코는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또 물었다. "다헤코상이 정신병원에 들어갔다는 것, 그것 사실인가요/" "잘 모르겠는데." "아, 참, 이 아이는 누구예요? 나도 모르는 아이가 이미 있었어요?" 세츠코는 쇼지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 아니 친구의 아들이오." "이상하네? 오가다상을 많이 닮았는데?" "그, 그럼." 오가다는 뿌리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되도록 먼 자리에 가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쇼짱 배고프지?" 공연히 눈부셔하며 오가다는 물었다. "별로요." "뭘 먹을까?" "먹고 싶은 것 다 되나요?" "그럼 되고말고." "이나리즈시(유부초밥)가 먹고 싶어요." 오가다는 이나리즈시와 김초밥을 주문했다. "동경에서는 밖에 나가도 좀처럼 사먹을 수 없다던데..." "만주는 일본인들의 천국이거든. 누구나가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건 아니지만 일본인들은 풍족해." 따끈한 미소시루(국)와 초밥을 쇼지와 함께 먹으면서 오가다는 등뒤에 세츠코 시선이 느껴져서 몹시 불안했다. 쇼지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그를 예사롭게 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애정은 없었으나 몇 번인가 밤을 함께 보낸 여자, 아직 그 여자에게는 미련이 있었는지 그 절실해하는 눈은 아무해도 마음이 꺼림직했다. 세츠코가 돈푼 있는 장사꾼의 후처로 들어갔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세츠코의 경우도 무라카미며 나미에, 다헤코의 소식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미에가 그때 동경에 간 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 이미 알려진 일이었고 다헤코도 구애를 거절한 무라카미에게 식칼을 들고 덤비다가, 그 사건으로 일본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세츠코가 신경에 있을 때 다 들었던 만큼 새삼스럽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잇자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하여간 세츠코를 만난 것이 쇼지에게 캥기는 일인 것 만은 사실이다. 식사를 끝내고 일어섰을 때 오가다는 조심스럽게 되돌아본다. 세츠코 내외가 앉았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돌아간 모양이었다. 오가다는 안도의 숨을 가느다랗게 내쉬었다. 이틀 동안 신경서 어물쩡거리다가, 어물쩡거렸다는 것은 쇼지가 시무룩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사에 흥미를 잃은 듯했고 찬하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몹시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 그럼 하얼빈에 미리 가 있을까? 거기서 아버지 오는 동안 기다리는게 어때?" "네, 그래요!" 비로소 쇼지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아직은 소년이었다. 만리 타국, 전후좌우 끝간데 없는 망망대륙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기는 했으나 아버지와 헤어졌다는 것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그를 부자간의 각별한 사랑이 쇼지로 하여금 찬하의 신변을 걱정하게 한 것이다. 그러한 아이를 바라보며 오가다는 오가다대로 고민하게 되었다. 진실을 알았을 때 쇼지의 충격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기차로 장장 여덟 시간 이상이 걸리는 신경과 하얼빈 사이, 언덕하나 볼 수 없는 벌판을 기차는 일직선으로 마치 화살이 날 듯 가고 있었다. 쇼지는 지쳤는지 차창 밖 풍경을 보다가는 잠들곤 했다. 오가다도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당신은 천황을 부정하지 못했소. 홍구공원 사건 때 감격한 당신은 내 집을 찾아와서 조선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싶다고까지 했지만 천황을 부정 못했소. 그런데 오가다상 당신은 지금 확고하게 군주제를 부정하는군요.' 동경서 찬하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 땜에 전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남호 호숫가에서 하던 쇼지의 말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생각은 차창 밖 풍경처럼 날아갔다. '무라카미상 소식은 듣나요?' 하고 묻던 화장이 짙은 세츠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라카미의 집, 그 객실에 모여든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직업은 각각이었지만 그만그만한 인텔리들이 모여서 마작을 하고 술을 마시며 부정적 시국관을 가지고 있던 사내들, 상당한 연배였던 중학교 교사 오이는 귀국했고 만철에서 만드는 홍보영화에 관계하고 있던 하야시는 체포되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군부 비판은 그 당시 상당히 과격했던 것을 오가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오가다 의식 속에서 차창 밖 풍경처럼 날려가고 있었다. 하얼빈역에 내린 오가다는 언제나 이곳에 서면 그러했듯이 역두에서 인실을 보았던 그 당시를 회상하게 된다. 인실이 탄 마차를 되쫓다가 놓쳐버렸던 그때의 미쳐버릴 것만 같았던 절망을 되새겨보는 것이다. 쇼지를 데리고 사람들을 헤치고 나온 오가다는 곧장 호텔로 향하였다. 마차를 타고 가는데 쇼지는 신경에서와는 다르게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거리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오가다 역시 마음이 설레기로는 쇼지의 유가 아니었다. 하얼빈이라면 수도 없이 와 본 곳이다. 예전에도 여러 번 왔었지만 송화강 강가에서 애절하게 인실과 헤어진 후 해마다, 어떤 때는 두세 번이나 찾곤 했던 곳이다. 올 때마다 가슴 설레는 곳이었지만 이번의 방문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한 감회가 있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쇼지를 동반했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그새 오가다는 윤광오, 심수앵 부부와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수앵은 오가다에게 말할 수 없이 깊은 동정을 나타내었고, 윤광오는 친구로서, 또 동경진재 때 그 재난을 피할 수 있게 보호해준 은인으로서 오가다를 민족적인 편견 없이 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맑은 감성을 윤광오는 사랑하게 되었다. 다만 그들 부부가 함구하고 있는 인실에 대한 일이었다. 그들이 고작 한다는 것은 간접적인 말이었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그것뿐이었다. 오가다는 그 말을 듣기 위하여 장장 여덟 시간을 소요하는 이곳을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저씨." "응." "이곳은 신경하고 영 달라요." "그렇지?" "신경은 뭔가 네모 반듯반듯, 건물도 그렇구요, 하지만 길이 넓은 데는 놀랐어요. 굉장했어요." "하얼빈은 어때?" "이상해요." "어떻게?" "보지 못한 곳에 처음 와보는 기분이 아주 강하게 들어요." "음." "하지만 제가 상상한 지나인의 도시는 전혀 아닌 것 같아요." "만주가 중국인의 나라도 아니었지만." "네?" "한때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서 중국을 통치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건 좀, 알기는 아는데..." "만주족은 한족과는 다르다. 발해국을 세운 말갈과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여진이 만주족인데 조선 민족의 피도 많이 섞여 있어." "조선 민족의 피요?" 쇼지는 놀랐다. "그래, 조선 민족의 피, 발해국을 세운 사람이 대조영이라고 고구려 사람이었거든. 뿐만 아니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때 북방의 많은 영토를 당에 내어주었고 영토 따라서 조선 민족도 많이 떨어져나가 만주족과 동화했으니까." "역사 시간에 그런 것 가르쳐주지 않아요." "..." 한동안 쇼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가다도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저씨." 쇼지가 말을 꺼냈다. "이 하얼빈은 누가 만들었어요? 만주족이 만들었나요?" "아니지." "그럼?" "러시아가 건설한 도시야." "그럼 일로전쟁 전이군요." "그렇지. 너 보기는 이 도시가 어떠냐?"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래 아름답다. 대련도 참 아름다운 곳이야. 그곳 역시 러시아가 건설한 도시거든. 모두 동양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게 다 각기 다른 민족이 갖는 문화의 특색이다.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그 특색 때문이지." "네." 쇼지는 수굿하게 오가다의 말을 들었다. "하얼빈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흥안령이라고, 아마 지리 시간에 배웠을 게야." "네." "울창한 삼림 지댄데 그 가장자리에 흑룡강이 흐르고 있어. 큰 강이야. 어족이 징그럽게 많아. 아이만한 고기가 잡혀." "정말입니까?" "그럼, 송화강도 크고, 송화강에서도 그런 큰 고기가 잡히지만 말이야." "흑룡강은 러시아하고 국경선 아닙니까?" "그렇지. 우수리강도 그렇고 만주하고의 국경이지. 그런데 그 흥안령 이쪽 지대가 유명한 수렵장이다. 곰이며 순록, 네가 말한 담비 목도리의 그 담비도 그곳에서 대부분 잡히는 거다." "담비! 아저씨 잊지 않으셨지요?" 쇼지는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일구월심이구나." 오가다는 웃었다. "걱정마라. 노력해볼게." "약속했어요?" "음." 동경에서 담비 목도리 얘기가 나왔을 때 구해보겠노라고 한 오가다의 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도 윤광오는 모피 무역을 했기 때문이다. 호텔에 도착한 오가다는 쇼지에게 목욕을 하라고 서둘러댔다. 긴 여행 끝이어서 쇼지는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서둘러 저녁을 먹은 뒤 "쇼짱 나가자." "저녁인데요?" 쇼지는 목욕하고 저녁까지 먹은 탓인지 졸음이 오는 모양이었다. "너랑 가볼 곳이 있어." "어딘데요?" "아저씨하고 아주 친한 사람의 집이야." 쇼지는 왜 아저씨하고 친한 사람의 집에 자기가 함께 가야 하는지 의혹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담비 목도리를 구할 수 있는 분이거든." 오가다는 얼렁뚱땅 둘러대는데 마음속으로는 이미 흥분을 하고 있었다. 쇼지를 보고 광오 부부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담비 얘기가 나오자 쇼지는 싹 달라진다. "네, 가요 아저씨!" 졸음도 달아난 것 같았다. 외투를 챙겨들었고 털모자 목도리 장갑을 쓰고 두르고 끼고 하면서 오가다보다 더 서두르는 것이었다. "쇼짱." "네." "너 어머니가 그렇게도 좋아?" "네, 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젤 좋아요. 아버지두요." "그래? 부럽구나." "아저씨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너처럼은 아니었지만 아저씨도 어머니를 사랑했단다." 쇼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오가다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너를 낳아준 어머니 그리고 나를 쇼지 너는 산카상 부부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네가 내 자식이라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두 사람은 호텔을 나왔다. 마차를 타고 허공로로 향했다. 운회약국은 작년과 다름없이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지만, 독일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소련이 언제 어떻게 밀고 내려올지 알 수 없었지만 허공로는 여전히 번화가였고 불빛도 밝았다. 엄동이지만 초저녁이라 상점의 문들은 아직 닫지 않고 있었다. 문을 밀고 오가다가 먼저 들어섰다. 물자 결핍이 날로 심화되어 운회약국도 내부는 썰렁했다. 광오와 수앵이 부부 두 사람이 난로가에 서 있다가 동시에 "오가다상." 하고 불렀다. 오가다는 재빨리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돌아본다. 쇼지가 급히 약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부부의 눈은 또 동시에 쇼지에게로 쏠렸다. "초정월에 웬일이오." 광오가 물었다. "바람이 그렇게 불었어요." 오가다는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쇼짱 인사해. 아저씨의 친구분이시다." "안녕하세요?" 쇼지는 스스럽게 인사를 했다. "친구의 아들입니다." 부부는 놀라움과 감동으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그래, 잘 왔다. 참 잘 왔어." 광오가 약간 목멘 소리로 말을 했다. "여보, 우리 얼른 집으로 들어갑시다." 윤광오는 수앵을 보고 말했다. "네, 그래요." 수앵의 대답하는 목소리도 목멘 것 같았다.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이들 부부는 쇼지를 보는 순간 인실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오가다가 소년을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쇼지의 얼굴에서 그들은 역력한 인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정말 꿈같네요. 오가다상."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수앵이 말했다.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아저씨 어디 가는 거예요?" 쇼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에, 집에 가는 거다." "집이 따로 있어요?" "그럼. 가까운 곳에." 광오와 수양은 앞서가면서 뒤따라오는 오가다와 쇼지를 뒤돌아 보고 뒤돌아보곤 했다. "어쩌면 아이가 저렇게도 잘생겼지요? 너무 놀랬어요." "인실씨를 많이 닮았어." "네, 그래요. 어디서 만나더라도 단박 알아볼 것 같았어요." "오가다상 굉장히 흥분했어." "얼굴이 벌개져서... 얼마나 마음이 착잡할까." "착잡하기는, 저 친구 개선장군 같은 기분일 게요." "그럴까요? 저는 가슴이 아플 것 같아요. 아들이라 말하지도 못하는 오가다상의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미래가 있질 않소. 괜찮아. 그에게는 정말, 저 아이가 축복이오." 대강 조찬하하고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그간의 사정도 알고 있는 이들 부부였다. 처음 오가다와 쇼지가 약국으로 들어섰을 때 광오나 수앵은 단박에 인실의 아들인 것을 짐작했고 그 어려운 부자 상봉의 절차를 끝 낸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가다를 따라올 아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말하지 말라는 신호로 오가다가 입술에 손가락을 얹은 것도 그렇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오가다를 아저씨라 부르는 통에 내심 이들 부부는 실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간 오가다상은 열심히 살았어. 애처로울 만큼, 세상에 저런 사내도 드물 거요." 오가다가 하얼빈을 자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윤광오도 볼일이 있어 신경으로 가게 되면 오가다를 만나곤 했다. 보가 더 확실하게 말을 한다면 윤광오는 사업상 출장을 가장하고 조직에서 부여한 임무를 띠고서 신경에 나타나는 것이며 때에 따라서는 오가다의 숙소, 사택을 이용하여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동지의 피신처가 된 일도 있었다. 부산 여관에서 찬하를 보고 오가다는, 비밀에는 함구하는 방간자일 뿐입니다. 그런 묘한 말을 했는데 바로 윤광오와의 관계를 두고 그랬던 것이다. 언젠가 윤광오는 오가다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이런저런 얘기 끝에 "중국인 조직을 운영하는 데나 조직 생활에 상당히 숙달돼 있는 것 같소. 성질이 느긋해서 그런지 신해혁명 이후 계속되는 혼란에 단련이 되어 그런지, 조선인들은 그 점에 있어서는 아직인 것 같아요. 비밀 보장이 상당히 어려워." 무심결에 한 말이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너 입 조심해,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윤상." 오가다는 상당히 취해 있었는데 갑자기 정색을 하고 불렀다. "변명한다고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그것을 극복하는 데 이십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소." 광오는 그때 어리둥절해하며 오가다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입니다. 나는 내 개인의 사랑을 애국이라는 가치보다 우위에 둡니다. 왜냐하면, 내 조국이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히도미(인실)상은 자신은 희생하며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지요. 그것은 핍박받는 내 민족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히도미상과 같은 입장에 선다면 당연히 내 사랑을 희생시켰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입지의 표명인 동시 순진한 사람 이용한다는 윤광오의 자책과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둔 불안에 대하려 쐐기를 박는 말이기도 했다. 따뜻한 불빛이 새나오는 집 안으로 일행은 들러갔다. 집안은 포근하고 정돈이 잘되어 있었으며 중국식 러시아식의 절충된 듯한 장식품 가구들, 쇼지는 그것들이 신기한 듯 사방을 둘러본다. 순일본식 가옥과 가구 집기에 길들여진 쇼지에게는 이같은 집안 내부가 썩 흥미로웠던 것 같았다. 오가다도 마음이 놓인 듯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향기 짙은 차를 끓여 내왔다. "어떻게 함께 오게 되었소?" 광오가 물었다. "동경에 갔다가 우연히, 그리 되었어요. 이 애 아버지랑 함께 왔지요." "그분은 그럼?" "신경에서 헤어졌습니다. 치치하얼, 하일라르에 갔다가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했어요." "그곳에 무슨 용무라도 있어서?" "아니오. 본래 그 양반 여행광이거든요. 몇 해 동안 꿈쩍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새처럼 혼자 날고 싶었을 겁니다." 수양은 편안해 보이는 연초록빛 옷으로 갈아입고 아주 예쁜 접시에 과자를 담아 들고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봄이 온 것처럼 화사했다. "쇼짱 이거 먹어요." 수앵의 입에서 쇼짱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오가다를 통해 수없이 들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쇼지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먹어." 광오도 쇼지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모자를 벗고 장갑도 벗고 외투까지 벗어버린 쇼지는 광오와 수앵의 눈에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를 바라보는 내외의 눈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감동이 지나간다. "쇼짱 이곳은 몹시 춥지?" 수앵이 또 말했다. "굉장이 추워요." "이제 안 춥지?" "네, 따뜻합니다." 수앵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언니, 인실언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어요?' 수앵의 귀에서 인실의 통곡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여보." 광오가 힐난하듯 쳐다보고 오가다는 당황한다. 쇼지는 더욱더 의혹에 찬 표정이다. 수앵은 얼른 눈물을 거두었다. "오가다상 우리 술 좀 할까요?" 광오는 분위기를 휘저어버리듯 말했다. "아, 아닙니다. 일찍 가서 자야 합니다. 피곤할 테니까." "호텔로 갈 거요?" "네." "그만 여기서 자지." "그렇게 하세요." 수앵이도 권했다. "아, 아니 가야 합니다. 내일 또 오지요. 그보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 "담비 목도리 구할 수 있을까요?" 순간 의혹에 차 있던 쇼지 얼굴에 기대와 기쁨이 나타났다 "그건 뭐하려구?" "쇼짱의 소원입니다. 어머니한테 선물할 거랍니다. 효자거든요." 그 말에 광오와 수앵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요." 광오 대답에 "정말입니까 아저씨!" 쇼지는 뛸듯 좋아했다. "그래. 나 전에는 모피 장사를 했거든." "그, 그럼 우리 누나." 하다가 흥분한 쇼지는 말을 잇지 못한다. "저 그 러시아 여성들이 끼는 자그마한 털토시 있지 않습니까?" 오가다가 대신 말했다. "아아 그거." 하다가 광오는 웃는다. "약속했거든요. 같이 못 와서 불쌍하기도 하구요." "알았어. 걱정 마라. 이 아저씨가 꼭 구해주겠다. 그래 만주에 와보니 기분이 어때?" "아버지하고 함께 왔으면 최고였을 거예요." "곧 오실 건데 뭐." "그래두요." 수앵의 시선이 오가다에 갔다. 오가다는 웃고 있었다.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 광경이 인실에게 전해질 것을 믿으면서. "쇼짱의 아버지 어머니는 참 좋으신 분인가 봐." 수앵이 한숨 쉬듯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요, 동상 걸릴 거라고 막 걱정하셨어요. 모자 장갑 잊지 말고 쓰고 껴라, 막 잔소릴 하시잖아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오가다는 일찍 자야 한다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함께 호텔까지 따라가겠다는 광오의 말을 뿌리치고 나선다. "소년아, 우리 악수하자." 광오가 쇼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쇼지는 웃으며 손을 잡았다. 수앵이도 쇼지의 손을 잡으며 "잘 가아. 그리고 오가다상." "네." "내일 아침은 집에 오셔서 잡수세요." "그러지요. 맛있는 것 많이 장만해주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진수성찬으로 차릴게요." 그들과 헤어져서 오가다와 쇼지는 거리로 나왔다. 오가다는 쇼지의 어깨를 감싸 안듯 걷는다. "춥지?" "괜찮아요." 마차가 또각또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마차를 탄다. "아저씨." "응." "좀 이상해요." "뭐가?" "그 아주머니 왜 울지요?" "그, 그건." 오가다는 당황한다. "그건 말이야, 그 아주머니한테는 아이가 없거든. 그래 슬퍼서 그러시는 거다." 그것으로 쇼지는 납득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어째 저의 이름을 아시죠?" 하고 물었다. "내가 널 그렇게 불렀으니까. 안 그랬든가? 하긴 친한 사이니까 동경 갔다 오면 쇼짱 얘길 하기도 하구." "그래요? 그분들하고 어떻게 친해졌지요?" "윤상은 동경서 공불 했거든." "아아, 그랬구나. 아주머니는 미인이지요?" "그럼. 그분은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러시아에서 자랐다." "그거 정말입니까?" "정말이지 않고." "일본말을 잘하시던데요?" "중국말도 썩 잘하시지." "그래요?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면." "이민간 거지. 부모가." 마차가 멎었다. 호텔 앞의 가등이 호텔 건물 일부를 비춰주고 있었다. 5장 평사리의 어둠 섬진강이 풀리기 시작했다. 강둑에는 쑥을 캐는 아이들 아낙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봄은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는 듯싶었고 그러나 강바람은 아직 매웠다. 나룻배 뱃삯도 내기가 어려운 가난뱅이 부자가 갈비 둥치를 올려놓은 지게를 지고 읍내로 향하는 길인지 걷고 있었다. 때묻은 수건을 목에 감고, 바람을 안으며 가기 때문인지 코가 빨갛다. 아비는 오십을 넘긴 듯 아들은 열네댓 살쯤. "아부지." "칩다, 잠자코 걸어라." "갈비 팔믄 간개기 두어 마리 사입시다." "팔리야만 개기를 사든지 말든지, 배급 소금도 사얄 긴데." "할매가 개기 노래를 불러쌓십니다." "..." "설도 새야 한께요." "칩다, 어서 걸어라." 이때 마을 길에서 장연학이 걸어 내려왔다. "나무 팔로 가요?" 연학이 먼저 물었다. "야, 설 새로 가십니까?" 연학은 출타 차림이었다. "그렇구마. 육로로 갈라 카요?" "나무 한 짐 얼매나 받을 기라고 나룻배 타고 우쩌고 하겄소." "가만 있자아, 얼매나 받을 기요?" "머로요?" "나무 말이오." "시세를 알아야제요. 장에 가서 남 파는 거 봐감서." "날 따라오소." "야?" "날 따라오라니까." 비로소 나무를 사겠다는 뜻을 알아차린 사내는 "가자, 수야!" 목소리에 힘이 돌아왔다. 연학은 발길을 돌렸고 부자는 길을 꺾었다. "모두 고생이오." 앞서가며 연학이 말했다. "시운이 나빠서." 뒤따라가면서 사내는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지 그런 말을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웃담에 사는 박서방이었는데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지만 연학은 그의 형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모레가 음력 설인데 나무 팔아서 제수 장만할 요량인 모양이구마, 못 팔믄 허행할 거 아니가. 이 단대목에.' 연학이 박서방 부자를 데리고 간 곳은 최참판댁 아닌 성환의 집이었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귀남네는 마실을 갔는지. "여기 내리놓으소." 연학은 마당을 가리켰다. "우리 아아 거는 우짤고요?" "함께 내리소." 아비의 갈빗단은 컸고 아들의 갈빗단은 작았다. "음 그라믄." 하다가 연학은 오원 짜리 지폐 한 장을 품에서 꺼내었다. "저기 거슬러줄 돈이 있어야제요." 박서방은 난감해했다. "큰 단은 삼 원이고 작은 나뭇단은 이 원, 나도 시세는 모리오. 우선 그렇게 받아두소." "그런께... 면소 서기 월급이 삼십 원이라 카든지, 하므는 오원이라, 그거는 안 되제요." "...?" "나중에 도둑놈 봇장 소리 듣고 접지 않구마요." "값이야 내가 정한 거 아니오. 잠자코 집어넣으소."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성환할매가 더듬거리며 기다시피 하며 마루로 나왔다. "자, 장서방가?" "야." "설 새로 간다 카더이." "나무 두 단 갖다놨십니다." "나무를? 그거는 와 가지고 왔는고? 귀남아 귀남아!" "마실 갔는지 없네요." "방금 있었는데?" 더듬거리며 마루에서 내려오려는 것을 연학이 말린다. 빈 지게 진 박서방 부자가 우두커니 그 광경을 바라본다. "그만 방에 들어가시이소. 그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믄 우짤라고?" "아, 아이다." "허허 참." 성환할매는 눈이 멀었던 것이다. 성환이 학병에 끌려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눈이 멀고 말았다. 남희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차중에 성환의 소식은 결국 노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진주에서 병을 고친 남희는 지금 도솔암에 가서 정양하고 있었다. "그라믄 다니오겄십니다." "그, 그래라." 성환의 집에서 나오자 "노인네가 참 딱하게 됐십니다." 박서방이 말했다. "시운이 나빠서." 연학은 자조하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박서방이 하던 말을 되풀이 한다. 겨울 까마귀가 무리를 지어 날아간다. "덜 서러바서 눈물도 나지, 직통으로 당하고 보믄 눈물도 안 나는 기라요." 박서방이 부스스 하는 말이었다. 바람을 안고 읍내까지 갔다가 운수 불길하면 나무도 못 팔고 온종일 부자가 장터에서 떨었을지도 모르는데 마을 길에서 다행히 나무는 처분이 되었고 게다가 적잖은 횡재도 한 셈인데 박서방은 연학을 만난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빈 지게, 가벼워진 지게를 지고 어른들 뒤에서 우쭐우쭐 걷는 아들만은 마냥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누가 끌리나갔소?" 연학이 물었다. "대동지란을 나라고 우찌 피할 깁니까. 이런 시절에는 무자식이 상팔자라, 한 놈도 아니고 둘이나 뺏아갔소. 비리갱이 겉은 막네놈 하나 냉기놓고." "무자식이 상팔자라... 맞는 말이오. 징용에 갔소?" "야." "하기야 머, 징용이나 군대에 가는 거나 그기이 그거지." 그리고는 말이 끊어졌다. 마을은 온통 비어버린 듯 조용했다. "장주사." 연학은 고개를 돌려 박서방을 쳐다본다. 검붉은 얼굴보다 목에 더 많은 주름이 널려 있었다. 입춘이 지나갔다고는 하나 옷이 엷었다. "석이어무이 살아온 내력을 다 압니까?" 성환할매라 하지 않고 그는 석이어무이라 했다. "대강은 들어서 알지마는 와요?" "장주사는 이곳 태생이 아닌께 저저이는 모릴 깁니다." "..." "석이가 지금 살아 있다믄 나이가 나보다 한두 살 아래, 아마 그리 됐일 깁니다. 어릴 적에는 함께 나무도 하러 댕깄고 강가에 매욕도 하고... 그런 동무였소." 하다말고 박서방은 꼬깃꼬깃 접은 소매 끝을 풀어서 피우다 남은 담배 꽁초를 하나 집어낸다. 그것을 입에 물더니 성냥개비 하나를 꺼내 들고 슬그머니 쭈그리며 앉아서 길가 바위에 성냥을 그어 불이 일자 바람을 두 손으로 막으며 조심스럽게 불을 붙인다. 일어선 그는 시원하게 연기를 내어뿜는데 다시 갈가마귀 떼가 요란스럽게 울어대며 푸른 보리밭에 내려앉는다. "동네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그때였소. 세세히 다 말을 하자 카믄 길고, 아무튼 그때 석이아부지가 왜놈 병정한테 붙잡히서 끌리가는데, 지금도 눈앞에 선하요. 신발짝을 벗어 들고 아부지! 아부지! 함시로... 울고 따라가든 석이 생각이 납니다. 그때, 사람들이 조준구 그놈을 직이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건데." "직일라꼬 찾았으나 못 찾았다 그러더마." "그러씨, 그랬이믄 석이아부지는 죽지 않았을 깁니다." 박서방은 말을 끊고 담배를 깊숙이 빨았다. 그리고 연기를 토했다. "석이어무이도 참 기박한 팔자요. 눈이 멀게도 됐십니다." "그러나 아직은 다아 산 거는 아닌께 내일 일을 우찌 알겄소." 갈림길까지 왔을 때 박서방은 지게를 벗어 아들 지게 위에 얹었다. "니는 집에 가거라." "아부지이, 나도." "허허어, 할 일 없이 머할라꼬?" "그라믄 아부지." "..." "개기 사올 기지요?" 박서방은 아무 말 않고 걸음을 옮긴다. "아부지이!" "어 가거라." 돌아보지 않고 손만 저었다. 나루터까지 왔다. 나룻배를 기다리는 동안 박서방은 말이 없었고 연학이 역시 말이 없었다. 성환할매가 눈이 멀었다는 말을 듣고도 연학은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솔암에 다녀온 후 찾아갔다. 성환할매는 모든 희망을 다 놓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도솔암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지만 남희가 어떻든가 묻지도 않았다. 연학은 성환할매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기운 내이소." "..." "조금만 참으시이소. 일본놈들 곧 망할 깁니다. 그라믄 석이도 돌아오고 성환이도 돌아올 깁니다." 그 말에 심봉사처럼 눈을 뜬 것은 아니었지만 희미한 희망의 줄을 거머잡은 듯, 그러나 성환할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안 속겠다는 그런 몸짓이었다. 이제는 속지 않겠다. "남희도 잘 있십니다. 병도 나았고." 아무도 모르는 병명, 남희 본인조차 모르는 병, 허정윤과 자기만 아는 그 참혹한 병명은 어떠한 무게보다 무겁게 연학을 휘청거리게 한다. "아아가 마음만 좀 돌리묵으믄 될 깁니다. 신경이 아주 약해져서." 말을 하면서도 연학은 남희가 과연 할머니 품에 돌아올 수 있을는지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중이나 되어라, 연학의 기분은 그러했다. 세상에 나가서 그 아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남과 같이 웃고, 신명을 내고 화를 내고, 그 측은한 모습을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멍청해 있기라도 하니 망정이지. '차라리 중이나 되어 살아라. 부처를 의지하고, 세상 꼴 보지 말고.' 나루터에 서서 연학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마음속으로 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뿌리치기라도 하는 듯 "살기가 어렵겄소. 장골이 둘이나 빠져나갔이니 농사도 그렇고." 하며 박서방에게 말을 걸었다. "머어... 목구멍에 죽물이라도 넘어간께 살고 있는 기지요. 언제는 안 그랬건데요? 술잔이라도 마시믄 그때가 잠시 잠시 극락이고 버둥거리봐야 그거 다 허사요." 한이 된다는 말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희망이 없는 캄캄 절벽, 어디서 빛줄이 새어들어 한을 풀 새날을 기다려본단 말인가.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은 비단 성환할매나 박서방뿐만은 아니었다. 최서희도 지금 평사리에 내려와 있었다. 날개 찢긴 나비같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파닥거리지도 않았고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조용하게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석꾼 살림의 최서희나 나룻배 뱃삯을 선뜻 내놓을 수 없는 박서방이나 눈이 멀어버린 성환할매, 살아보고 싶은 뜻을 잃은 상태는 매일반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평등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귀신도 달랜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이다. 산 사람도 달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하물며 서천으로 넘어가는 해를 그 누가 잡을 것이며 망망대해로 흐르는 물은 누가 막을 것인가.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 전쟁이요, 작은 섬나라 대일본제국의 야망이야말로 칼로써 귀신을 잡으려 하니, 재앙은 인간 스스로 만들고서 그 스스로도 덫에 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 갈 깁니까?" 박서방 말에 연학은 현실로 돌아온다. 어느새 나룻배는 와 있었고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박서방과 연학도 배에 올랐다. 배가 강심 쪽으로 나갔을 때 별안간 아이 울음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픈갑다." 중늙은 여자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댁네는 업고 있던 아이를 가슴 쪽으로 돌렸다. 한때는 꿈과 희망이 서렸을 유록색 저고리는 구겨져 있었고 동정도 새까맣게 때묻어 있었다. 빛을 잃은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댁네는 가슴에 품고 온 젖병을 아이 입에 물린다. 어린아이는 눈과 코뿐이었다. 말라비틀어져서 참으로 두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꿰맨 장갑을 낀 아낙이 "젖이 안 나오는가 배요?" 하며 들어다보다가 "아이구! 애참해라. 이 아이 성상 보소. 젖배를 곯아서 이렇구나." 혀를 끌끌 찬다. "갈 기거든 아아새끼나 맨들지 말고 가든가." 친정어머니인 듯 중늙은 여자는 악에 받친 듯 말했다. "그라믄, 아이구, 꽃봉오리 겉은 나이에 아아아배가 죽었단 말이오?" 아낙은 거듭 혀를 찬다. "죽었다믄 죽었거니 하고나 살제요." "보국대에 나갔는가 배." "보국댄지 죽을댄지... 젖이라도 나오믄 좀 좋아? 에미 새끼 한꺼번에 말라 직이겄네." "어무이 그만 하소." 젊은 댁네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콧물이 손등 위에 떨어졌다. 아이는 고무 젖꼭지를 얼마 빨지도 못하고 젖꼭지를 내뱉으며 또 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흐느끼다가는 또 운다. "초산인 모양인데 호욕 가다가 놀라거나 뇌심초사를 하믄 젖이 안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더마요." "남정네가 떠나자 아일 낳았이니 무신 온정신이었겄소. 그만 하늘하고 땅하고 딱 붙었이믄 좋겄소." 중늙은 여자는 눈물을 닦는다. "말미도 안 주고 사람을 그렇게 잡아가는 법이 어디 있겄소? 못 살아요, 못 사요." "예삿일 아니네. 설탕이며 꿀이며 흔한 시절에도 젖 없는 얼라를 키울라 카믄 골병이 드는데 설탕이 금탕값인 요새 정말로 예삿일 아니요. 아아가 꼬지꼬지 말라서." "금탕이나마나 구할 수는 있고? 돈도 없지마는." "그라믄 암죽은 우떻기 하요?" "에미가 쌀을 씹어서 끓이요. 그런다고 얼매나 단맛이 나겄소." 주거니받거니 하는 말을 귓가에 흘려 들으며, 하동 나루터에서 연학은 배에서 내렸다. "박서방, 그라믄 장봐 가소." "야, 살피 가입시다. 고맙구마요." 처음으로 박서방은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들은 헤어져서, 한 사람은 장터로, 한 사람은 차부로 향한다. 이튿날 정오 가까이, 하동읍 차부에 내린 환국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부사댁을 방문했다. 마침 이시우와 그의 아내, 아이가 와 있었다. 집안 분위기는 암울했다. 내일은 설이었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음식 장만은 간소하게 하기는 하는 모양이었지만. 환국은 마루에 외투를 벗어놓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박씨에게 절을 올린다. "신색이 말이 아니구먼. 하기는 왜 안 그렇겠나. 양가가 다 이 무슨 날벼락인지." 절을 받고 나서 한 말인데 실은 박씨 자신의 신색도 말이 아니었다. 이시우의 얼굴도 까칠해 보였다. "설마 민우한테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부디 마음을 단단하게 가지셔야 합니다." 환국의 위로의 말이었다. "가부간에, 소식이나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답답해서." "무모한 짓 할 사람도 아니구, 연락을 취할 형편도 아니잖습니까." "그리 생각하다가도... 윤국이처럼 나가는 편이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구." 한동안 침묵이 지나갔다. "그럼 저는." 환국이 일어섰다. "시각이 중천인데 점심이나 들고 가게." 붙잡듯 박씨가 말했다. "아닙니다. 가봐야겠습니다." 평사리에 자주 내려오는 일도 없었고 작년까지만 해도 설명절은 진주에서 지냈다. 그러나 평사리에 올 때는 대개 이부사댁에 들르곤 하는 환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다. 갈 길이 바빠서도 그랬겠지만 늘 기분이 서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집에서는 존중받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도 있었다. "형님, 저도 함께 가지요." 시우도 일어서며 말했다. "자네가? 그럴 것 없네." "갔다가 저녁때 내려오지요 뭐." "그래 다녀오너라. 어머님께서 상심이 얼마나 크겠느냐." 뜨악해할 줄 알았는데 박씨는 뜻밖에 선선히 권했다. 인연도 깊었고 골도 깊은 양가의 오랜 관계, 그러나 서로가 같은 어려움에 처하고 보니 박씨 마음에 쌓인 앙금이 다소는 가라앉는 것 같았다. 대문을 나서면서 시우가 물었다. "가족은요?" "집사람이 임신중이네." 우울하게 환국은 대답했다. 장터를 질러서 나루터를 향해 간다. 설 단대목이건만 장터는 썰렁했다. 시든 파며 남새를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은 아낙의 파란 입술, 객지에서 설을 쇠야 하는 늙은 장돌뱅이가 마른 명태 몇 짝을 내어놓고 멍하니 곰방대만 빨고 있는 모습. 봄은 아직도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과연 그들에게도 봄 한철은 있었을까? 두 사람은 나루터에 가서 마침 떠나려 하는 나룻배에 오른다. 그리고 평사리까지 가는 동안 두 사내는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적은 선객들도 말이 없었으며 배 안에는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온 김영호 부부도 있었다. 몽치도 있었다. 영호는 국민복을 입고 있었고 숙이는 자주색 솜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있었다. 환국은 뱃전에 서서 대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에 영호 부부를 보지 못했다.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인사를 하고 지낼 처지는 아니었지만. 영호나 숙이는 환국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영호는 양가의 내력 때문에, 숙이는 윤국의 형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환국을 강하게 의식했다. 배가 평사리에 닿자 서둘러 내린 환국과 시우는 곧장 마을을 향해서 갔고 영호 일행은 꾸무럭거렸다. 배에서 내린 뒤에도 꾸무럭거렸다. "새키 가입시다. 차분데 머를 꾸무럭거리고 있소?" 양손에 짐을 들고 앞서가던 몽치가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 숨 넘어가나? 엎어지면 코 닿을 긴데 서둘기는 왜 서둘러." 영호의 볼멘소리였다. 그러한 남편을 숙이는 힐끗 쳐다본다. 환국이와 시우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의 냉기가 두 사람의 이마를 치는 것 같았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같이, 집이 큰 만큼 그 황량함도 어떤 괴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겨우 뒤뜰 우물 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달가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제수는 마련된 모양이었으며 음식도 만드는 것 같았다. 마루로 올라간 환국은 방 앞에서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낮은 서희의 목소리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시우도 왔습니다." 서희는 눈을 들어 시우를 쳐다본다. 한순간 그의 눈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보료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서희는 들어서는 시우를 보는 순간 이상현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서희는 세웠던 한쪽 무릎을 누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바쁠 터인데 오기는 뭐하러 와." 혼잣말같이 서희는 중얼거렸다. 얼굴은 여위었고 핏기가 없었다. 몸도 졸아든 듯 조그맣게 보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런 모습이 왠지 앳되 뵈는 것이다. "저녁때 내려가면 됩니다. 절 받으십시오." 시우가 절을 한 뒤 환국이도 말없이 절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동에는 언제 왔는가?" "어제 저녁때 왔습니다." "어머님이랑 모두 근심이 많으시겠다." 그러고는 말이 뚝 끊어졌다. 환국이와 시우는 그런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자신을 꽁꽁 묶어놓은 듯, 입이 붙어버린 듯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옛날의 그 도도했던 위엄은 사라졌으나 그와는 또 다른, 그것은 다만 침묵이었는데 매우 이상한 힘으로 압도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타나지 않는 눈물이었는지 모른다. 나타나지 않는 절망 비통이었는지 모른다. 마침 환국이 돌아온 기척을 알아차린 안자가 나타났다. 서희는 안자에게 "손님 점심을 준비하게." 하고 이른다. "그러면 어머님 저희들은 물러가겠습니다." 환국이 말에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국이 내려올 것을 예상하고 계속 불을 지폈는지 사랑의 방은 따뜻했다. 방안은 정갈했으며 하얀 장지문으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안자가 잽싸게 차를 끓여 왔다. "어머님은 늘 저러고 계시었소?" 환국은 안자에게 물었다. "대개는... 별당에 더러 나가시기도 하고, 일전에는 사랑을 둘러보시더니 돌아가신 아버님이 몹시 무서웠다는 말씀을 하시더군. 좀처럼 그런 말씀은 안 하시는데." 안자는 시우의 기색을 살펴가며 말했다. 안자는 나갔다. "윤국이는 어떻게 안 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시우가 말했다. "본인의 의사였지. 뾰족한 대안도 없이 설득하려 했지만 완강했어. 도망을 다닐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고, 훈련이 끝난 뒤 다행히 중국 쪽으로 가게 된다면 탈출 할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의사를 굽히려 하지 않았다." "대부분 중국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일본군을 남방으로 빼내자면." "글쎄... 그건 희망 사항이지. 꼭 그렇게 되리라 어떻게 믿어?"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남방으로 배치된다면... 절망이지. 뭐라 말할 수가 없어. 너무 괴로워." "저기 혹." "..." "양현이 땜에..." 조심스럽게 말을 하다 만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나 그렇지는 않아. 윤국이는 뭔가 확고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더구먼." "기회가 오면 팔로군으로 넘어간다 그겁니까?" "그런 말은 안 했어. 그러나 중국이나 만주 방면이라면 전혀 발붙일 곳이 없는 것도 아니구." "상처는 컸을 겁니다." "컸겠지. 성질이 강하면서도 내성적인 면이 있으니까." "어떻게 세상 사는 것이 이렇게도 뜻대로 안 되는 걸까요? 악이 존재하는 때문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우문이다." "압니다." "자네는 어떤가?" "뭐 말입니까?" "경찰에 시달리지 않는가?" "성가시게 굴지요. 병원으로 찾아오는 데만 그치지 않고 하동까지 와서 연락이 있을 것이다, 말해라 하는 식으로 어머니한테 공갈협박도 하니까요." "그랬을 게야." "하지만 민우가 일본에서 행방을 감추고 조선으로 나온 흔적이 없으니까 아무리 닦달을 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지요." "일본에서 숨어버렸다면 몸 붙일 만한 곳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닐까?" "그런지도 모르고, 제발 그러기를 바라고 있지만 즉흥적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성질도 있어요. 어머니가 근심하시는 것도 그 점 때문입니다. 어디서 죽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도 하시는 모양인데 이제는 하늘에다 맡겨야지요. 일본으로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이 시기를 길게 끌면 전문학교 대학교뿐만 아니라 중학교도 문을 닫게 될 게다." "그렇겠지요." 점심상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사랑 뜨락에는 까치가 와서 울었다. 어디서 반가운 손님이 올 거라고 우짖는지. "지금 양현이는 어디 있습니까?" 시우가 갑자기 물었다. "인천에." "왜 내려오지 않지요?" 시우는 미안한 마음을 노여움으로 나타내었다. "집안이 이 지경 됐는데 정신이 있는 아입니까?" 환국의 표정은 미묘했다. 미묘했기보다 착잡했다. 이시우가 양현의 배다른 오빠라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오늘 새삼스럽게 그가 양현의 육친인 것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지, 그것은 양현과의 거리를 인식한 때문인지 모른다. 필경에는 남이었구나 하는 서글프고 괘씸한 마음, 그런 성질이었을 것이다. 환국이 말이 없자 시우는 몹시 겸연찍어했다. 공연한 말을 꺼내었다 후회를 하면서도 그쯤 해서 말을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용서 안 하시지요? 그러실 겁니다." "말씀이 없으시니 낸들 어찌 알겠나." 시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하던 양현의 고백을 생각했고 환국은 송영광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얘기는 관두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해거름에 시우는 떠났다. 환국은 혼자 된 방에서 남몰래 울었다. 적막강산, 고립무원, 한사람 한 사람 떠나가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 곁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갔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위엄에 차 있던 어머니가, 찬 이슬에 날개를 접은 나비같이 숨만 쉬고 있는 것 같은 안방의 어머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환국은 부친이 형무소에 수감될 때 울지 못했던 것을 합하여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모른다. 윤국이 학병으로 나가게 된 것은 너무나 졸지간의 일이었다. 설마 했었다. 나이가 많은 데다 농과대학은 이미 졸업했고, 그러나 그보다 나가겠다는 의사를 끝끝내 굽히지 않았던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어디서 뭐가 어떻게 잘못 되어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환국은 시일이 지날수록 그렇게도 대응할 방도가 없었는가, 그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이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회한이 날이 갈수록 쌓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반쪽이 잘려나간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전등에 불이 켜졌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환국은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전등이 켜지자 방안은 더욱 환해졌다. 도배한 지 며칠이 안 되었는가 상기도 종이 냄새 풀 냄새가 코끝에 풍겨왔다. 연학의 도배 솜씨인 것을 환국은 짐작했다. '아저씨가 계셨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아내 덕희가 임신한 것은 사실이나 여행을 해도 지장이 없는 시기였으니까 데리고 오려고 했으면 같이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철없는 덕희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섣불리 양현의 얘기라도 꺼낸다면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고 어머니의 상심이 깊어질 것을 생각하고 환국은 혼자 내려온 것이다. 덕희의 존재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환국을 더욱 외롭게 했다. 막내딸로서 응석받이로 자란 때문인지 문제의 심각성에는 별관심이 없는 그를 볼 때 환국은 타인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럴 때 양현이가 어머니 곁에 있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은 잠시였다. 떠날 때 윤국의 모습이 시야 가득히 들어섰다. 우울했다기보다 쓸쓸한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환국은 그가 양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어떡허든 살아야 해. 어떡허든 돌아와야..." 목이 메어 말끝을 맺지 못하는데 윤국은 웃기만 했다. 쓸쓸하게. '말할 기집애!' 차마 나타나지는 못하고 명희 집에 와서 양현이 울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덕희는 "이중 인격자예요. 그럴 수 있어요?" 하고 맹렬히 비난했다. "모르거든 가만히 있어요!" 환국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덕희는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이시우에게도 그런 말을 했지만 양현이 때문에 윤국이 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만일에 양현하고 결혼을 했다든지 양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윤국이 떠나는 모습이 그렇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병신 같은 자식, 그렇다면 왜 진작 의사표시를 못했나! 나이가 몇 살인데? 삼십이 다 돼가지고.' 마음이 약해서도,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그랬던 것도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남매간이라는 의식을 극복하기 어려워서 그랬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국이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낸다기보다 그것은 윤국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연민이었다. 안자가 와서 저녁상 가져올까 보냐고 물었다. "아니, 생각없습니다." 환국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재영아버지까지 이러면 어떻게 해? 정말 이러다가는 큰일나겠네." "나 괜찮소. 걱정 마십시오." 울어서 눈이 부숭부숭한 환국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으나 마루를 질러나가면서 안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명절이 어디 있어? 초상집이지. 양현이라도 함께 왔으면 좋쟎아? 심란해 죽겠는데 바람까지 불고." 간도에서 이곳까지 따라왔던 안자였다. 환국이 윤국이, 그리고 양현을 기르다시피 했던 인연이고 보면 그도 마음은 아팠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말 이같이 쓸쓸하게 살을 맞이해야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밖은 아주 어두워졌고 바람이 불었다. 그것도 큰 바람이 일 모양이다. 멀리서 기차가 달리는 소리와도 같이 바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자가 가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둠을 찢어발기듯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환국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달려나간다. 건이아범과 건이네도 쫓아 나왔다. 대문을 열었을 때 대문 한 귀퉁이에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전지 가져오시오!" 환국이 말에 건이아범은 되돌아서 뛰어가고 안자도 달려나왔다. 전지를 가지고 나온 건이아범이 그곳을 비췄을 때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그냥 계속하여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엽이엄마 아니오?" 건이네가 놀라서 소리쳤다. "대체 무신 일이오?" 건이아범이 물었다. 바람이 나무를 뒤흔들고 있었다. 옷자락이 마구 나부끼고 머리칼이 곤두섰다.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집 안으로 데리고 가시오." 환국이 말했다. 안자와 건이네가 부축하다시피 엽이네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서희는 대청에 나와 서 있었다. "마님 요, 용서하시이소." 엽이네는 연신 울면서 말했다. 불빛 아래 나타난 그의 형상이 처참했다. "엽이엄마, 할말이 있으면 우리 방으로 갑시다." 건이네가 엽이네 팔을 잡아끈다. "관두어라." 서희 말이었다. "내게 할말이 있는 모양인데." "무슨 할말이 있겄십니까." 하다 말고 엽이네는 다시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날씨가 찬데 어머님은 간신히 엽이네를 달래며 안자가 거처하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통곡을 멈추었으나 엽이네는 흐느껴 울었다. 가엾은 짐승같이 울었다. 환국은 그들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어, 어디 가, 가서 말할 곳도 없고, 무작정, 무작정... 여길 왔십니다." 겨우 말을 하려 했으나 엽이네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때묻은 옷, 손등은 갈라져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머리며 얼굴이며 마치 불에 그슬러놓은 사람 같았다.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건이네가 환국에서 대충 설명을 했다. 개동이아비 우서방이 죽었을 때 그 현장에서 목격을 한 엽이네가 재판정에서 증언을 했고 그 증언으로 오서방의 형이 가벼워진 얘기며 그것으로 인하여 우서방네 식구들이 엽이네를 그 얼마나 핍박했는가, 개동이가 면소 서기가 되면서, 징용을 뽑을 때 첫째로 끌어낸 것이 엽이였고 둘째아들이 열여덟이던 작년 이맘때 둘째마저 끌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엽이 식구들이 야간 도주한 일, 대강 건이네의 얘기는 그러했다. "엽이엄마, 그 동안 어디 가 있었습니까?" "부, 부산에." "뭘 하구요." "처음에는 부자가 지게품도 팔고 그,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했는데 그, 그만." 엽이네는 허리를 꺾듯 방바닥에 엎드려 또 울기 시작했다. "허 참, 이러지 말고 얘기를 하소. 서방님이 기시는데 이라믄 되겄습니까." 건이아범이 짜증을 내듯 말했다. "길, 길 가다가 둘째놈도 잽히갔소!" "어디로요?" "징용, 어이구우." 건이네는 엽이네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래서 어찌 되었어요? 얘기를 해야만 방도를 생각해도 할 거 아닙니까? 서방님 계실 때 얘길 하세요." 건이네는 옛날 서울 조준구 집에서 훈련된 대로 여전히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애 아배는 벵이 나고 비사리 겉은 제집아아하고... 묵고 살 길이 없었소." 엽이네는 겨우 울음 소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자, 그라고 왔십니다. 얼썽겉은 집에 와보이... 애 아배는 시적 죽을 것 겉고 제집아이는 꽁꽁 얼어서... 제우 나무 한 단을 얻어다가 군불을 때놓고, 문짝도 없어진 방에 거적을 쳐서 애 아배를 눕혀놓고 보이 내일 우떻기 될갑세 오늘밤은 살겄고나." 하다 말고 엽이네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안는다. "생때겉은 내 자식, 둘이나 잃고 모진 에미 그래도 못 죽고 돌아 안 왔십니까?" "잘 돌아왔어요. 아들이야 전장에 간 것도 아니고 돌아올 날을 기다려야지요." 건이네 말에 엽이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입니다. 가믄은 살아서 못 돌아온다 모두 그럽디다." "그건 그렇고 무신 일로 여기 왔는가 그거나 얘기하소." 우두커니 서 있는 환국에게 신경을 쓰며 건이아범은 역시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엽이네는 한순간 몽상에 빠진 사람같이 건이아범을 멍하니 쳐다본다.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이곳은 뭣하러 왔는가 생각이 안 난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환국이와 건이아범은 순간적으로 이 아낙이 정상이 아니구나 그 생각이 스치면서 몹시 당황한다. 그러나 엽이네 눈에 슬픔과 공포가 되살아났다. "오늘 자고 나믄, 내일부터 우가 식구들이 몰리와서 우리를 동네에 놔두겄십니까? 그라믄 우리 식구, 죽는 길밖에 없십니다. 무작정, 나도 모르게 여기로 왔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환국이 말이었다. "예?" 엽이네는 화다닥 놀란다.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안 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는 못 할 겁니다." "예? 저기." 환국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엽이네는 믿어지지 않았던지 멍청해진다. 다른 사람들도 좀 놀라는 것 같았다. 환국의 단호한 태도에, 집안의 태산 같은 근심을 생각하기도 했고. "건이어머니, 뭐 따뜻한 음식이라도 챙겨서 이 사람 집에 데려다 주시오. 이불이 필요하면 그것도 보내주고." 환국이는 방에서 나갔다. 그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환국은 대충 사정 얘기를 했다. 서희는 아무런 반응 없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옛날 내 할머니께서는." "..." "너는 모를 게다." "네." 서희는 아들 둘을 기르면서 지난 일을 얘기한 적은 거의 없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진주를 본거지로 삼고 평사리를 기피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모두가 다 괴로운 추억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대단한 분이셨다는 얘기는 들어서 압니다만." "남아 장부 중에서 그만한 어른이 계실까? 그 어른이 어떻게 사셨는지... 이집 구석구석에서 할머님의 모습이 보여." 환국의 얼굴에 불안이 나타난다. "학같이 고귀하시고 사물에 정통하시며 허나 암호랑이같이 무서우셨지." 환국은 안자가 아까 하던 말이 생각났다. "별당에 더러 나가시기도 하고, 일전에는 사랑을 둘러보시더니 돌아가신 아버님이 몹시 무서웠다는 말씀을 하시더군. 좀처럼 그런 말씀은 안 하시는데." 서희는 지난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어린 옛날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갔을 때였다. 논에서 밭에서 일하던 남정네 아낙들, 길가에 서 있던 노인, 그들은 모두 가마를 향해 절을 했다. 바람이 이랑을 만들며 벼를 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엉덩이에 쇠똥이 잔뜩 묻은 어미소와 송아지가 물이 말라서 바닥이 드러난 개울가에 앉아 있었다. 물이 괴어 있는 개울가에서 아낙 한 사람과 아이들이 낯을 씻고 있었는데 가마를 본 그들은 기겁을 했다. 마치 메뚜기처럼 개울 건너 메밀밭으로 뛰어가서 숨는 것이었다. 가마를 멈추게 한 할머니는 누구냐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서방 얼굴은 사색이 돼 있었다. "메밀밭에 숨은 아낙은 누구냐?" 할머니는 거듭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숨는지 불러오너라." 가마 앞에 끌리다시피 나타난 아낙은 땅바닥에 몸을 던지듯 엎드렸다. "누군고?" "마, 마님!" "..." "마님 죽여주시오." "이 동네 사는 아낙이냐?" 할머니는 시선을 옮기며 김서방에게 물었다. "예, 그 죽일 놈의 치, 칠성이 계집이옵니다." "칠성이..." "주, 죽여주시요. 어린 자식 데리고 모진 목숨 못 끊고... 마, 마님!" 아낙은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그치라니께!" 김서방이 발을 굴렀고 아낙은 울음 소리를 죽였다. "예 마님, 셋입니다." 아이들이 메밀밭에 숨은 채 나타나지 않았다. "뭘 하고 사는고?" "예, 품팔이, 품을 팔아서 겨울 풀칠을 하고." 찢어진 적삼 사이로 때가 밀린 등짝이 내비치고 그 등이 떨고 있었다. "음... 그래 알았느니라." 그는 다름아닌 아버지 살해에 간접이나마 가담했다가 처형된 칠성의 아낙, 동네에서 추방되었다가 몰래 돌아온 임이네였던 것이다. 어제 일같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 그때 일이 생각났을까? 서희는 아마도 마을 아낙이 와서 통곡을 한 때문에 그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기억은 땅에 묻어두었다. 이곳 평사리에 갈피갈피 접어서 묻어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백 생멸이 있다는 한 찰나, 찰나의 연속이 아니던가? 하면은 내가 억겁을 살았단 말일까? 그것이 시공을 뚫고 가는 섬광이었다면 나는 한 찰나를 산 셈이 된다. 그러나 한 생명이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이상 기억은 생명과 더불어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한이로구나. 죄업이든 슬픈 이별이든 또는 만남이든 횡액이든, 기억에 사람들이 뿌리를 내렸던 곳이며 내 또한 뿌리를 내렸던 곳, 아아 기억, 수많은 기억들은 억겁의 길만큼이나 길고도 많구나. 서희는 망망대해에 던져진 것처럼 기억의 바다에서 자맥질하다가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다. "언제 가려느냐?" 환국은 환국이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네?" "서울에는 언제 가려느냐?" "아 네. 며칠 묵었다 가겠습니다." "며칠 묵었다가..." "어머님." "..." "이곳이 적적하실 텐데 그만 진주로 돌아가시지요." "아니다. 이제는 내가 나갈 필요가 없다. 부인회다 무엇이다 하고 나갈 필요 없어."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 아닌 것도 알어. 인연 없는 중생들 신물이 나서 그런다. 맞대결한들 무슨 소용이며 그럴 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이제는 없어지지 않았느냐?" "..." "그보다 초하루 지내고 모레, 나를 도솔암으로 데려가다오." "그러겠습니다." "웬 바람이 저리 부느냐?" "그러기 말입니다. 이제 주무셔야지요." "잠이 올까... 바람이 심하군."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밖으로 나섰을 때 바람 지나가는 소리뿐 집안에 인적기가 없었다. 엽이네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행랑 쪽 건이네 거처에만 불빛이 있었다. 건이아범 혼자서 젯상에 오를 밤을 치고 있는지 모른다. 환국이 여자 통곡 소리에 놀라 사랑에서 뛰어나간 것은, 그럴 리가 없겠는데 처음에는 서희의 울음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고 다음은 양현이가 돌아와서 대문 밖에서 통곡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머님이 달라지셨다. 왜 저러실까?' 왜 그러는지, 어째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면서도 환국은 믿을 수 없었다. 기강하고 당당하고 위엄에 가득 찬 그 모습이 변하리라 생각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옛날 일을 말한다는 것도 불길한 예감을 느끼게 했다. 이튿날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행사를 다 끝내고 느지막이 환국은 김훈장댁을 찾아갔다. 세배하러 왔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은 범석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김훈장댁 식구들은 매우 놀랐다. 환국이 최참판댁 당주여서가 아니라 관계가 소원했기 때문이다. 윤국은 중학 시절부터 방학 때 평사리로 오면 밤석을 자주 찾았으나 환국은 평사리에 자주 내려오는 편도 아니었으며 오래 머무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환국이도 범석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윤국으로부터 들은 것 이외 그의 인품에 대하여 소상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스승이었던 김훈장 아들 내외에게 세배를 하러 왔다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 일은 아니었다. "외지에 있다 보니 이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환국은 안방에서 한경이 내외에게 세배를 했다. 그리고 범석과는 맞절을 했다. "진작 찾아뵈야 하는 건데 부끄럽습니다." 사랑으로 범석과 함께 가면서 환국은 다시 한번 유감의 뜻을 표했다. 사랑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범석이댁네가 술상을 내왔다. 신겸 노복이라 하며 김훈장이 구차하게 손님을 맞이했던 옛날과 다름없이 사랑방은 초라하고 여느 농가의 방을 방불케 했다. 다만 아랫목에 쌓인 책자는 모두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다. "마을 형편은 장서방한테 들어서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권하는 술잔을 들며 환국이 허두를 꺼내었다. "형편을 알았다 한들 최선생이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소." 범석은 냉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심한 패배의 고통이 그의 눈빛속에서 지나갔다. 체념의 빛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외지로만 나돌다 보니, 하여간 이유야 여하튼 무관심하고 무책임했던 것만은 사실이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최참판댁의 사정이 태평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럴 겨를인들 있었겠습니까." 나이가 서너 살은 위였지만 범석은 말을 낮추지는 않았다. "설령 최선생이 나섰다 해도 될 일이 아니구요." "..." "그보다 윤국이가 학병으로 나갔으니 심려가 크겠소. 장차 큰 기둥감이었는데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 뿐이오." "고맙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지리산에 피신할 수도 있었는데 어찌 그 궁리는 못하였는지, 지금 산에는 그런 처지의 사람들이 적잖게 모여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환국은 그 일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어젯밤 있었던 일을 대략 설명을 한다. 범석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술을 마신 뒤 "부산으로 가기 전에, 우가네 식구들한테 행패를 당할 때마다 내게 와서 울곤 했지요.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소. 떠나고는 영영 소식이 없는 오서방의 경우도 그렇고, 사람이 이렇게도 무력할 수 있는가 한탄도 했으나, 죽어서 그 꼴을 안 보든지 입 다물고 있든지. 소용 없었소." "..." "군청에 가서 진정도 하고. 그것 다 어리석은 짓이었소. 짐승이라 창으로 찔러 죽일 수 있겠소? 사람이라 타일러볼 수가 있겠소? 말을 하자면 일종의 악령이오." 대범한 범석이도 넌더리를 치며 증오감을 나타내었다. "진정서를 냈다 해서 우리가 당한 봉변도 이루 말할 수 없었소. 어머님한테 폭행까지 하며 덤비는데 호소할 길이 있었야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환국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상반을 지금 와서 가르자는 얘기는 아니오만 누구 한 사람 영을 세울 사람이 없는 것이 마을 실정이오." "마을 사람들이 단결을 한다면." "나도 사도를 해봤지만 허사였소." "..." "마을 사람들의 상처가 깊은 거지요. 어제 오늘 시작된 것도 아니구 아주 황폐해버렸어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시겠지만 조준구라는 인물이 서울서 내려오면서부터 이 마을에 횡액이 시작된 거지요. 최참판댁은 말할 것도 없고." 환국의 낯빛도 약간 달라진다. "흉년이 들었던 그 해, 곡식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 사이의 대립에서 마을의 분열이 시작된 거요. 외견상으로는 최참판댁에 대한 의리였지만 실상 조준구는 일본 세력의 옷자락을 끌고 들어왔다는 것이 문제였어요. 하긴 뭐 그게 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어서 추측을 해볼 뿐이지만."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고향이라는 의식조차 없었는지 모르지요. 간도에서 태어나기도 했지만... 지난 얘기는 우리 집안에서는 일종의 금기가 돼 있었으니까요." "그랬을 거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의병이 일어났을 때 산으로 들어간 사람과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 간에 파인 골을 들 수 있지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의식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쩔수 없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그만큼 참혹한 일들이 많았으니까, 지금 우가놈을 중심으로 동네가 갈라져 있는 것도 단순히 오늘에 일어난 현상만은 아닌 게요. 다만 다르다면 가해자 편이나 피해자 편이나 그 모두가 체념을 하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게요. 체념." "김선생도 체념하고 계신가요?" "체념 상태라 할 수 있지요. 다만 기다린다는 변명이 있다, 그게 좀 다를까요?" 범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없는 것은 아니오." "그게 뮙니까?" "우가놈 편에 섰던 약삭빠른 사람들도 결국 자식들을 빼앗겼다는 점이고 군청에서도 이제는 실적을 올릴 인원조차 없어졌으니 우가놈의 콧김이 약해지지 않았나, 이건 내 추측이오." 말한 뒤 범석은 술을 마셨다. 범석에게는 패배 의식뿐만 아니라 무력감에서 오는 자기 비하의 흔적도 있었으며 일이 년 동안 세월의 때가 한 꺼번에 묻어버리고만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간직해왔던 이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늘씬한 뼈대에 진솔은 아니었으나 설이라고 깨끗한 차림이었지만 그의 양어깨에 실려있는 것은 생활의 고달픔이었다. 환국이와 범석은 매우 대조적으로 보였다. 물론 삶의 바탕에서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환국은 단순하게, 범석은 보다 복잡하고 부정적인 그 내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소." "..." "이제는 징병제가 실시되었고, 학병도 나가는 마당에 그깐 지원병 따위가 대수겠소?" "환국은 잠자코 듣기만 한다. "개동이놈이 마을에서 행패를 자행한 것이며, 서기질을 하게 된 것은 모두 지원병에 나간 동생 덕분인데 그게 이제는 빛바래졌으니, 대신 윤국이가 학병으로 나갔고, 말하자면 최참판댁 약점이 상쇄된 셈 아니오? 이제는 언권이 좀 설지도 모르지요. 이런 말 한다는 것이 치사스럽기는 하지만." 하다가 범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되는군요." 중얼거리듯 말했으나 환국이도 기분은 과힌 좋지 않았다. 쌓인 울분 때문에 그런다 생각은 했으나 왠지 모르게 범석의 말 속에는 비아냥거리는 것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서로가 서먹해지는 데서도 느낄 수 있었다. 환국이라고 어찌 상처가 없겠는가. 집안의 내력 자체가 예민한 그에게는 상처였다. 그리고 사실은 김훈장댁과 최참판댁 사이에도 미묘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일종의 애증 같은 것이 얽혀 있었다. 그것을 범석이 의식했건 아니했건 간에. 나이 어렸던 윤국이가 진작부터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자기 집의 부를 부정하며 방황했던 시절, 목마른 것처럼 범석을 찾아오곤 했을 무렵 범석은 윤국이를 동생같이 사랑했고 또 존중했다. 그러나 범석은 자신도 모르게 환국에게는 저항을 느끼는 것이다. 별로 만난 적이 없어 그럴 테지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열등감이었는지 모른다. 월등감이었는지 모른다. 월등한 환경에서 풍요롭게, 게다가 천하가 아는 근화방직 사장의 사위가 아닌가. 양손에 떡을 쥔 환국에 대한 비판 의식이었는지 모른다. 김훈장댁에서 돌아온 환국은 예정한 대로 이튿날 서희 함께 도솔암으로 떠났고 다음날로 그는 급히 평사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을 쇠고 온 연학이와 함께 밤이 깊도록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개동이 문제뿐만 아니라 연학은 환국에게 보고하고 의논할 일이 많았다. 해서 그도 환국을 만나기 위해 급히 돌아온 것이다. "윤국이한테 들어서 다소는 알고 있지만 김범석씨 그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얘기를 다 끝낸 뒤 환국은 넌지시 물었다. "어렵지. 여느 농가하고 다를 거 없고, 통영에 사는 고모가 다소 도와주기는 하는 모양인데." 얘기를 다 끝낸 뒤 환국은 넌지시 물었다. "어렵지. 여느 농가하고 다를 거 없고, 통영에 사는 고모는 다소 도와주기는 하는 모양인데." "사람은 신실하지요?" "그야 된 사람이제. 보통핵교밖에는 안 나왔지마는, 독학을 해서 학식이 깊다 하더마." "그 얘기는 윤국이한테 들었습니다." "게다가 사람이 근해서 농사도 열심히 짓고, 옛날 김훈장맨크로 글 모리는 동네사람 일도 곧잘 봐주고." "우리 집에 대한 감정은 어떤지요?" 환국은 주저하다가 물었다. 연학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환국을 빤히 쳐다본다. "그건 와 묻는고?" "글쎄요, 그냥 물어보았습니다." "나쁜 감정을 가졌일 리가 없제." "..." "김훈장을 만주서 이장해 올 직에도 자네 아버님이 힘을 많이 썼고, 제자된 도리를 다 한 기라." "그 어른한테 아버님도 글을 배우셨다 그 말씀이오?" "그랬다 하더마, 만주 가기 전에, 자네 증조모께서 살아 기실 적에 그 어른이 김훈장한테 역부러 부탁을 해서 그랬다 하든데, 그거 다 삼대 구년 묵은 옛이야기, 지금 젊은 사람들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기야 머, 다소 까끄러운 면이 있기야 있겄제. 읍내 이부사댁도 그렇고." "그러니까 제 부모님, 그분들 혼인 때문에 그런 거지요?" "사람 사는 기이 그래서 복잡한 거 아니겄나. 나도 실은 들은 얘기니 세세히야 우찌 알까마는, 김훈장이 자네 아버님을 몹시 아끼고 기대를 걸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던 모양인데 그러나 혼인을 반대하고 그 일 때문에 진노한 것은 법도 때문일 기고, 그래저래 해서 만주서는 그 어른하고 등이 졌다 하더마. 그러자니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서 노인의 말로가 고독할 수밖에 없고 돌아가실 직에는 임종하는 사람도 없었다. 카이. 하기야 머 잘잘못이 어느 쪽에 있었는지 그거는 모릴 일이제." "그간의 사정 알 만합니다." 환국이 말했다. "고집불통의 노인이, 성질이 그랬이니 만주땅까지 가싰겄지마는." "어머님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지요." "그랬이니 환고향할 수 있었고." "어쨌든 그 댁에서 그런 일들을 알았다면 당연히 섭섭해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라도." "범석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겄다마는, 맘에 낄 것없다. 부모대에 있었던 일을, 그 사람도 개명한 처진데 조부하고 생각이 같지는 않을 기다." 연학은 묘하게 말을 둘러댄다. "무슨 말을 했다기보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강하게 부인한다. 밤은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별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첫째 이들은 동지라 할 수 있었고 때론 아저씨 조카로 정이 오갔으며 형식으로는 주종간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자네 어머님은 노상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 남몰래 하는 일을 어느 누가 알 것인가. 그분은 태산겉이 바람을 막아주싰고, 물심양면으로 그러지 않았더라믄 모두 싼싼조각이 났지. 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다만 한이라." "아저씨도 그런 말씀 하실 줄 압니까? 뜻밖인데요?" 환국은 큰 위안을 받은 듯 미소했다. "와, 나는 독석이건대? 하기는 늙으이 말이 많아진다." 환국이 평사리를 떠나던 날은 일기가 쾌청했다. 마을은 엽이네의 귀향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그도 그럴 것이 우가네 식구들이 몇 차렌가 엽이네 집 앞을 시위하듯 지나갔고 들으란 듯 울타리 밖에서 욕설을 퍼붓기도 했으며 엽이네 식구들이 뭘 먹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는가 수소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만 했이믄 잊일 때도 됐는데 도무지 우떻기 생기묵은 종자인지 질기기가 쇠방석이다." "와 아니라. 전생에 무신 척이 져서 저렇기 실이 노이 되게 시루겄노. 정말 이제 보는 사람도 신물이 나구마." "엽이네가 불쌍해서 또옥 죽겄다. 야갈리겉이 약은 제집도 아니고 순해 빠져서, 어디 한분 달라들기를 하나, 그런께 더 흔들어대는 거 아니가. 개도 무는 개를 돌아본다 하는데 사생결단, 한분 막나가 보기라도 했이믄." "말도 마라. 그 엄전한 김훈장댁 식구들 당하는 꼴 못 보았나? 엽이네가 달라들기라도 해보제? 권속들이 찢어직일라 칼기구마. 가이방해야, 오서방이 머 그리 죽을 말을 했다고 우가가 낫을 들고 나왔겄노." "그는 그렇고 얘기를 들은께 최참판댁에서 곡식도 보내주고." "우가놈 집구석에서는 벌써 그 걸 알고 있다 하더마." "어느새?" "말 물어나르는 것들이 있인께." "아이가, 아이가, 그래도 최참판댁은 어쩔 수 없을 거로? 그때가 언제였지? 와 그때 개동이놈 그댁 마님한테 혼쭐이 난 일 말이다." "성환할매를 자전거에 치어놨을 때, 알지이. 그때 개동이가 땅바닥에 엎드리서 빌었제. 아무리 그놈이 찰랑개비 재주가 있기로 그댁이사, 더군다나 둘째아들이 학병으로 나갔다 카이 그까짓 지원병하고 유가 되나." "하모, 유가 아니고 높은 핵교에서 공부 많이 한 사람하고 보통핵교밖에 못 나온 것라고, 유만부동이제. 이를테믄 한쪽은 장수감이자마는 재동이놈이사 만판 날뛰보아야 졸때기밖에 더 되겄나?" 우가 식구들에게 원한이 있는 마을 아낙들의 수군대는 말이었다. 그런데 마을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배운 것도 없고 바깥 물정도 모르는 농사꾼들이 어쩌면 그렇게 민감할 수 있지. 신기로울 지경이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들은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시달리다 보면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인지. 우가네와 반대 입장, 혹은 관망하면서 강약이 부동하다고 한탄하며 체념했던 우가네 편에 섰던 약삭빠른 사람들도 결국 늦었느냐 일렀느냐는 차이가 있었을 뿐 자식들을 징용에 빼았긴 입장에는 다를 것이 없고, 그러니 별무소득이라 그들 역시 전과는 다르게 열을 올리며 우가네를 두둔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수군덕거렸다. "그때사 장원 급제라도 한 거맨크로 동네가 야단 아니더나." "제물에 야단이었지. 그렇게 난리굿을 쳐도 지원병에 자식 내놓는 사람, 우가네말고는 없었다." "아무튼지 간에 면장이 안 오나 읍내 유지들이 인사를 하러 오고, 말만한 가시나들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지를 않나, 오빠 오빠 함시로, 그때는 정말 호강했지." "그거사 핵교에서 가라고 선생이 시킨께 온 거 아니겄나. 설마 제발로 걸어왔이까?"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몸집이 조그맣고 까무잡잡하게 생긴 아낙이 타박을 주듯 말하니까 복동이댁네는 보리쌀을 씻으면서 "그거는 모리는 소리다." "모르기는 머를 몰라." "그종에 조달한 제집아도 있어서 손수건도 맨들어 가지오고 강가를 재동이하고 함께 걷는 것도 내가 봤다 카이. 제집아가 저래서는 신세 조지지 하고 그때 생각했구마."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당시 읍내 국민학교 상급반 여학생들이 소위 국책에 협조하는 학교 선생들에 의해 지원병 환영회다 송별회다. 그런 행사에 동원된 것은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열성적인 교사는 아이들을 개별방문하게 하여 지원병을 격려하곤 했던 것이다. 시골이기 때문에 상급반에서는 그 나이가 결혼 적령기이기도 했다. 당국에서는 지원병을 영웅으로 조작하고 근사하게 떠받쳤으며 요란하게 홍보하는 바람에 철없는 아이들이 그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사나이답고 씩씩하며 추물이 아닌 이상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전시에는 노상 카키색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니까. "그때 재동이어매 해구는 꼴 생각 안 나나?" "와 안 나. 눈꼴 사나웠지." "아들이 이기고 돌아오믄 혼인하자, 김칫국부터 마신 제집아가 하나 있었제. 나이값도 못하고 제집아아를 앞세워서 얼매나 갈롱을 피우더노." "가관이었지. 그놈의 제집아 지금은 시집갔는지 모리겄다." "우리끼리니께 하는 말이지마는 이기고 돌아오들 딸 줄 기든가? 어림없다. 여식아를 핵교까지 보냈다믄 밥술이나 묵는 집안일 긴데 안 그렇나?" "아이고 말도 마라. 그놈의 유세, 말말이 나라에 아들 바쳤다. 요새는 그말 안 하더마." 우물가에서 험담을 하고 있을 때 마을에는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방금 전에 면장이 오고 읍내 유지가 오고 하면서 말을 주고 받았는데 바로 그 면장나으리가 나타난 것이다. "보래 보래, 저기 가는 사램이 면장 아니가. 면장이제?" "그렇네. 어디 가는 길까? 개동이 집에 가는가?" "아니다. 상구 위로 가는데?" 작달막한 키의 면장은 나이가 많은 탓인지 쉬엄쉬엄 걸어가고 있었다. "최참판댁에 가는 갑다!" "어디? 참말 그렇네. 웬일일까?" 아닌게아니라 면장은 최참판댁으로 들어갔다. 그는 넓은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계십니까!" "누구요." 건이아범이 행랑 쪽에서 돌아나오며 "아니! 면장어른." 놀란다. "웬일이십니까?" "아무도 안 기신가?" "잠시 기다리시이소" 건이아범은 허둥지둥 사랑으로 달려간다. "면장이 왔는데 우짠 일일까요?" "면장이 와?" 연학은 슬그머니 웃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천천히 안마당으로 나간 연학은 두루뭉실하게 생긴 면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웬일이십니까?" 짐짓 놀라는 시늉을 한다. "아 예. 돔 볼일이 있어서, 당주께서는 서울로 가셨소?" 정중하게 물었다. "예 갔십니다만, 하여간 사랑에 드시지요." "집이 광장히 넓소. 멀리서 보긴 보았는데." 면장은 연학을 뒤따라가며 말했다. "면장어른댁도 작은 집이 아니지요." "여기 비하면 집이랄 것도 없지요." 면장은 화심리에 살고 있었다. 사랑으로 들어온 면장은 "부인께서도 안 계신지요." "마침 도솔암에 가시고." "진작 인사를 올린다는 것이...모두 진주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기에." 말은 그렇게 했으나 길상이 때문에 지방의, 더군다나 말단 관리들은 기피하는 집이었던 것이다. "예, 대개는 진주에 기시지요." 면장은 대개 그 지방 유지들에게 주는 일제의 말단 공직인데 말하자면 일종의 선심이다. 해서 시골의 면장은 실무보다 명예직일 경우가 많았다. 면장도 알아야 해먹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면장 역시 먹고 살기 위한 직분은 아니며 상당한 가산이 있다는 얘기를 연학은 전해들어서 알고 있었다. 보기에도 부골스런 구석이 있었다. "이번에는 이 댁 자제분이 학병으로 나갔다 하는데 면장으로서 인사가 늦었소이다." 드디어 면장 입에서 학병 얘기가 나왔다. 윤국의 학병 출정은 과연, 이 집에의 접근이 금기로 된 바로 그것이 깨어졌음을 느끼게한다. 범석의 말대로 길상의 문제와 상쇄가 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을 하자면 이 근동에서 최참판댁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게요. 나 역신 남이 아는 만큼은 아는데." 안다는 말에는 좋은 뜻, 나쁜 뜻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최참판댁의 영광과 치욕이, 존경과 저속한 호기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느끼게 되는 그 혼란스러움이기도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 댁의 돌아가신 어른이 말 타고 화심리 장암선생댁에 오시던 것을 기억하고 있소. 그러나 지체가 다르니 내왕할 처지는 아니었고 폐가가 되다시피한 내력도 그렇지 마는... 면장질을 하면서부터 당연히 인사도 드리고 해야 하는 건데 이 댁 바깥분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나로서는 입장이 난처했소." 솔직한 말이었다. "대학은 못 갔으나 나도 중학 공부까지는 했으니 무지몽매하다 할 수는 없으나." 그런 말을 털어놓는 것으로 보아 면장은 최참판댁뿐만 아니라 장연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본시 하동 태생이며 그의 백부가 여수에서 어업으로 성공하여 대단한 재력가라는 것, 수십 년 최참판댁 일을 도맡아온, 말이 관리인이지 상당한 영향력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은근한 태도로 미루어볼 때. "실은 어제 군수가 불러서 갔지요." "예." "이 댁 당주께서 군수영감을 만난 모양인데." "예? 그런 말 못 들었는데요?" 연학은 시치미를 뗀다. "어제, 그저께라든지?" "아아, 그러니께 서울 가는 길에 들른 모양이구마요. 헌데 무신일로 군수영감을 찾아갔일까요?" 하다가 "그래 군수영감께서는 우리 집 최선생을 만나주싰다 그 말심이오?" 짐짓 놀라는 척한다. "물론이오. 그분이 누굽니까. 세상이 다 아는 최참판댁 당주 아니오? 어디 그것뿐이겠소? 근화방직의 서랑이신데 그분이 만나자한다면 도백인들 거절하겠소?" 당주라는 말은 아까부터 귀에 거슬렸다. 길상이 영어의 몸이 되어 집을 비우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길상을 이 집의 주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심리적인 있었는지 모른다. "시킬 일은 없십니까?" 문 밖에서 건이아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상 보아 오게." 연학이 말했다. "알았십니다." 건이아범의 물러가는 기척이 들려왔다. "군수영감이 나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개동이 목을 쳐라, 그 일 때문이었소." "우개동이를!" "사실은 그 동안 우리도 애 많이 먹었지요. 지원병 가족이라 국책상 어쩔 수 없이 참아온 셈인데, 뿐만 아니라 군청에도 발발이 진정서다 투서다, 문제가 많았소. 얼마 전에는 외딴 집에 사는 여식아이를 겁탈한 일이 있었고, 말하자면 사람이 아닌 짐승이오. 예의범절도 모르는, 무지하여 도모지 분별이라는 게 없고 식자도 짧아서 서기 자격이나 어디 있었소? 국책상 하는 없이 채용을 했던건데 말썽이 이만저만이라야지요." "그래 목을 짜르기로 했십니까?" 연학은 신중하게 물었다. "누구의 영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고 앓던 이 빠진 것만큼이나 모두 시원해할 거요." 누구의 영이라고? 그 누구는 물론 군수를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환국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면장은 그 일에 대한 보고차 방문한 것 같았다. "그는 그렇고 이 댁 부인께서는 상심이 크시겠소." 면장은 화제를 돌렸다. "원래 기강한 분이니께 하루이틀 겪는 일도 아니고." "대단한 분이지요. 이 댁의 내림이 그렇지 않소? 아마 나보다 연세가 두세살 아래일 게요. 그러고 보니 세월도 많이 흘렀고 세상도 많이 변했소이다." 술상이 들어왔다. 주거니받거니 술을 마신다. 면장은 홀가분한 표정이었고 연학이 역시 홀가분해하는 얼굴이었다. "말이 면장이지... 인심잃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마는 시국이 시국인만치." 술을 마시면서 고백 비슷하게 내비치다가 그만둔다. "시국이 그러하니 우짜겄소. 면장 혼자서 하는 일도 아니고 그런데 우개동이가 사람 공출하는 데는 공이 컸을 터인데 목 짜르기가 쉬울까요?" 사람 공출이라는 장연학 말에 면장은 순간 당황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소만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많지요." "무신 문제지요?" "요즘 세상, 아시다시피 취직하기가 쉽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고, 대학 전문학교를 나와 가지고도, 고문 파스나 했다면 모를까, 말단 자리 하나 얻을 수 없는 실정 아니오. 해서 돈푼있는 집 자식들, 배를 타겠소 농사를 짓겠소. 자연 어정개비로 놀고 묵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 면내에도 밥술 먹는 부자가 없는 것도 아니며, 결국 그런 어정개비들의 당면한 일이 징용 아니겠소? 그러니 자연 부정도 생기게 되는데, 우개동이 그자가 그것을 기화로, 빼낼 권한도 없으면서 그런 사람을 등을 쳐먹고 다닌 거요. 그것도 체모 없이 되나깨나, 아무데나 가서 이분거리고, 투서 진정서가 모두 그런 내용이오." 하고 면장은 쓰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 사정이야 연학도 대강 짐작은 하고 있는 터였다. "뭐 지 주제에 큰돈이야 받아먹었을까마는, 부자한테는 푼돈이라도 딱한 사람들한테는 눈물나는 돈 아니겠소? 지놈 아니라 면장인 나도 누굴 빼내고 어찌고 그렇게는 못해요. 나도 그 동안 진퇴양난, 면장질을 그만둘까 생각한 일도 여러 번이요. 그 자리에 목을 매는 처지도 아니고, 그러나 뉘를 내면 신양에 좋을 것이 없고 눌러앉아 있자니 마음이 편칠 않소." 술이 들어가자 어느 정도 그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이기도 했다. "살자니 별수없지요." "내 가친은 의원으로서 이 근동에서는 명이 높았던 문의원의 제자였지요. 가업을 이어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중학교를 나오고 보니 그런 직업이 시들해서, 집에서는 양의사가 돼라 했으나 공부가 모자라 그 길로도 못 가고." 어눌하게 신상 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과음하지는 않고 한 시간 넘게 머물다가 벗어놓았던 외투와 모자를 들었다. 면장은 연학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어느새 전달이 되었던지 개동어미가 정자나무 뒤에 숨어서 살피고 있다가 면장이 내려오는 것을 보는 순간 눈꼬리가 치울라가면서 입술을 실룩거린다.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면서 "면장나으리." 하고 엎어질 만큼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우짠 일이 십니까?" 걸음을 멈춘 면장은 "뉘시지요?" 의아해한다. "아이구, 우리 재동이가 병정으로 나갈 때 우리 집에도 오시지 않았습니까." "아아." "인제 아시겄십니까." "예." "여기는 무신 일로." "예 좀, 인사나 할려구 왔소." "저기 우리 개동이가." "예. 추운데, 그러면 나는 먼저 실례하겠소." 면사무소로 돌아온 면장은 외투와 모자를 벗어 걸어놓고 잠시 난로에 손을 쬐다가 개동이를 불러들인다. 개동의 낯빛은 푸르죽죽했고 눈알은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얼굴을 힐끗 쳐다본 면장은 "거기 좀 앉게." 개동은 의자를 두르르 끌어내며 거친 몸짓으로 앉는다. "자네 내일부터 면소에 나오지 말게." "야? 그기이 무신 소리요?" 제 귀를 의심하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일부터 면소에는 나오지 말라 했네. 파면이란 말일세." "이기이 무슨 날벼락 겉은 소립니까? 파면이라꼬요?"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짐작한 눈치였으나 파면에 대해서는 생각 못했던 일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안됐지만 할 수 없네." "누구 마음대로! 최가놈 집구석에서 모함을 했구마요!" "무슨 소리를 하나. 버르장머리하고는, 작인이 지주보고 그래도 되는 겐가? 또 그 댁은 왜 들먹이나." "면장이 지금 그 집에 갔다 오는 길이니께 하는 말이오! 어림없다! 어림없어!" "그 집에 내가 갔다온 거는 어떻게 알았는고?" "방금 여편네가 다녀갔소. 면장이 그 집에 가더라고." 면장은 쓰게 웃는다. "허허어. 자네 식구들은 손발이 척척 잘 맞는 모양이네. 하지마는 마음에 찔리는 것이 없다면 그럴 필요가 있겠나? 왜 그래야 하는가." 찔끔하다가 다짐 두듯 주먹을 불끈 쥔 개동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마요. 면장은 우째소 역적질을 한 그 집에는 갔이며 버르장머리가 있느니 없느니 그 집 편역은 와 듭니까?" "내가 못 갈 데를 갔다아 그 말이가?" "그라믄 갈 데를 갔다 그 말이요? 그라믄 한당이 됐다 그 말이구마요. 사단이 있어도 보통 사단 아니구마." 개동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단은 무슨 사단, 어제 군수영감을 만났더니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고 꾸중하시기에 간 거고, 우리 면내에서 학병으로 나갔으면 의당 인사를 차려야 하는 거 아니겠나? 여하튼 그 일에 대해서는 자네가 왈가왈부할 까닭도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니네." 학병이라는 말에 망연자실, 할말을 잃은 개동이는 순간 눈알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내가 파면당하는 이유가 머요!" 울부짖듯 소리쳤다. 어느덧 면장 방 앞에는 직원과 면에 볼일을 보러 왔던 촌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알 만한 일들이지. 가타부타 말 못할 걸세." 개동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면장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친일파인 이 나를!" 하다가 그런 중에도 말이 잘못된 것을 느꼈던지 수정을 한다. "일본에 온갖 충성을 다 하고 밤낮으로 국가를 위해 일을 해온 이 나를! 그렇게는 못할 기요! 내 동생은 천황폐하를 위해 사지에 갔소! 그, 그 가족을 이렇게 홀대하고 벌주는 법이 어디 있소오!" "자네 동생뿐이겠나. 이제는 징병이 실시되어 이 나라 젊은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나가게 돼 있네. 대학 다니는 학생들도 총 메고 전선에 나가는 형편인데 자네가 자네 동생만 천황폐하에게 충성하는 거는 아니지 않는가." "뿐이요! 나는 우짜고요! 내 실적은 우짜고요! 내만큼 징용에 사람 많이 뽑아낸 놈이 있이믄 나, 나, 나와보라 카소!" 주먹으로 책상을 쾅! 친다. "그러한 나를 몰아내? 분명히 여기는 사단이 있구마는. 최가놈 집구석에서 돈 얼매 받아묵었소? 아니믄 독립운동에 가담했단 말이요? 나 경찰서에 갈 기요! 가서 이 사단을 풀어야겠소!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노! 이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닌 나, 나, 나." 하다가 숨이 막혔는지 캑캑거린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면장 모가지가 붙어 있일 긴가, 내 목이 떨어질 긴가 어디 두고볼 기구마. 경찰서에는 나하고 친한 형사도 있고 날 우습기 보았다가는 면장이고 나발이고 없다! 없어! 발광이다, 책상을 계속 친다. "그래, 어서 경찰서에 가보게. 자네 갈곳이 바로 거기니까." "뭐라꼬?" 책상 치는 동작이 멎었다. "이보게 우서기, 그만 되기 만행이네. 그나마 동생 덕 본 셈이지. 뇌물에다 공갈 협박 사기까지 치고서 콩밥을 면하게 된 거는 순전히 자네 동생 때문이네. 군수영감께서 출정가족이라 봐주신 거다. 아무 말말고,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나, 또 시골 구석 말단이라고는 하나 총독부의 행정이 그리 어수룩하지는 않다. 이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군말 말고 짐 챙겨서 떠나는 것이 신양에 이로울 걸세." 개동이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더니 일어섰다. 몸을 비틀 듯 돌아서서 한 발 두발 걸어 나간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길을 열어준다. "이 사람들은 왜 이러고들 있나." 면장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 면장은 끝내 어성을 높이지 않았고 평소와 별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내가 이 원수를 안 갚을 줄 아나?" 나가다 말고 별안간 개동이는 돌아섰다. "내가 이 원수를 안 갚을 줄 아나!" 울부짖었다. "우가네가 독종인 것은 세상이 다 안다!" 면장은 마지막 비수를 꽂듯 "길게 저러면 순사들 서슬에 견디기나 할까?" 개동이는 짐도 챙기지 않고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면소에서 뛰쳐나갔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을 때 술에 만취가 된 개동이는 어디서 뒹굴었는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고! 이기이 무신 일고! 내 아들 죽네!" 개동어미가 손뼉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물을 길어 오던 개동이댁네가 얼른 물동이를 내려놓고 "와, 와 이렇기 됐십니까!" 놀라서 다가오는데 개동이는 다자고짜 아낙을 패기 시작했다. 아낙이 비명을 지르건만 개동어미는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내 아들 죽는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간신히 아낙은 피하여 부엌으로 달아났고 개동어미는 아들 팔을 잡고 늘어졌다. "어느 놈이 니를 이 지경 맨들었노! 말해라! 말해! 내가 가서 배애지를 쑤시 직일란다. 최가놈 집구석에서 니한테 이러더나? 내 가서 불을 싸질러부리겄다!" 부엌칼이라도 찾아들고 달려나갈 기세다. 그러나 개동이 어미의 팔을 잡았다. 개동어미의 손뼉치며 고함치는 소리에 개동이댁네는 죽어 자빠지는 것 같아 비명을 지르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이카노? 무신 일고!" 어디 갔던지 뒤늦게 나타난 일동이가 동네 사람들을 밀어젖히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오매! 이기이 우찌된 일이오?" "니 동생 얼굴 보아라. 나도 가심이 터진다! 우애 된 일인지. 어이구!" 한 팔은 아들에게 잡힌 채, 다른 한 손으로 개동어미는 제 가슴을 쾅! 쳤다. "어느 놈이 니를 팼노! 그놈이 누고!" "내가 나를 팼제요."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처음으로 개동이 입을 열었다. "무신 말고? 세상에, 니가 니를 팼다꼬?" "다 끝장났소." "이놈아, 자초지종 말을 해라!" 아들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애를 쓰며 개동어미는 악을 썼다. "면소에서 쬐기났소." 중얼거렸다. 개동이 눈에는 동네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개동어미와 일동이는 넋이 나간 듯 피투성이가 된 개동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그럴 리 없다." 개동어미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 좀 똑똑히 말해도고 이놈아! 말 못하겄나?" "면소에서 모가지가 떨어졌다 말이요. 그래도 못 알아듣겄소!" 울부짖듯 말했다. 개동어미와 일동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부엌으로 달아났던 개동이댁네가 툭사리같이 부어터진 입술을 한손으로 가리고 내다본다. 모여들었던 동네 사람들, 마치 파도가 인 것처럼, 세찬 바람이 보리밭을 지나가는 것처럼 일렁인다. "아이고 그라믄." 복동이댁네가 입을 여는 순간 봉기 자부가 잠자코 있으라는 듯 옆구리를 찔렀다. 이때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선 개동어미는 며느리가 내려놓았던 물동이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다 앞뒤로 몸을 비틀거렸다. "구겡났나! 경사났나! 물독다 싶으제? 이 연놈들아!" 동네 사람들에게 물을 끼얹는다는 것이 오히려 물동이를 안고 넘어져 자신이 물벼락을 맞는다. 동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이들도 웃었다. 비로소 동네 사람들을 의식한 개동이 어미를 끌러 일으킨다. "이런다고 죽은 자식 돌아오겄소. 말장 허사요. 방으로 들어가입시다. 말할 긴께." 맨 먼저 일동이 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흠씬 물에 젖어서 흐느적거리는 어미를 끌다시피 개동이도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내다보고 서 있던 며느리도 조르르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은 닫혀버리고 말았다. 그런 뒤 방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닫혀진 방문을 향해 야유와 욕설을 터뜨렸다. 이윽고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흥분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끼리끼리 이집저집으로 모여들었다. 발 빠른 젊은 축들, 중년들이 와서 목격한 그 광경은 집에 남아 있던 늙은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전달이 되었다. 권불십년이니, 달도 차면 기우느니, 바깥 노인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이놈을 때려죽인다며 몽둥이를 찾는 사람들을 말리었다. "바쁘잖네. 아직은 왜놈 세상인데 서둘다가 봉변 당할라." 그러나 개동이한테 끌려서 징용에 나간 사람의 가족, 봐주겠다는 바람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바쳤건만 결국 나도 할 수 없다는 말 한마디로 아들을 끌고 가던 개동이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던 부모들, 그들은 이제 외고 펴고 분통을 터뜨리며 우가네 일족을 저주하는 것이었다. 야무네 집에는 인호 또래의 아낙들이 모여들었다. 인호의 손아래 동서 오복이네도 왔다. 인호는 본시 말수가 적은 편이라 비시시 웃기만 했으나 우가네 식구들한테 곤욕을 치르기론 누구 못지 않았다. "그 몹쓸 놈이 이제사 천벌을 받았구나." 야무네의 첫마디였다. "그거만 가지고 될 기든가요? 어림없제. 이자 시작입니다." 모인 중에서 한 아낙이 말했다. "하모. 안 되고말고. 노상 웃묵에 배미 들앉은 것 겉더니 깨소끔맨치로 세상에 이리 꼬소한 일이 어디 또 있겄소. 인호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리갔일 기다. 다른 아낙이 맞장구를 쳤다. "참말이제 얼마나 당했노? 오죽하믄 인호가 머리 깍고 중이 될라했이까. 내 원수는 남이 갚아준다는 옛말 하나 그른 기이 없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사네라. 죄지어서 남 주나?" 나잇살이나 든 사람의 말이었고 그는 다시 야무네를 향해 말을 이었다. "성님 이자는 옛말 하고 살겄소. 야무가 보지락보지락 일어나서 꿈제기는 거를 보이 우리도 참 보기가 좋소." "그래, 이제 나는 원도 한도 없다. 내일 눈감아도 편안히 가겄다." 야무네는 인호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게 다 인호 덕 아니겄소. 일동이놈이 보쌈이라도 해갔이믄 우짤 뻔했소?" "그러니 세상 조화가 요상체. 우찌 신령이 없다 하겄노. 다 성님심덕 탓으로, 하기사 인호도 그렇제. 여자한테는 벽을 지고 있어도 남정네가 있이야, 세상에 혼자 사는 여자같이 불쌍하까." "그는 그렇고 이분 일은 다 최참판댁에서 설동해서 한 일이라 카는데 그기이 정말인가 모리겄네." "틀림없소. 오늘 면장이 최참판댁을 다녀갔다 하더마요." "이자는 한숨 돌리겄다." "엽이네를 최참판댁에서 돌보아준다믄서요?" "하모, 양식도 보내주고 이불이며, 어제는 건이네가 헌옷을 챙겨서 갖다주더라 그러더마. 밤에 가서 대성통곡을 한 보람이 있었제." 모두 웃는다. "마침 서울에서 큰아들이 내려와 있었이니, 그기이 다 연때가 맞아서 그리 된 거 아니겄나." "그것뿐만은 아닌 기라. 그댁 작은아들이 학병인가 뭔가 나갔기따분에 말발이 섰다 그러더마." "그 점도 있었겄제. 아무튼지 간에 이분에는 우리가 큰 덕을 본 기다." 와글바글 얘기를 모두 한마디씩 하는데 "오복아." 야무네는 둘째며느리를 불렀다. "야, 엄니." "너거 집에 호박오가리 좀 있제?" "좀 있일 깁니다." "그라믄 좀 갖다줄래?" "어디 쓰실라꼬요? 명절도 다 갔는데" " 실 데가 좀 있다. 지금 좀 가지오니라." '야." 오복이네가 나가자 "어무이 어디 쓰실라꼬 그러십니까." 인호가 다시 물었다. "성환할매 죽 좀 쑤어 갈라꼬." 하자 연신 지껄이던 아낙들은 입을 다물었다. "불쌍한 할매, 다 된밥에 재 뿌리는 격이제." 야무네는 한탄했다. "와 아니라요. 기가 맥힙니다." "어디 한두 가지가. 손주 손녀 그것들 아니더믄 그 할매 살아 있지도 안 했일 기다. 눈이 멀게도 됐재. 일희일비더라고... 우째 세상일이 이리 고르잖은지 모리겄다." "그런데 성님." "와." "아침녘에 면장이 최참판댁에 왔다가 갔다는데 와 성환할매 집에는 안 갔이까요? 성환이도 대핵굔 전문핵굔가 댕기다가 군대에 나갔다 카는데." "그거사 그 댁에 무신 일로 면장이 갔는지는 모리겠고 성환이는 서울 있다가 불각처에 그리 됐인께 면장이 알기나 알겄나? 또 가아는 아마도 진주에 기류계가 돼 있일 기구마." "없는 놈은 성도 없나? 그래도 그렇제요. 할매가 손주 땀시 눈까지 멀었는데 도리가 안 그렀십니까?" "면장이 온다고 할매 맴이 풀리겄나, 어둡은 눈은 떠지겄나, 천지간에 머가 반갑겄노." "요새 귀남네는 어매한테 잘한다 캅디다." "지도 사람이믄 그래야제." "별일 없인께 아무 말 안 하겄제." 오복이네가 호박오가리를 가지고 왔다. 야무네는 인호를 보고 "죽 좀 안치라. 누그름하게 잘 쑤어라. 할매가 설더 설 같잖게 샜는데, 작은딸한테는 기별이나 갔는지 모리겄다." 모두들 돌아가고 야무네는 양푼에 죽을 담아 성환할매를 찾아간다. "설 새고 나믄 천일네가 한분 올란가? 하기사 제사는 진주서 모시니께 성묘 때 아니믄 오겄나." 야무네는 길을 걸으면서 문득 천일네를 생각을 한다. 세 늙은이가 그나마 오순도순 지내던 시절이 그리웠던 것이다. "불쌍한 할매, 천일네하고 나하고는 잘 풀맀는데 와 할매만 그런고. 손주 공부 끝나믄 영화 보고 살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무심하시지." 사립문을 들어서면서 "귀남이 있나?" "야, 어서 오이시소." "어매 밥 좀 들었나?" "노 그렇지요 머. 말도 안하고. 아침에는 구새에 빠질 뻔했입니다." "니가 귀찮더라 캐도 요강을 쓰게 하지 않고 그랬나. 눈먼 사램이 구새 출입을 우찌 하노. 아아도 참 답답다." "요강 쓰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지마는 도모지." "할매도 참, 정갈한 성미라 그런갑다. 니가 신경을 써라. 따라가서 앉혀주든가 해야지." "그러니께 집을 못 비웁니다." 귀남네는 수굿해져서 말했다. "아나 이거 받아라. 호박죽인데 별미라꼬 좀 떨란가." 야무네는 양푼을 내밀었다. "매번 와 이캅니까. 미안스러버서 우야고?" 하는데 "어매!" 하고 보따리를 인 아낙이 들어섰다. 고성에 사는 둘째딸 복년이었다. 귀남네는 엉겁결에 양푼을 받아 마루 끝에 놔두고 "복년아!" 하며 울부짖었다. 복년이도 무거운 보따리를 마루끝에 내려놓고 "성아!" 자매는 서로 붙들고 통곡을 한다. 야무네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아웅다웅하더마는, 남 겉으믄 저러것나. 부모자식 동기간밖에 없다.' "울 어매는 우찌 되었노!" "내가 직일 년이제. 다 내 죄다. 내가 받을 죄를 엄니가 받은 기라." 귀남네는 제 가슴을 쳤다. 성환할매가 눈이 멀었을 때, 그때도 귀남네는 마당에 엎드러져 내 죄라 하며 울었던 것이다. 성환할매는 더듬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마루에 앉은 그는 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멍하니 바라본다. "자아, 자아, 이자 고만 울고, 어매 안 볼 기가." 뜯어말리듯 야무네가 말했다. 그리고 마루로 올라가서 성환할매를 부축한다. "치분데 머할라꼬 나옵니까. 들어가입시다. 너거들도 들어오니라. 언제꺼지 그러고 있을 기고." 성환할매를 이끌고 야무네는 방으로 들어간다. 울음을 그친 자매도 뒤따라서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복년은 성환할매 무릎에 엎드려 또다시 운다. "그만 해라." 덤덤히 앉아 있던 성환할매는 처음으로 입을 데었다. 복년이는 치맛자락을 걷어서 코를 풀고 눈물을 닦는다. "복도 없는 울 어매." "기별을 받고 오는 기가?" 귀남네가 물었다. "성환이한테서 편지가 왔더마." "성환이한테서 편지가 와?" "음... 어디서 편지를 부칬는지... 할매 부탁한다 캄서, 편지가 온통 눈물로 얼룩이 져 있더라. 그거를 본께 간이 아파서 똑 죽겄더마." "..." "세 안에 올라고 마음을 묵었는데 제사 맽길 사람도 없고, 머가 일이 잘못돼서 아아들 아배도 함께 못 오고, 멀리 있이믄 자식도 아닌 기라." "세상에 니겉이만 함사? 니 겉은 소자가 없다." 야무네 말에 "어디네. 제집자식 그거 열 있으믄 머하겄소?" "사람 나름이제." "오빠가 그리 된 것도 천추에 한이 되는데 우애 손주까지 그리 되겄십니까? 이자는 손주 너리나 보고 살 긴갑다, 태산겉이 믿었는데 남편 덕 없이믄 자식 덕도 없는 기라요."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면서 또 치맛자락을 걷어 코를 푼다. "남편 덕이 없기는 와 없노. 멩대로 못 살고 갔이니 그렇제." "멩대로 못 살았이니 남편 덕 없는 기지요. 천지간에 울 어미겉이 박복한 사램이 또 있겄소?" "온전히 사는 사램이 그리 흔하나? 남도 그러려니, 맘을 편키 묵어야, 그래야 살제." "성아." "와." "요새도 니가 그러나? 정 그렇다믄 나 어매 데리고 갈란다. 아아들 아배도 그러라 카고." "아이다. 아이다. 요새는 니 성이 얼마나 잘한다고." 야무네 말에 "지가 잘하는 기이 머 있십니까. 엄니가 지 땜에 인병이 들어서 저리 됐일 깁니다. 하지마는 엄니는 내가 모실 기구마." "엄니 데리가겄다는 맘이사 모릴까마는 아무리 잘한다 캐도 사위는 남의 자식, 여기보다는 안 편할 기다. 싸우고 찌지고 해도 내 푸녘인께." 야무네가 거들어 준다. "어매, 어매는 우찌 그리 말 한마디 안 합니까?" 뒤늦게 말했다. 야무네와 귀남네는 서로 쳐다본다. "어매, 멍청이가 됐십니까?" 복년은 안타깝게 말하며 얼굴을 쓸어본다. "말 좀 하이소." 그래도 대답이 없자 귀남에게 고개를 돌린 복년은 "성아, 어매가 와 저카제." 하고 묻는다. 귀남네는 선뜻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앞을 못 보게 됐다." 야무네는 나직히 말했다. "머라 캤십니까!" "성환이가 그리 되고부터 앞을 못 본다." "좋은 일도 없는데 오기는 머하로 왔노." 성환할매는 돌아앉을 듯하며 말했다. 6장 밤새와 억새풀 바쁘다는 곤도를 불러내어 여관방에서 배설자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으슥한 곳에 있는 여관은 이들이 단골로 다니는 밀회장소이며 배설자가 세들어 사는 집과도 과히 멀지 않았다. 어지간히 취기가 돈 배설자는 나른한 눈길로 사내를 바라보았으나 도무지 반응이 없다. 배설자는 다가가서 나긋나긋한 긴 팔로 사내의 목을 감는다. "나 오늘 바빠." 곤도는 설자의 팔을 떼내었다. "왜 그래요?" 무안도 타지 않고 다시 설자는 사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이러지 마!" 떼밀어 낸다. "왜 그러지?" "바쁘다 했잖아." "그게 아니겠지."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여자가 생긴 거지. 그지?" "내 나이를 생각해봐. 유키코 하나 감당하기도 힘들어." 따지고 드는 말도 싫지만 설자 육체에도 흥미 없다는 것을 곤도는 나타내었다. "게다가 마누라도 있고." 하다가 설자는 깔깔 웃는다. 곤도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하긴 늙기는 늙었어. 불쌍하게도. 그럼 뭐하러 나왔지?" 곤도는 지난날 배설자 자매가 어렸을 때, 만주에서 부친과 함께 정보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고 나이도 이십 세 가까이 연장인데 설자는 꼬박꼬박 반말이다. "술만 처먹으면 저 따위라. 정 떨어지는군." 곤도는 설자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훅 내어뿜는다. "폐물이 되었담 정이 떨어지고 자시고 그런 건 없지. 깨끗하게 손 끊으면 되는 건데 내용이 안 그렇지 않아?" "그놈의 혓바닥 잡아 빼기 전에 말버릇 고쳐!" "흥! 새삼스럽게, 우리가 어디 한두 번 싸웠나? 보고 싶어서 불러낸 것도, 보고 싶어서 나온 것도 아니잖아." 설자는 술을 마신다. "그 말은 맞는 말이야." "해서요?" "해서라니." "내 성질 잘 알텐데?" "알지. 독사라는 것 잘 안다. 그래서 날 물겠다 그거야?" "늑대 같은 놈!" 곤도는 껄껄걸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이봐 유키코, 그래도 조금은 미련이 있어서 나왔는데 고분고분 굴지 않으면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것쯤 잘 알텐데 안 그런가? 서로 싫증날 때도 됐고." "그것도 어디 한두 번은 들은 얘긴가? 흥 ! 어차피 난 덫에 걸린 몸, 고분고분하든 포악하게 굴든 운명은 마찬가지야. 내 아버지의 운명같이." 그 말을 할 때 설자는 고개를 숙였다. "어, 그것 참 신통하군. 그런 인간적인 면도 있었나?" 곤도는 비웃었다.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배설자는 웃고 있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부모 형제, 난 그런 데는 흥미도 애정도 없어." 곤도는 담배와 성냥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나 가야겠어." 일어섰다. "가지 말아요!" 사내 옷자락을 꽉 잡는다. "놔." 옷자락을 놔주는 대신 설자는 두 팔로 사내 목을 껴안고 입술이며 볼이며 할 것 없이 키스를 퍼붓는 것이었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구걸이었다.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늙은 늑대와 젊은 독사의 몸은 엉켜 붙어서 동물이 되고 말았다. 이들의 만남은 늘 그러했고 정사 또한 그러했다. 다른 남자에게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면서 마치 최후의 보루같이 설자는 곤도를 놓아주지 않았고 곤도 역시 헤어질 것을 매번 생각하면서도 이 집요한 여자 육체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관에서 나왔다. 사방은 어두웠다. "집에까지 데려다주어요." "그럴 시간 없어." "요즘 왠지 불안해." "가까운데 뭘 그래." 곤도는 잘 가라는 말도 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간다. "나쁜 놈. 거지 같은 새끼. 가다가 뒈지기나 해!" 악담을 하다가 걷기 시작한다. 술이 과했던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나쁜 놈, 악마, 지가 나하고 헤어져? 어림없다, 어림없어. 골치가 왜 이리 아프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나는 고래심줄보다 질긴 여자야. 나는 죽지 않아.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도 모르게 된다고? 아버진가 뭔가 하는 사람같이 말이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어허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만주 벌판에서 썩은 고기 쪼아먹는 까마귀같이 살았다." 주택가의 후미진 길이었다. 달도 없고 캄캄했다. 경계심이 병적으로 강한 설자는 밤에 혼자 집으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밤에는 거의 나다니질 않았다. 여관에서 곤도를 만날 때는 대개 밤이었으나 그런 날에는 집 앞까지 곤도는 데려다주었으며 지금같이 혼자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난번에 동생 용자를 밀어뜨려 얼음판에 넘어져서 다리에 골절상을 입힌 경우만 하더라도 바로 그 경계심 때문이었는데 다행이 용자는 깁스를 하고 병원에서 고생은 했으나 완쾌하기는 했다. 이들 자매가 대련에 있을 때 배설자와 함께 연파로 몰려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우연히 길거리에서 용자를 만나게 되었고 아직 대련에 살고 있다면서 돌아가기 전에 설자를 한번 만나고 싶다 했기에 집을 가르쳐준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설자가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것도 그 경계심 때문이었다. 온갖 후안무치한 행동을 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는 그였지만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는 세심하고 치밀했으며 정체를 감추는 데도 천재적이었다. 보고 싶어 불러낸 것도 아니며 보고 싶어서 나온 것도 아니라는 곤도와 배설자의 관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충격을 다소 받은 것 같다. 다소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으나 속이 영 편치 않았던 것이다. "재능 있고 머리 비상하고, 아버지라는 사람이 살아 있을 적에는 나도 근사했단 말이야. 공주는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무용도 배우고 피아노도 쳤지. 내 엄마가 누군지는 기억도 없고, 용자 그 계집애 어미는 기억이 나는데 구두를 닦아서 신겨주곤 했지. 난 그렇게 자랐다구. 촌구석에서 짚세기 끌고다닐 적에, 내 몸을 탐했던 사내들도 많았구, 나한테 한번 빠지면 아무도 헤어나질 못했지. 아암 내가 도망가기 전에는, 왜 이리 눈앞이 몽롱할까? 어지럽다." 설자는 길켠에 엎드려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림자 같이 다가선 사내가 설자의 팔 을 비트는 것과 동시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것은 전광석화 같아서 설자는 비명 한번 지르지를 못했다. 두팔을 뒤로 돌려서 준비해온 노끈으로 묶은 사내는 "걸어!" 하고 나직이 명령했다. 설자가 몸부림치며 움직이지 않자 사내는 옆으로 바싹 끌어당겨서 끌고 간다. 주택가 뒤쪽 언덕으로 올라간 사내는 소나무에다 설자를 세우고 묶었다. "천우신조다." 사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며 말했다. "내 목소리만 들어도 너는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았을 게야." 설자는 머리를 마구 흔들어대었다. 네가 거처하는 방이 어딘지는 언제 잠이 드는지, 주인집 사내가 언제 숙직을 하는지 나는 면밀하게 조사를 다 했어. 강도로 침입하여 너를 죽이려 했는데, 오늘 밤 말야. 이거 무슨 기적이냐?" "..." "나는 너를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만주에서도 너의 행적은 열 번 죽어 마땅했는데 국내로 들어와서도 넌 스파이로 계속 활약을 해왔어. 시간 끌 것도 없고 더 이상 고통 주고 싶지도 않아." 사내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어 신음하듯 낮은 소리를 내며 설자 가슴을 향해 찔렀다. 소생을 두려워하듯 사내는 다시 목을 향해 칼을 찔렀다. 그리고 숲속을 향해 칼을 던진 뒤 터덜터덜 언덕을 행해 내려간다. 설자 자신이 중얼거린 대로 부친이 죽은 후 만주 벌판에서 썩은 고기를 쪼아먹는 까마귀같이 살았을 무렵, 설자가 관계한 사내 중의 하나가 이 사람이었다. 순진한 청년이었던 그는 어쩌다 운수 불길하여 배설자의 유혹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독립지사의 딸이며 부친은 왜경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허언에 속았으며 철없이 형의 활동 상황을 발설한 그것이 빌미가 되어 상당한 독립운동의 조직이었던 것이 파괴되었고 형과 그의 동지 한 사람이 일본 헌병에 의해 총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형의 넋을 위로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사내는 배설자를 죽이지 않고는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배설자는 그 공로로 서울까지 피신해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곤도는 그의 뒤를 봐주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배설자는 그의 죄값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그의 생애는 끝이 났다. 이틀 후 소나무에 묶여진 채 처참하게 죽은 배설자의 기사가 신문에 났다. 신문은 치정으로 몰아가는 추측 기사였고 무용가라는 신분이 밝혀져 있었다. 일본 경찰의 정보원이라는 진실이 밝혀졌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독립운동 단체의 테러였을 것이란 생각에 미쳤을 테이지만, 설사 취재하는 기자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기사화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그 사건은 그것으로 슬그머니 신분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배설자 살해 사건에 부딪친 곤도는 '내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게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으나 후회는 아니었다. 다소의 충격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단순한 치정에 얽힌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만주를 연상했던 것이다. 범행이 대담하고 치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치정에 연유된 사건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설자의 악랄함, 가증스런 이중 성격, 점액질과도 같은 탐욕, 그리고 그이 육체의 비밀을 아는 만큼 파멸의 구렁창에 빠진 남자가 있을 것이란 상상은 어렵잖은 일었다. 그런데 곤도는 어떤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자신이 할 일을 남이 해주었다는 묘한 안도감이었다. 배설자도 이제는 어지간히 써먹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웬만큼 성가시다 생각하는 인물들은 대개 묶어놨고 삼엄거나 지식인들을 총동원하다시피 별다른 저항 없이 학병 문제도 일단락된 상태여서 한숨 돌리는 판국인데 배설자가 뭐 그리 요긴할 것인가. 쓸 만큼 쓰고 버리는 것이 그 세계의 생리다. 매장하건 추방하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곤도는 쾌락에 대한 욕구를 아주 버리지는 못하였고, 청산할 수 있는 자신의 의지를 확신할 수도 없었던 참이어서 남이 해결해준 데 대하여 안도를 했던 것이다. 참으로 배설자의 맞수다운 사내의 생각이었고 한낱 고깃덩어리로 최후를 맞이한 여자나 여생을 고깃덩어리로 살아갈 사내나 따지고 보면 피장파장이다. "원래 소행이 나빠서 말이야. 남자 관계가 복잡하거든." 경찰서에서 곤도는 손가락으로 코끝을 긁으며 말했다. 촉수가 만주 쪽으로 뻗었지만 그것에는 일단 언급을 보류한다.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대담하고 완벽하고, 전문가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금품을 노린 강도의 소행으론 볼 수 없으니까 이건 테러리스트가 한 짓이 아닐까요?" 담당 형사가 한 말이었다. "글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무슨 거물이라구." 곤도는 적극적으로 찬동하지 않는 듯 말했다. 결국 탐문 수사에 나섰지만 배설자의 사생활이 워낙 비밀에 싸여 있었으며 이렇다고 지목할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 용자와의 말다툼, 빙판에 넘어뜨려 용자가 골절상을 입은 일이 걸려들었다. 그러나 용자의 알리바이는 확실했다. 왜 다투었냐 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리고 용자뿐만 아니라 그날 동행했고 다투는 것을 목격했던 찻집 부용의 여주인 부용이도 불려갔다. "언니 배설자하고는 왜 싸웠나. 그도 대로상에서." 담당 형사는 용자에게 험상궂게 물었다. 대답이 없자 "자매 사이에 무슨 원한이 그리 깊었지?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싸웠다니 말이야." 형사는 담배를 꼬나물고 용자를 노려본다. "다리는 빙판에 넘어져서 그리 된 건데요 뭐. 언니가 무슨 힘으로 분질렀겠습니까." "그래? 왜 싸웠냐." "본시부터 사이가 나빴어요. 우린 배다른 자매거든요." "그건 알어.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랬나? 가령 너 애인이라든가, 그런 사내한테 부탁해서 말이야." "뭐라구요?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싸우게 된 이유를 말 못하나!" "기가 막혀서.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용자는 울었다. "언닌 잘살면서 날 한번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서로 감정이 삐딱하니까 대하면 싫은 말 하게 되구, 그날도 남 등쳐서 잘산다 그랬더니 날 떠밀었어요." 용자는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 "남 등쳐서 잘산다?" "언니의 생활이 그런 걸요. 부잣집 여자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무용가 행셀 하구. 돈 좀 빌려달라 해도, 언제나 거절했어요." "그래 원한이 쌓였구나." 계속 실랑이를 했으나 용자 입에서 어떤 여자에게 집을 가르쳐 주었다고 배설자가 펄펄 뛰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부용이도 대개 그 비슷한 말을 했다. 남의 등쳐먹고 산다 했을 때 배설자가 동생을 떠밀었다고 사실과 다른 얘기를 했던 것이다. 많은 시달림을 받다가 그들은 풀려났다. 곤도는 성질이 못됐고 과대망상증에다가 터무니없이 자존심이 강한 배용자를, 그러나 단순하고 약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간의 사정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애당초 용자에게 혐의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부하 형사가 갖고 놀게 내버려두었다가 지칠 때쯤 내보내라 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은 집을 가르쳐주었다고 노상에서 만나자마자 배설자가 용자의 뺨부터 때린 얘기를 숨겨야 했을까? 배설자 살해 사건과 그 말을 숨겨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부용이나 용자도 배설자 죽음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단 말인가. 사실 그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물론 용자와 부용이가 상의하여 사실과 다르게 얘기했던 것이다. 이유는, 만주서 온 옛날의 설자 친구, 그에게 집을 가르쳐준 일 때문에 싸웠다 한다면, 상대는 왜 집을 알려 했는가, 설자는 또 왜 그렇게 심한 거부 반응을 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만주서 왔다는 그 사실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개인적인 원한을 떠나서 정치적 테러로 문제가 확대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용자 자신의 어떤 혐의를 받을 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것은 부용의 충고였다. 용자도 설자의 행적을 전혀 모른다 할 수 없었다. 즉각 용자가 자기 방어의 태세로 돌아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방면의 사정을 남보다 잘 아는 처지였으니, 다만 부용이가 어느 정도 설자의 정체를 알고 그랬는지 의심의 여지는 있었으니. 찻집 부용에서는 그 일이 화제가 되었다. "운수 불길하다 보면 길 가다 사람 만난 것도 화근이 될 수 있지." 차를 나르는 부용에게 유인배를 위로삼아 말했다. "왜 아니래요? 소눈깔 같은 그놈의 형사 생각만 해도 소름끼쳐요." "골치깨나 썩이겠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눈에 한번 띄었으니까 단속한답시고 나타나서 그놈의 소눈깔이 부용이를 유혹하면 어쩌누." "그런 쪼다리도 아니예요." 부용이는 웃으며 탁자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고 찻집에서 나가는 송영광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본다. "배용자도 큰코 다칠 뻔했구먼." 한민수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앞으론 우리도 형제간의 다툼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어." "형제뿐인가, 부부지간은? 특히 유인배 자넨 조심해야 할 게야." "이 내가, 뭣 땜에?" 유인배는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시늉을 한다. "안사람 속 그만 썩이라는 얘기야. 그럴 때마다 사무실은 난장판이구 기둥서방도 아닌 주제에 부용이 무슨 할 짓인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짖는다는 말이 있긴 있지. 나야 기껏 사무실이나 난장판 만들어놓고 부용이 좀 부려먹고 그것으로 끝나지만 자네는 어떠한가? 좀 물어보자." "허허허 허허어." 하고 한민수는 웃는다. "기생 방이나 애첩 방에 들앉아서 천하 태평인 자네 말일세." "그것 다 한시절 전의 얘기고, 천하 태평으로 쉴 곳이나 있어? 정말 요즘 같아서는 죽을 지경이다." "메뚜기, 여름 한철 자알 놀았으니 이젠 눈비 맞고 죽어야지." "남의 말 하듯." "남의 말이지 않고? 나야 술이 과한 것이 병, 외입질하고는 담싼 사람이야. 여자가 바치겠다 해도 마다하는 송영광을 빼고 나면 나만큼 담박한 사내도 없다고. 젊은 것들 멋모르고 노는 꼴 보면 쓰레기 소리 들어도 마땅해." "양가댁 서방님이 하시는 말씀." 한민수는 비꼰다. "그런 것에 양가고 광대가 어디 있누. 사회주의자도 아닌 주제에 이죽거리기는." "하여간 그 일은 그만두고, 좀 축소를 해야 살겠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 한민수는 걱정이 태산이라는 듯 댐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그놈의 징용 때문에 한사코 눌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 "돈 한푼 안 주는데 무슨 걱정." "월급 안 준다고 해서 비용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당국에서도 눈치를 채고서." "징용 기피에 이용된다 그거야?" "음." "그건 사실이 아닌가. 금품 수수설까지 있는데." 한민수는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꾸려나가기 힘이 드니 어쩌누." "그러면 나라도 나가줄까? 돈 받고 지리 메우게 말이야." 물론 농담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밥술 먹는 친척도 많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내어쫓기에는 적격자지. 하니 보수 적다고 투정이나 말았으면 좋겠네." 한민수의 말도 농담이었다. 악단에서 유인배는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만주 공연은 어제야?" "삼월 말쯤 되지 않을까? 전선 위문도 겸해서, 일장기와 카키색 복장이 악단을 죽여주는 거지. 얼마나 존속이 될지 시간 문제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온통 병신들만 사는 세상이야." "오죽 답답하면 하는 말이겠나마는 땅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그 말이나 믿어야지." "제에기랄! 어떤 놈같이 배반한 계집 나무에 묶어놓고 죽이는 그런 정열이라도 있었으면. 인생이 꼭 사막 같다." 한민수는 아예 치정 사건으로 몰아놓고 말했다. "정열이 없어서 그런가? 그런 계집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언젠가 자네 얘기했잖아." "뭘?" "추녀라고." "추녀까지는 아니지만 보아서 기분좋은 용모는 아니야." "그렇다면 사내들이 왜 빠질까? 잘못 건드렸다간 골로 가고 신세 쫄딱 망한다 했던가?" "했지." "그러니까 매력은 따로 있다." 한민수는 킬킬거리며 웃는다. "하여간 세상은 요지경이야. 부용이 같은 여자한테는 죽네사네 하는 사내가 없는데... 시시한 인생, 그렇게 못 잊어하는 사내 손에 죽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거야." "넋빠진 소리 작작 해. 못 잊어서 죽였는지 그걸 어떻게 알어. 탕녀의 말로지 뭐. 남한테 몹쓸 짓 한 죄값이구." 하면서도 유인배는 그가 경찰의 끄나풀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배설자에 대한 꽤 많은 정보가 있었다. 유인경을 통해 들은 말이었고 근자에 와서는 권오송 사건의 내막도 알게 되었으며 그 동네 사정에는 비교적 소상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불공평하다고들 하지만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그렇지도 않아. 나쁜 놈이 잘된다는 것은 일시적인 형상이고, 나이 먹으면 사람들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어디 주름살 때문만이겠나? 그 역정이 모습에 각인되기 때문이야. 자네도 셈만 밝히지 말구." "불똥이 왜 이쪽으로 튀나? 나 이래 봬도 남 못할 짓은 안 했다구." "재능 있는 애들, 내치지만 말고 좀 싸안으라고, 길게 내다보고 말이야." "나한테 그런 힘이 어디 있어." 한민수는 우울하게 말했다. 해가 질락말락할 무렵, 부용에게 부탁하여 암시장에서 사다놓은 세숫비누 몇 장을 싸들고 유인배는 전차를 탔다. 인경이 집 앞까지 왔을 때는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웬일이냐? 그 동안 통 못 보겠더니." 피곤해 뵈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인경이 말했다. "형님은 아직입니까?" "음, 친구가 상배를 해서. 아마 거기서 밤샘을 할 모양이구나." "누군지 몰라도 고생길에 들었군요." "왜 아니래? 허니 너도 가숙 소중한 줄 알아야 해." "와서 뭐라고 일러바쳤군요." "일러바치나마나 뻔한 일 아니냐?" "마산은 좀 어떤가요?" "그저 그렇지 뭐. 그 생각만 하면 속상해. 그애만 아니면 오라버니도 좀 편하게 계실 텐데." "형수는 여전히 그렇습니까?" "변할 리가 있겠니? 아들 대신 올케가 죽어주었으면 싶어. 오죽 하면 그런 생각을 다 하겠니? 짐승만도 못해. 남이 손가락질을 해도 무안한 줄도 몰라. 이제는 친정에서도 붙이지 않는 모양이야. 자식은 그래 놓고 자신은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병원이다 어디다, 용한 의원 찾아서 침 맞으러 다니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일종의 정신적 불구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치부하십시오.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요." "도척이도 제 자식은 귀엽다 하는데 어찌 제 목숨 하나만 하늘같이 생각할까. 나도 자식 둔 어미지만." "악모도 더러 있다 하더군요. 자식 팔아먹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보다 일전에 세숫비누가 없다 하셨지요?" "구했어." "몇 개 가져왔는데." 유인배는 신문지에 싸온 것을 내밀었다. 인경은 그것을 펴보며 "고맙구나. 좋은 비눈가 봐?" 냄새를 킁킁 맡으며 말했다. "멋쟁이가 사왔으니까 당연히 좋은 걸로 골랐겠지요. 남자들이야 뭐 압니까." "가만 있자. 너 바람 피우는 거 아니냐?" 유인배는 손을 흔들면서 "당치 않은 말씀 마십시오. 제 주변이 온통 그런 것 없이는 못 사는 족속들 아닙니까? 딴따라라고 모두 외입쟁이가 아닙니다. 그럼요." 인경은 웃는다. "저녁 먹었니?" "아니오, 밥 좀 주십시오." "모처럼 맨정신의 얼굴을 보니 반갑구나. 이제 철이 드는 모양이지?" "하 참 누님도, 저 주정뱅이 아닙니다." "아니면?" "아니라니까요." "너 술 안 마시고 오는 날은 한 번도 없었다." "맨정신으로 오기가 뭐해서! 하지만 주정한 일을 없었어요." "주정했으면 오게 내버려두었겠니? 대문이 좁아라 내쫓았지." 하다가 인경은 찬모를 불러 저녁을 차리라고 이른다. 밖은 아주 어두워졌고 멀리서 전차 종소리가 아렴풋이 들려왔다. 의걸이장과 장롱만 덩그렇게 놓여져 있고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방에서 유인배는 저녁상을 받는다. 찬모는 불씨를 담으려는지 놋화로를 들고 나간다. "누님은 저녁 드셨습니까?" 인배가 물었다. "음, 아까 애들하고." "이렇게 밥상이라도 내주시는 누님이 계시니까 그나마 이 유인배, 아주 버려진 신세는 아닌 모양입니다." 밥을 뜨면서 말하는 인배 목소리에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외로움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자초한 건데 누굴 원망하니." "제가 무슨 못할 짓을 했다구, 사람 죽인 살인 죄인도 아니겠고." 밥을 씹어 삼키고 나서 "화신 앞에서 어제 외삼촌을 만났어요. 못 본 척, 절 피하시더군요. 창피하다 그거 아니겠어요?" "밥이나 먹어." "처가 식구들도 그래요. 사위가 뭐하느냐 물으면 할말이 없다나요? 따라 살아주니까 고맙기는 하지만 제 처도 역시 창피하다 생각하나 봐요. 그래서 자연 처를 대하는 저의 태도도 거칠어지고."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쉽게 생각들이 바뀌겠니? 그러나 너 처는 착한 사람이다. 박대히지 말어." "압니다." 늘 얼근하게 취해서 찾아 왔었다. 만사를 얼렁뚱땅 넘겼고 정색을 하며 얘기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한 그가, 낙천적이던 그가 고민은 하고 있었구나, 인경은 생각을 했고 유인배는 회색 법단 저고리를 입은 인경을, 그 저고리의 하얀 등정을 바라보며 어째 쓸쓸해 뵌다, 누님도 이제 늙는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이도 들었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그곳 정리하고 집안과도 화해하는 게 어떨까?" 조심스럽게 인경이 말했다.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을 아니지만." "..." "받아줄 사람들도 아니지 않습니까. 가문에 먹칠했다, 그 생각을 버릴 사람들도 아니구요." "옛날에는 반가에서 광대가 나오면 멍석에 말아서 때려죽였다는 말이 있긴 있더라만 요즘에야... 남의 이목이 있어 그렇지 마음속으로는 너를 버리지 않았을 게다," "받아줄 리도 없겠지만 저 역시 그래요. 뭐 딸린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한세상인데 이대로 살다가 죽지요, 그곳은 숨이 막혀 견디질 못할 겁니다," "네가 나서 자란 곳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나." "아편 같은 것이지요 뭐." "아편?" "제가 운신하는 곳 말입니다. 흉허물이 없고 자유스러우니까요. 추한 면도 있지만 발가벗은 인간들 모습에서 서푼어치도 안 되는 체면 같은 것 차릴 필요가 없고 뜨내기 같은 인생이 홀가분해서 좋고 또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 젖어 있어서." "..." "물론 처음에는 저에게도 야망은 있었습니다. 훌륭한 연주가가 되고 싶었고 작곡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조차 집에서는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저에게는 재능이 없었지요. 음악을 좋아했다기보다 신식을 동경했던 겁나다. 그러니 애초부터 딴따라 기질이지요. 어쨌거나 저는 유랑 극단이 좋습니다. 앞으로 그것이 존속될지 알 수 없지만." 밥은 몇 술 뜨지 않고 유인배는 상을 물렸다. "하기야 뭐 다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뭐. 인실이나 오빠나 다 그 고집대로." 하다가 말끝을 맺지 못한다. 그건 경우가 다르지요, 형님이나 인실이는 인생의 속을 보고 신념대로 사는 거지만 저야 뭐 겉만 보고 이럭저럭 때우는 인생 아닙니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좋은 일은 바랄 수도 없고 더 험한 일이 있을까 겁부터 나는구나." "쓸데없는 얘기였지요?" "따지고 보면 그렇구나." "그보다 누님 신문 보셨습니까?" 인경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건 모르십니까?" "아니, 신문 보았어." "놀라셨지요?"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어." 얼굴을 잔뜩 찌푸린다. "세상의 이치가 교묘하다는 생각 안 하셨습니까? 그런 곳에 함정이 있었다니, 악행할 적에는 남보다 오래 살려는 생각이었을 텐데 남보다 먼저 죽으니 말입니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살아 있을 때도 그 계집 생각하면 꿈자리가 사나웠는데 죽었어도 꿈자리가 사납게 됐지 뭐냐." "꿈자리 사납게도 됐어요." "그 계집 때문에 얼마나 내가 속이 상했던지,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까지 생기고 말이야." "그런 인간이 흔히 있었다가는 큰일나게요? 말하자면 그것도 일종의 성격 불구잘 겝니다."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면서 내게는 독립운동하다가 죽은 사람의 딸이라 했던 그 가증스런 일." "그게 바로 밀정의 소질 아닙니까. 아무나가 못하지요." "아주 불쌍하게, 외롭고 조신스리 산다 싶었는데 용모나 잘났으면?" "미인었다면 상류 사회, 여자들 속으로 뚫고 들어갔겠어요? 경계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지요." 인배는 슬그머니 웃었다. "소행이 그렇게 난잡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고, 기가 막히더군.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이니? 정말 두렵고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무서웠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싶어서, 그런 여자도 세상에 있는가 싶어서,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인경은 배설자 얘기만 나오면 감정에 혼란을 일으켰다, 오늘 역시 얼굴이 창백해지며 표현을 다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강선혜한테 피해입힌 것을 생각하면, 차마 낯들고 그애 집을 찾아가기도 힘들어, 정말 그건 악몽이야."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어찌 안 그러겠나? 그 집에 그런 횡액이 또 어디 있겠어?" "어차피 권오송 씨도 당하게 돼 있었어요. 적이 많았으니까." "선혜는 그게 다 자기 때문이라 하더구나. 권오송 씨 장가 잘못 들어서 그런 거라, 배설자의 경우도 자기가 저지른 일이라 하면서, 결국 내가 저지른 일이기도 하구." 마치 어제 당했던 일처럼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오히려 그곳에 들앉아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소리 말어.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권선생이 고문을 당한다 했을 때 선혜는 차라리 친일파가 돼라 앞장서서 일하라 하면서 울더군." "가족들이야 그랬겠지요." "여기저기 모두 상처투성이다. 집집마다 일본놈 피해 안 받은 사람이 없고 따지고 보면 친일파도 피해자 아니겠니? 민족 반역자가 됐으니 말이야." "그 말은 옳습니다. 친일파, 배설자의 비참한 죽음도 결국은 왜놈 때문이니까." 유인배는 매우 진중한 태도로 얘기를 하다가 돌아갔다. 인경은 이튿날 강선혜를 찾아갔다, 낯들고 강선혜를 찾아가기 힘들다 했으나 인경은 권오송이 구속된 후 비교적 자주 강선혜한테 갔었다, "뭘 하고 있니?" "어서 와." 선혜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병자같이 안색도 나빴다. "방안이 왜 이리 널려 있어? 가택 수색이라도 한 거니?" "옷장 정리 좀 하느라고." "얘두 참, 그런 거는 뭣하러 하니? 그러잖아도 머리속이 뒤죽박죽 시끄러운데." "뭐든 일거리를 찾는 것이 요즘 내 일과야." 선혜는 슬그머니 웃긴 웃었다. "만일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쓰레기통같이, 남들이 보고 흉볼거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희한한 생각 했구나. 고생하는 사람은 안 죽어." "배설자 그년 죽는 것 봐." 선혜는 대충대충 방바닥에 쌓인 옷을 개켜서 한쪽으로 밀어놓는다, 인경은 새삼스럽게 경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선혜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경대를 피하여 자리를 옮겨 앉는다.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할 텐데, 얼굴 좀 펴라 선혜야." "너는 속이 시원하니?" "글쎄...그럴 건데 왠지 안 그래." "그렇지?" "뭐가?" "그 무도한 년이 천벌을 받고 죽었는데 기뻐서 춤이라도 추어야 하는 건데 착잡하고 오히려 기분이 안 좋아. 배설자하고 가까이 지내던 여자들이 천당에 든 뱀이 없어진 듯 맘이 놓인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사는 게 뭔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는 끔찍하고 겁이 나아, 악몽을 계속해서 꾸고 있는 것만 같다." "누가 죽였을까?" "그러게 말이야." "치정일가 원한일까..." "..." "아니면 정치적 테러일까..." "지가 무슨 거물이라구." "범인은 잡힐까?" "..." "누가 죽여주지 않나 생각도 했지. 나도 그년을 죽일 수 있다면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허무할 뿐이야,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울하다. 돈 때문인가 원한 때문인가. 어째서 배설자는 우리에게 그렇게도 원한이 깊었는가 싶은 생각도 들구." "원한은 무슨놈의 원한, 그건 악행이구 피해를 준 거지." 인경은 선혜 말을 가로막듯 서둘러 말하기는 했으나 미진했다. 악행이다. 피해를 주었다, 그 표현 자체가 공허했던 것이다. 죽기 전에도 그랬지만 배설자를 생각할 때 늘 인경은 당혹스러웠다. 악녀다, 첩자다, 탕녀다, 물론 그 세 가지 특성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것, 인경의 세월이 안일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특히 친정 형편은 비극이라 할 만했고 자칫하다가는 멸문의 위기에까지 치닫고 있는 현실인데 그러나 인경은 험한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올케가 좀 그렇기는 했으나 대개는 사람의 도리를 중히 여기며 그런 분위기의 친정과 시가에서 사람 보는 시야가 고정되어버렸는지 모르지만 배설자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인경이 충격을 받은 것은 어째서 배설자는 우리에게 그렇게도 원한이 깊었는가, 하는 강선혜의 말이었다. 선혜를 위로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배설자의 죽음을 함께 기뻐하자는 것도 아니었으며 공연히 바람 난 여자같이 가슴이 벌렁거려서 찾아왔는데 그러한 그에게 선혜가 한 말도 충격이었지만 흐린 날, 우중충한 방, 쓰레기통같이 너저분하게 옷가지가 널려 잇는 방에 침울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선혜를 발견했다는 것도 실은 뜻밖이었다 최소한 분풀이가 되었다 하며 웃거나. 과거지사를 열거하며 흥분할 줄 알았다. '그러면 배설자는 나한테 원한이 있어서 나를 속이고 이용하고 가슴 떨리게 했는가.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 무섬증을 가지게 했으며 내게 고통을 주었는가. 아니지. 그거는 아니지 않아? 내가 저한테 뭘 어쨌기에? 선혜도 마찬가지야. 뭘 잘못했지? 권오송 씨가 배설자를 내쳤기 때문에? 그건 적반하장이다, 지가 왜 원한을 가져? 원한은 선혜 쪽에 있는데...' "선혜야." "응." "너 혹 죽은 배설자를 동정하는 거니?" "아니야. 다만 피곤해. 만사가 피곤할 뿐이야." "배설자 죽은 게 속 시원하지도 않고?" "힘이 다 빠져버렸어. 그 동안, 남을 저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너는 모를 게야." "왜 몰라" "처음에는 내 스스로 그를 저주했지. 별의별 저주를 다 했어. 칼들고 가서 죽이고 싶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차츰 그것은 내 의사와 관계 없이, 마치 악령이 나를 찾아오듯... 괴로우니까 그 계집 생각은 안 하려고 피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찾아오는 거야. 하루에 한두 번, 그때 나는 무당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내 미움과 저주가 분명히 그 계집한테 가서 꽂힌다는 느낌 말이야. 그건 참 이상한 체험이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선혜는 차근차근 얘기했다. "그럴 때는 상대가 아프거나 어딘지 불편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내 미움과 저주가 상대의 살을 파고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거야. 나는 몸을 흔들면서 그년 생각 안 하려고 안간함을 썼어. 정말이야. 아주 잊으려 했어. 하지만 영락없이 하루에 한두 번은 찾아 와서 내 맘속에 들앉는 거 아니겠어? 내 자신이 상하더구나. 병자가 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때는 내가 죽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거야.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지..." "무슨 그런 망측한 생각을 하니. 몸이 허약해서 그런 거다. 얘 정신차려. 우리가 벌준 게 아니야. 다른 힘이 벌준 거야." 인경은 내심 매우 놀라고 근심했다. 방에 들어섰을 때도 느꼈지만 선혜의 얼굴을 병자 같았다. 단순하고 덜렁대며 부잣집 외동딸로 철없었던 선혜. 허영덩어리였던 선혜의 지난달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권오송과 결혼하면서 사람이 달라지기는 했으니 이제는 옛날의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권선생 땜에 노심초사, 심신이 약해져서 그런 거야. 아무래도 시골로 가서 정양하는 게 좋겠다." "내가?" "그리고 나 땜에 권선생이 그리 되었다는 생각부터 버려. 일본이 망할 날도 얼마 안 남았다더라. 나도 오빠랑 인실을... 일본이 망하는 날에는 귀한 사람이 되는 거 아니니?" "살아남을지 누가 알어." "어디 너 같은 사람이 한둘이니? 그래도 너에겐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잖니?" "..." "모두 학병에 끌려가는데 너의 아들은 이공과라서 학병에도 안나가구 말이야. 너에게는 남편만 있는 게 아니다. 아들이 있잖아." 강선혜는 재혼하여 권오송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지금 동경K대학에 재학중인데 다행히 이공과여서 학병을 면할 수 있었다. "확실하게 설자 그년은 죽어야 마땅했다. 이제는 나도 뭔가 알 것 같다. 잊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생각하려 할 것도 없고 지나간 일이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고 안 가고는 우리의 뜻이 아니야. 배설자가 죽은 것도 우리의 뜻이 아니듯, 죽고 싶다는 생각만은 하지 말어." "놀다 갈 거지? 바쁘니?" "바쁠 것 없다." "그럼 옷 챙겨넣는 것 도와주어." "그래라." "아직도 너의 올케는 마산 가보지 않았니?" "안 갔어." "왜 그러지? 이상하지 않아. 남의 자식도 아닌데." "병 옳을까봐 겁나나 봐." "참 별사람 다 보겠네." "그래도 남을 해치지는 않으니 다행이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니까. 돈 없어지면 어떻게 살까, 병나면 어떻게 하나. 그 본능 하나뿐이야." "속 편하겠다." "편하지. 먹고 싶은 것,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서 먹구, 조금만 추워도 호들갑이고 조금만 더워도 호들갑이고, 오빠는 저리 되었으니 단념했고 아들도 병들었으니 단념했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불쌍히 여겨서... 본시부터 성질이 그랬는데 우리 오빠 그런 여자를 감싸고 살았으니 인격자지. 정말 나는 오빨 존경해. 나랏일 한다는 사람, 처자식 내버리고, 그게 당연한 걸로 알았지만 우리 오빤 안 그랬어. 언제나 넓은 가슴으로 껴안았다. 누이들까지..." "그걸 누가 모르니? 우리 권선생이 몰렸을 때도 유선생님이 불을 꺼주셨고 뵙기는 몹시 냉정하고 빈틈없는 것 같이만 항상 공평하셨지." 두 여자는 옷을 개키고 챙겨넣으면서 주거니받거니 얘기를 한다. 선혜는 다시 안정이 된 것같이 보였다. "정말 그때, 사실은 그때 권선생이나 내 가슴에 멍이 들었어. 그때 권선생은 친일파로 몰고 동지를 배신했다 하고, 돈을 받고 동지를 팔았으니 어쩌니 하던 사람들, 그들이 지금은 친일에 앞장서서 살아남으려고 버둥거리고 있잖니? 그야말로 돈을 받아 국책 선전의 잡지를 만들고 연극도 하구, 학병들 끌어내는 데 앞장서구." "일본이 세계를 정복하리라 믿은 때문이겠지." "정말로 믿어서 그런 걸까?" "눈이 어두워 그랬겠지. 해외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정말 이가 갈릴 거야." "혹, 배설자도 그쪽에서 해친 거는 아닐까? 넌 지가 무슨 거물이라고 했지만." "어느쪽이면 어떻니? 잘 죽였지. 이제는 주저없이 말하겠다. 잘 죽였다구 나는 악몽을 꾸고 너는 무당이 될 뻔했고." 무당이라기보다... 신들린 거 같고 내 독기가 그쪽으로 가는 것 같고 내가 나를 무서워했지." "이제 괜찮아. 괜찮을 거야. 배고프다 얘." "점심 차릴 거야." 대강 옷 정리가 끝났을 때 점심상이 들어왔다. 밥을 먹으면서 "요즘 명희선생은 어떻게 사니?" 인경이 물었다. 인실의 여학교 시절, 선생이었기에 인경은 명희 선생이라고 했다. "숨만 쉬고 있는 거지." "더러 오니?" "음." "여전히 아름답지?" "하지만 좀 늙었어." "요즘 같아서는 혼자 사는 게 편할지도 몰라." "그렇지도 않아. 말은 안 하지만 그 앤 평생 친정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 "너희 친정에서는 다 뒤치다꺼리하듯이 말이지?" "할말 없지. 나같이 부모 속 썩인 자식도 드물 거야. 외손주 하나 낳아서 어머니 아버지 기쁘게 해준 것밖엔 없다. 학병에 안 나가게 되어 그것이 효도한 걸까?" "실은 말이야. 뭐 오늘 그 얘기 하러 온 건 아니구,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명희선생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 "원하는 사람이야 많지." "다른 데서도 청혼이 있었어?" "나한테 얘기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지. 옛날 동경 있을 때부터 명희를 짝사랑하던 사내였는데 난 명희보고 얘기하지도 않았어." "왜?" "보나마나 거절일 거구 나 역시 야망이 강한 그 사내를 믿지 않으니까. 지금은 변호사, 상처를 했다나?" "직업은 괜찮구나." "너에게 말했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니?" "지금은 별로 하는 일이 없지만 상당한 자산가야. 사람도 점잖고, 애가 둘이지만." "상처했니?" "음, 애아버지 친군데 그만하면 괜찮을 것 같지만."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모르지. 그 애 둘도 없는 친구가 재혼한 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집안이 요즘 시끄러워." "무슨 일이 있었니?" "밥을 뜨다 말고 인경은 선혜를 쳐다보았다. "조카가 학병에 끌려갔다." "오나가나, 요즘 듣는 소식이란 모두 그 얘기, 우리 시가 쪽에서도 한 사람 나갔어." "조선 사람들 심장을 도려내간 거지." "..."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왜놈들 재빠른 거는 알아주어야 해." "누가 그러더구나. 일석이조라구, 전쟁에 써먹으니까 좋고 조선의 두뇌를 없애는 데 그 이상 좋은 방법은 없다는 거야.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후환을 없게 하는 것도 되구 말이야. 그 아들들이 없으면 누가 앞장서서 일을 도모하겠니?" "뿐이겠니? 또 있어. 기존의 지식인들은 모두 반역자로,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죄인으로 만들었지." "아무튼, 임교장댁도 심려가 많겠다." "그래... 명희한테는 말이 조카지, 부모가 무능력하니까, 그 뒷감당도 명희 몫이지." "능력이 있어도 별수없지. 모두가 난리로구나." "난리지... 끝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죽든 살든 설마 끝이야 없을라구, 끝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우리 오빠, 인실이, 너의 권선생도 만날 날이 있을 거야." "..." "믿고 살아야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명희 얘기가 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선혜는 화제를 돌렸다. "그 애를 보고 있으면 딱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 내 코가 석자 오치나 빠져 있는데 남의 걱정할 계제는 아니다만." "딱하기야 딱하지." 인경은 선혜의 눈치를 살피며 맞장구를 친다. "원래 맹꽁이 같은 아이였어. 예민하면서도 평생 제자리를 못 찾고, 언제까지 친정 식구들 등에 지고 다닐는지, 바보 같은 명희." 선혜는 그러나 그 얘기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며 그냥 간섭 해보는 말인 것 같았다. 생각은 다른 곳으로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명희 그 애도 그렇지만 오빠가 문제야. 어쩌면 그렇게 무능한게 만년 문청이라니까." "문청이 뭔데?" "문청도 몰라? 문학청년." "너의 서방님은 안 그렇고?" "내 얘기는 글을 쓰든 잡지를 만들든 간에, 재능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뜻이야. 이건 마치 천석꾼 지주 아들이 주색에 빠지듯, 생계는 걱정이 없구, 철이 없는 건지 후아무치한 건지, 그 재산이 어떤 재산인데? 명희 불행의 대가 아니니? 그래도 누이를 망쳤다는 생각은 있어서 병이 나구, 병이 나니까 또 명희 짐이 되고 파파할미가 될 때까지 그럴 거야. 조카들 공부도 명희가 다 시켰지만 소용없어. 고모한테 부모를 밀어붙여 놓고 분가해서 살고 있으니 그게 도리야?" "그건 쓸 곳도 없는 고모 재산이 있으니까. 안 그랬으면 왜 책임을 안 지겠어. 불량한 자식들도 아닌데." "결국 적당히 비굴하면서 고생은 면하겠다, 안일하게 살자, 그거지 뭐. 삼일운동 때 옥살이를 했다. 해서 또 이건 하는 일 없이 만년 지사거든. 참 기가 막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남의 인생에 눌리어 명희는 도대체 뭐니? 바보 같은 것!" 선혜의 어투는 신랄했다. 그리고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양미간에 신경질이 실리면서 흥분하는 선혜, 무의식적으로 밥을 짓이기고 있는 선혜를 정상으로 보기 어려웠다. 인경은 몹시 불안해하는 표정이다. 늘 거침없이 말하는 선혜 성미를 모르는 바 아니나 임명빈을 노골적으로 그렇게까지 성토할 이유가 없다. 선혜의 말대로 자기 코가 석자 오치나 빠져 있는 형편인데, 역시 배설자 죽음에 대한 개운치 못한 뒷맛 때문인 듯싶었고 그로 인하여 병적인 혹은 이상한 체험을 한 때문인 것 같다. "조선 남자들 대개가 그렇지 뭐. 능력보다 일할 자리가 없는 것이 현실 아니니? 학력이 높을수록... 친일파가 되든지 아니면 독립투사가 되든지, 그러지 않고서는 모두 어정쩡할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유부단한 거 아니겠어?" 선혜의 어세가 다소 누그러졌다. 국을 떠먹으며 목을 축인다. "글세... 그 댁 사정은 나도 좀 아는데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말어. 사정이 그리 된 걸 어떡허니? 나도 너처럼 친정이 든든했으면 그런 생각 들 때도 있지만." "너하고 명희 경우는 다르지 않아." "다를 것 없다. 임교장이 세상 물정에 밝아서 실패 없이 기와공장을 꾸려나갔더라면..." "그게 다 능력이 없어 그렇지 뭐." "나는 이해한다. 학벌을 말하자면 우리 오빠가 남한테 빠지니? 그런 오빠가 제재소를 하며 살림 꾸려나간 것 선혜 너도 알잖아. 결국 망했지. 그 동안 땅을 팔고 해서 이어왔지만 살림이 나가려 드니까 어이없이 되더구나. 임교장이 경험 없는 일을 시작하여 실패 본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왜놈들의 정책이 그랬다는 거야. 조선 사람들 설 자리가 없었던 거지." 그 말에 대해서는 선혜도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또 명희선생이 오빠 강권에 못 이겨 시집간 것도 아니지 않아?" "그건 그래." 뭔가 자기 자신이 아닌 길을 치닫고 있었던 것을 겨우 깨달은 것처럼 선혜는 훨씬 수굿해져서 말했다. 밥상을 내가고 숭늉으로 입가심을 한 두 여자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본다. 기미가 슬고 까칠하게 메마른 얼굴, 젊음이 다 가버린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인연도 남다르고 길다면 길다. 유학간 동경에서 명희와 가까이 지내면 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매와 같은 정이 지속되었으나 인경은 그보다 어린 시절, 같은 여학교에 다니면서 공통점이라곤 공부를 잘했다는 것뿐, 비윗살 좋고 말괄량이 같은 선혜와 조신한 인경이 이상하게 죽이 맞아서 친했던 것이다. 인경이 시집살이를 하고, 선혜가 초혼에 실패하여 유학이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적잖이 요란했고 요란한 만큼 풍랑을 겪곤 했을 무렵, 이들 사이가 뜸했다가 인경의 시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이들은 다시 옛 친구 시절로 돌아가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 배설자에게 피해를 본 사건도 생겼고, 권오송이 구금된 후로는 인경이 쪽에서 강선혜를 자주 찾았다. 그리고 마산 결핵 요양소에 있는 조카 때문에 인경은 남편 몰래 선혜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유선생님한테는 우리 권선생이 신세를 졌는데 내가 진작 챙겨야 했던 일인데 갚을 생각은 말어." 선혜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선혜야." "음." "당분간 친정에 가 있는 게 어떨까?" "싫어." "왜?" "노인네들 한탄하는 얼굴, 견딜 수 없어." "그래두." "너 나한테 귀신붙었을까 봐 겁내는 거지? 무당이라도 될 것 같으니?" "애두, 무슨 그런 말을 하니." "걱정 말어, 나 권선생 나올 때까지, 조선이 독립될 때까지는 살거야. 어째 속이 거북하구나." 선혜는 베개를 꺼내어 드러눕는다. "너도 누워." "난 괜찮아. 소화제라도 먹겠니?" "식곤증이겠지 뭐." "밥도 얼마 안 먹었는데." "인경아." "왜." "우리가 뭣에 쓸려고 교육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마에 팔을 얹고 천장을 올려도 보며 선혜는 중얼거렸다. "나 개인으로도 그렇고 조선 사회에서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가 무슨 득이 있었을까?" "그런 말을 왜 하니? 새삼스럽게." "그냥 해본 말이야. 너 가고 나면 말할 사람도 없어." "나야 뭐 학교 졸업하자마자 출가해서 옛날 여자들이 살았던 방식대로 살았지만 넌 다르지 않니? 남녀 평등론도 쓰고 장안의 멋쟁이 신여성, 좀 요란했어?" 인경은 웃으며 말했고 선혜도 쓴웃음을 띤다. "눈먼 망아지가 요령 소지만 듣고 갔지. 천장지축 뭐 알기나 했나? 그래서 오늘 이 꼴이 된 거 아니니?" "동경으로 갈 때 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갔었니?" 뭐가 되겠다... 글쎄, 지금 생각이 안나. 멋이 있는 신식 여성, 사실은 남자가 싫어서 이혼하고, 서울에 있을 기분이 아니었어," "나는 살림하면서 학교 선생이 부러웠어." "너가?" "써먹지도 못할 교육은 왜 받았나 싶기도 했고 우격다짐으로 시집보낸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어." "양머리 하고 하이힐 실은 여선생이 부러웠던 게로구나." "맞어. 하하핫 하핫..." 인경은 소리내어 웃었다. "결국 알맹이가 뭔지도 모르고 겉모양만 보았지. 알맹이를 알았더라면 형무소를 들락거려야 했고 인실이같이 살았을 꺼야." "..." "유행 따라서 부지런히 양복 지어 입고 유식한 말투, 영어 나부랭이나 지껄이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얼굴에 주름이 잡혀 마주앉아 있는데 말이야. 한심스럽다." "내 동생 인실이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인실이 문제는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길들여져 왔지만 역시 인실의 얘기가 나오니 마음이 어둡게 가라앉고 겨울 날 찬바람 같은 설움이 미치는 것을 인경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살아는 있을 거야." "살아 있긴 한 모양인데."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산 요양소에서 오가다를 한번 만났을 때 인실이 살아 있다는 암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너의 친정에서 인실을 만났을 때, 아, 그래 동경진재 직후였어. 인실이 진재를 겪고 돌아왔을 때야. 왜 기억 안 나니? 널 길에서 만나 함께 갔을 때 말이야." "기억 안 나는데." "만주 가서 비적단 여두목이 될까, 하고 내가 큰소리쳤지. 진재때 조선인을 학살한 일 땜에 분개하면서 그랬던 거야. 했더니 인실이가 뭐랬는 줄 아니? 잘 어울릴 것 같애요, 그러더구나."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때 넌 어머니 방에 가고 자리에 없었다." "별놈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 다 겉모양만 보구, 일종의 날라리지 뭐겠니? 그랬기 때문에 소위 그놈의 신여성이라는 족속들 남먼저 황국신민 노래를 부른 게지. 그러고도 낯짝에 철판 깔고서 거룩한 교육자, 재주 있는 문필가 예술가, 사회사업가라, 인실이같이 여옥이같이 사는 여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어? 진실로 일하는 여자들은 이름도 없어." "여옥이라면?"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 "형무소에서 해골바가지가 되어 나왔는데 기적으로 소생했다고." "아아, 어떤 남자가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주어서 살아나왔다는 얘기." "그래." "혹 재혼 얘기가 있다는 명희선생 친한 친구가 그 사람 아니니?" "맞어." "별일을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선혜가 몹시 불안한 상태 같아서, 친정에 가 있으라고 내가 권했지만 그건 싫다 하는군요." "왜 그럴까요? 여지껏 잘 견디어왔는데." 다소 마음을 놓은 듯 명희가 말했다. "원인은 배설자 그 계집 때문이지요.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분이 좋다고 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자업자득인데 왜 언니가 충격을 받습니까." "그런 설명하자면, 설명하기도 어려운데, 나는 이해할 수 있어요, 물론 증오감 배신감 때문에 그리 된 일이지만 죽이고 싶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럴 경우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한데 그 생각이 차츰 병같이 된 모양이에요." 하다가 인경은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한다. "뭐라 설명을 해야 할까... 선혜 말로는 그런 미움의 마음이 차츰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달려든다는 거예요. 배설자가 눈앞에 떠오르면 그럴 때마다 느낌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생각할 때 상대방은 아플 거다, 어디가 불편할 거다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어요, 그럴 때마다 느낌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자기 자신도 지치고 병이 날 지경, 그러니까 일종의 악몽 같은 거지요.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떨쳐버리러 하는데 매일 찾아오는 손님같이 그 증세를 겪게 된다, 그런 말이었고 그 차에 배설자가 죽고 보니 묘하게 자기 자신이 죽인 것 같은 자각에 빠진다는 거예요. 대강 그런 얘긴데... 얼굴빛도 안 좋고 병색이여 농에서 옷가지를 모조리 꺼내어 정리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인경은 힘겹게 말을 했으며 그러고도 표현이 잘 안 되어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명희는 인경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겉 같았다. 다만 정신이 허약해졌다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모양인데 여옥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뭐가 어떻다기보다 선혜를 혼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언니 집에 가 있어도 되고 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안정될 때까지 계셔도 되구요. 그러지 않아도 내일쯤 여옥이랑 함께 가볼 참이었어요." "나도 영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집을 나서서 생각을 하니까 명희선생하고 의논을 해야 겠다 싶었어요. 아무튼 오늘은 늦어서 이 정도로 하고 가겠는데." 인경은 서두르며 일어섰다. "그쯤 아시고 내가 제대로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이상한 계집 하나 때문에." 인경은 허둥대는 것은 날이 저물어 가는 탓도 있었지만 자기 자신이 재앙을 선혜에게 안겨주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 "차라도 마시고 가셔야지요." 명희는 할말이 많은 듯, 짧은 대면이 아쉬운 듯 인경의 팔을 잡았다. "아니요. 요 다음에 또 오지요. 집도 알고 했으니." 서둘러 나간다. 여옥과 명희가 뒤따라 문 밖까지 나왔다. "들어가세요. 느닷없이 나타나서, 저로서는 궁여지책이었어요." "별말씀을, 오히려 고맙지요." "이번에 조카가 학병에 나갔다는 얘긴 들었어요. 임교장댁에서 얼마나 심려가 크신지, 그럼." 단거리 경주라도 하듯 그러고는 종종걸을으로 인경은 사라진다. 그가 사라지자 명희는 여옥을 쳐다본다. 명희 얼굴을 창백했다. "대범하고 점잖은 분이 왜 저럴까?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여옥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언니가 혹 병이 깊은 것 아닐까? 병원에 가야 할 병이 아닐까? 난 도모지 무슨 얘긴지." "나는 알겠다." "...?" "하여간 방에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온 명희는 엉거주춤하며 "지금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 "괜찮아. 걱정 말고 앉기나 해." "나는 알겠다는 뜻이 뭐니?" "나는 그런 증세에 시달린 적이 있었거든." "뭐라구?" "나도 그런 증세에 시달린 일이 있어. 아주 기분 나쁜 거지. 내 증세를 어떤 사람한테 얘길 했더니 그걸 염력이라 하더구나." "염력?" "죽어라, 죽어라, 망해라, 망해라, 절실하게 간절하게 생각하면 상대가 그리 된다는 거야." "끔찍스럽다!" "끔찍스럽지. 옛날에는 그것 때문에 온갖 비방이 있었던 모양인데 글쎄 그 효험이 얼마나 있었을까?" 명희는 역겹다는 듯 여옥을 쳐다본다. "내가 징그러우니?" 여옥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런 미신을 입에 올리니." "비방을 쓴다는 것이 미신인 건 나도 알아. 그걸 누가 옳다고 했나?" "순교하기 위하여 형무소까지 들어갔다가 죽을 뻔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널 이해할 수가 없다." 명희는 드세게 여옥을 비난했다. 실은 여옥의 신앙을 비판했다기보다 사람을 저주하면 그 상대가 죽게도 된다는 말이 명희는 싫었고 불쾌했던 것이다. "순교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독실한 교인도 아니면서 꽤나 외골수로 얘기하는군.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믿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안돼. 오만이야." 하다가 여옥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견해도 있다는 얘기야. 사람이란 살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별의별 체험을 하게 되고 착각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야." "염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체험도 하게 된다 그 말이니?" "참, 이 애가 끝까지 얘기 듣지도 않고 왜 이리 서둘러?" "..." "그건 일종의 병적 심리 상태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도 이상한 체험을 한 건 사실이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여옥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덤덤했다. "오선권이하고 이혼을 했을 때, 나는 그를 잃었기 때문에 절망했던 것은 아니었어. 슬퍼했던 것도 아니었어. 어쩌면 나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 믿었는지 몰라. 아버지나 오빠가 진실한 교인으로, 영혼이 순결한 사람으로 오선권을 믿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믿었던 거야. 아마 강여사나 인실이언니가 배설자로 인하여 겪은 일과 어쩌면 비슷했는지 모르지. 믿었던 상대가 어느 날 갑자기 탈을 벗고 본색을 드러냈을 때, 명희야 생각해보아. 잃었다고 절망하겠니? 슬퍼하겠니? 아니야. 분노 혐오감 증오 그 이외 무슨 감정이 있겠어?" "그만 해. 아직까지 그 생각에 매달려 있는 거야? 넌 다 잊었다, 극복했다 했잖았니." "그럼. 오래 전에, 구경꾼같이 무심해졌어. 그런 일도 있었거니." "한데 왜 그 얘길 또 하는 거니." "그때 병이 났을 때 체험했던 것을 설명하자니까 그래." "다 잊어버려. 선혜언닌 다만 신경이 허약해져서 그런 거야. 얼마나 오래 시달렸니? 태평스런 본래 성질 땜에 그나마 유지된 거지. 언닌 결혼했을 때부터 주변에 문제가 많았어." "알아. 하지만 지금 강여사가 겪는 건 그게 아니야. 왜 그리 넌 안 들으려고 체머리를 흔드니? 인간의 영혼이 너가 생각하는 만큼 투명한 것도 아니지만 육체보다는 훨씬 무한한 거야. 종교의 본질은 육신을 구제하는 것보다 영혼을 구제하는 것 아니니?" "..." "명희 너도, 통영 바닷가에서 몇 년을 뻗친 것은 분노를 삭이기 위한 것이라 생각지 않니? 물론 각각 그 분노의 대상이나 성질은 다르겠지만 말이야. 하여간 나는 그때 오선권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악을 용서할 수 없었어. 처음에는 오선권이 망할 것을 원했지. 그가 가진 그 불의의 것을 다 잃을 것을 원했어. 결코 성공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 미움의 감정에서 놓여나려고 했다. 안 되더구나. 그때는 내 의사하고는 상관이 없이 그 미움이 제 마음대로 찾아와서 내 영혼을 파먹는 거야. 그러고 나면 나는 기진하여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내 미움의 감정이 치열하게 탈 때, 그건 정말 이상한 환상이었어. 내가 치열한 만큼 치밀해지는 그 순간 상대가 온전치 못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너가 듣기 싫어하는 거 알어. 불쾌하고 두렵고 뭐라 형용할 수도 없는, 그건 병이야. 아까 염력이라 했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그러니까 그런 염력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능력이라는 거야. 그 사람의 말로는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이나 민족도 그 염력 때문에 정권이 쓰러지기도 하고 독재자가 비명에 가기도 한다, 하니 일본도 결국은 망할 것이다, 해악을 끼치는 상대는 말하자만 일종의 마성인데, 분노하여 급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 땜에 병들어서 앓다가 죽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마성을 이겨낼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며, 이겨내어 상대를 쓰러뜨리는 사람은 그 능력이 많다는 거고 기가 넘었다, 기가 막힌다, 기가 찬다, 또는 기가 세다, 그런 말들은, 그러니까 그 기라는 것을 능력으로 본다는 거지. 인간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신비한 경지가 있다는 거야. 예감이라든지 꿈의 암시 같은 것도 그런 능력에서 오는 거래. 불가에서는 식이 맑으면 그렇다 한다는 건데 식이 맑아지는 데는 수도가 따르겠지만 말이야." 여옥은 명희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반문하는 명희 눈빛이 좀 몽롱해 보이는 것 같았다. 일상에 적셔져서 그저 그날이 그날인 듯 무미건조하게 지내오다가 조카 희재가 학병에 나가는 격랑을 겪었고 산에 있는 임명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기별을 받고 올케는 내려갔으며 지금 축 늘어진 듯 피곤에 지쳐 있었던 명희에게 어쩌면 여옥의 말은 신선한 느낌을 주었는지 모른다. 거부하는 마음과 그것이 맞물리어 혼란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너에겐 그 마성인가 뭔가를 이겨낼 능력이 있다 그 말이니?" 명희는 우격다짐하듯 물었다. "들은 얘기야." "그걸 믿니?" "글쎄... 믿는 거는 아닐거야. 내가 그때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그런 말 때문은 아니었고 오히려 반대였던 것 같다." "반대라면." "그 문제는 내게서 떠났다, 과연 인간이 인간에게 벌 줄 수 있는 가, 그런 능력 같은 것은 없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으로 극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난 오선권을 그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미워했거든. 그러나 결과나 과정도 결국은 범한 사람이 감당할 문제라는 생각, 문제라고 말한 것은 원인과 결과는 매우 정확하다는 뜻이야. 하지만 내가 전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상한 체험에서 달아나고 싶은 무의식의 노력도 부인 할 수는 없을 거야. 또 형무소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도, 하기는 뭐 고통이 심하면 죽기를 원했던 심정, 그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은 상당히 나를 지탱하게 해주었어."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 운명은 아닐 거고 필연이란 말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내 생각이 신을 모독하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신의 도움 없이, 신비한 힘에 의하지 않고 행한다는 그 자체는 움직인다는 것 아니겠어? 움직인 것만큼, 움직임의 방향만큼, 정신도 포함해서 당도하는 곳이 있다. 또 그것은 각지 다르고, 사람들은 벌받았다 복받았다 표현을 하지만, 글쎄 나도 어떻게 충분히 표현을 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말이야. 배설자는 강여사 염력에 의해 벌받은 것도 아니며 배설자 스스로의 결과 아니겠는가. 내 말은... 결국 원점이구나." 여옥은 픽 웃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벌이라 하지만, 그래 그건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야." 웃기는 했으나 여옥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단단했다. "일본이 앞으로 패전하게 되면 그것은 일본, 그들 행적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않겠어? 사람들은 소위 악을 행하면서 또 선한 입장에서 착각하고 몽상하고 하지만 확실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인식밖에 없는 거야. 한순간 순간 삶을 실감하는 그것." "철학자 같은 말하네." "반 기독교적이진 않고?" "그것도 그래." "하지만 나는 신을 잊어본 적이 없어. 아니 신을 잃어본 적이 없다." "요즘 난 복잡한 것 생각하기도 싫지만 사고 능력도 없는 것 같다." 명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자신 원점으로 돌아온 것같이 맥이 확 풀렸던 것이다. "복잡하기보다 번잡한 거겠지. 시골에 가면 말이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런 사람들 중에 가끔은 철학자 이상으로 인생을 꿰뚫는 사람이 있어. 본인은 물론 그걸 전혀 알지 못하지만... 철학이란 원래 번잡한 거 아니니? 번잡해지다 보면 알맹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되거든." "심경의 변화가 또 온 모양이구나. 그 할머니 집에선 얼마나 머물렀니?" "겨울은 그곳에서 났지 뭐. 너가 서울 올라간 뒤 도솔암에 며칠 있다가 내려온 길에 그곳을 찾아갔다가 며칠 전에 왔으니까." "그 불구의 아들인가 손잔가 아직 살아 있니?" "그럼. 세상에서 젤 편한 곳이야. 산 같고 흐르는 물 같고." "최선생하고는 어떻게 된 거니." "뭘?" 여옥이는 시치미를 떼듯 그러고 나서 슬그머니 웃었다. "결혼할 거니?" "내일 최상길 씨가 와." "뭐 하러?" "겸사겸사 오는 거지 뭐." "그래 결혼은 할거니 안 할 거니, 왜 대답을 피하는 거니?" "뭐가 그리 바빠? 세상 아직 끝 안 났어." 명희는 끝내 말끝을 흐리는 여옥을 노려본다. "하기 싫으면 관두어." "누가 싫어서 그러니? 너처럼?" "얘두, 그러면 어쩔까? 우리 지금 선혜언니한테 가볼까? "해 졌어. 내일 가지 뭐, 아침에 정거장에 나갔다가." "정거장? 최선생 밤차로 오시니?" "응." 이들은 그간 밀린 얘기를 밤늦게까지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역에 나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여옥은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전등을 켜지 않고 어둠 속을 더듬어서 부엌으로 나간 여옥은 냉수 한 컵을 마신 뒤 가만가만 세수를 하는데 사방은 칠흑 같았다. 어디선지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호루락! 처량하면서도 깨끗하고 조심스런 울음소리다. 하늘 밑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잠든 것만 같은데 호호호 호루락, 우는 새는 왜 잠들지 못하는가. 여옥은 그런 생각을 하며 타월로 얼굴을 닦는다. 정결하게 빨아서 말린 타월의 까실한 감촉, 엷은 비누 냄새, 여옥은 사방에 늘어선 산의 능선으로 떠받쳐진 아주 희미한 하늘을, 알 수 없는 그 공간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전등을 찾아서 켰다. 방안이 환해졌다. 들락거리는 여옥의 기척, 환해진 불빛에도 아랑곳없이 명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들었다기보다 지쳐서 쓰러진 채 정신을 잃고 있다 해야 할지, 모습은 아직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에 생기하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여옥은 그런 명희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다. 서 있다가 앉는다는 동작이 순간 왜 그리 어색하고 이상했는지, 반평생을 자신은 늘 길 위에 있었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 기간, 해골이 사람 꼴로 되어갔던 그 기간을 빼고 나면 늘 길 위에서, 길을 걷고 있었다는 여옥의 생각은 어느덧 명희에게 옮겨져 갔다. 늘 집 안에만 있었던 여자, 언제나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있었던 명희, 한때는 여수에 와서 여옥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으며 통영의 그 외딴 바닷가에 몇 해를 처박혀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걷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숨기 위하여, 세상에서 눈을 감아버리기 위하여... 안과 밖에, 한데 하필 이 아침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여옥은 소매를 걷으며 시계를 본다. 역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반듯하게 단정하게 누워서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같이 잠든 명희 모습을 여옥은 다시 쳐다본다. 한 인생이 끝내 허물 한 벗 벗지 못하고 영원한 유충같이 명희는 거기 누워 있었다. 외로운 사슴 한 마리가 외길에서 발돋움하다가 기척에 놀라서 멀리 깊은 숲 속에 숨어버린 듯 명희는 거기 누워 있었다. 말로는 이제 나는 옛날과 다르다, 다르다 했지만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도 명희에게 변한 것은 없었다. '명희의 정신적 처녀성은 외로움의 고통보다 훨씬 강하다. ?? 애는 늘 이 모양일까? 때에 따라서 순결이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야.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하고는 좀 달라. 도대체 명희는 산다는 것을 실감하고나 있을까? 외로움이란 남자가 없다고 해서 오는 것만은 아니지 않아? 명희는 인간의 그 원초적인 외로움을 사랑할 줄 모른다. 남자를 여자의 반쪽이라 하고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반쪽이라 하지만 세상에 반쪽은 없다. 생명에는 반쪽도 두 개도 없다. 오직 하나, 하나뿐인 게야.' 여옥은 할머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한 겨울을 묵고 온 그 농가의 할머니. 이웃 아낙이 와서 하는 말이 "늙으믄 힘없고 맴이 약해진다고들 허든디." "인력으로는 못허는 일이 하 많은께 그거를 깨달으믄 왠지 맴이 약해지들 안컸어?" 할머니의 말이었다. "그라고 맴이 착해진다고들 허든디 범이네 노친은 날이 갈수록 기승허고 욕심은 하늘 찌른다말씨." "산천초목, 웨디 사람뿐이란가? 목심 붙어 있는 거는 다 애잔헌것인디 욕심부린들 어쩔 것이여? 지은 죄 덜어감시로 살아야제. 한 포기 풀도 소중한 것이여. 이녁이 불쌍허믄 목숨 있는 거이 다 불쌍한 기여. 악행은 못하지러." 여옥은 대강 머리 손질을 하고 크림을 찍어 바른 뒤 옷을 갈아입는다. 새벽 바람을 생각하여 목도리를 둘둘 감으며 집을 나섰다. 전차에서 내렸을 때 역 광장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 오렌지빛 전등이 달무리처럼 번져나 있었다. 대합실로 들어간 여옥은 벤치에 앉았다. 두 다리를 쭉 뻗고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찌르고 벽에 머리를 기대며 마치 남자 같은 자세로, 눈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모두가 새로운 얼굴, 새로운 세상이었다. 자신만의 삶의 일부를 의복으로 눈빛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며 지칠줄 모르게 사람들은 지나가고 또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삶 자체가 존재하며 그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웠다. 그런 하나하나가 무리지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엄숙하고 또 경의로운 일이었다. 개미들의 행군처럼 물고기들의 군무처럼, 그러나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들, 할머니 말대로 칼 찬 순사이건 구걸하는 거지 아이 건 애참하기는 매일반. '영혼의 지도자여,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소서. 저 무수한 무리, 마음으로 헐벗고 굶주린 우리들의 이 무리가 가는 곳은 어디옵니까.' 깜빡 조는 순간의 독백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점으로 돌아와서 던진 질문이었다. 수십 년의 전도사 길여옥은 의식하건 아니했건 새로운 구세주를 향하여 원초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러나 여옥은 동요를 느끼지 않았고 더더구나 그것이 반 기독교적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틀을 벗어나 새로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술렁거리는 대합실 분위기를 느끼며 여옥은 일어섰다. 기적이 울리고 있었다. 증기를 뿜어내는 숨찬 기차 소리, 여옥은 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는 출찰구 쪽을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긴다. 긴 행렬, 손가방 하나만 든 최상길이 그 행렬 속에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 모양에 허름한 차림이었다. 그는 눈으로 부지런히 여옥을 찾으며 나왔다. 그러나 막상 여옥을 발견했을 때는 그다지 반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침 먹고 나왔소?" 최상길의 첫마디가 그 말이었다. "아니오." 여옥이 역시 어제 만났던 사람을 대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날 따라와요." "어디루요?" "아침 요기는 해야 할 것 아니요." "어디서?" "그런 곳이 있어요." "음?" 최상길은 앞서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옥은 남자 걸음을 따라가기 위해 걸음을 빨리 한다. "그런 곳이라면 비밀 식당인가요?" "그런 셈이지." "서울 사는 사람도 아닌데 별놈의 곳을 다 아시네." "관문 사정도 모르고서야, 서울 출입 심심치 않게 하는 처지고 보면 밥 먹고 잠자는 곳은 몇 군데는 알아놔야지." 최상길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변변치 않은 기와집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여옥도 따라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내부는 넓은 편이었고 깨끗했다. 아침 기차에서 내린 지방의 고급 손님을 위해 경영하는 음식점인 것 같았다. 물론 모든 것은 암시장에서 구하여 식단을 짜는 모양이다. 가격은 비쌀 것은 뻔한 일이다. 최상길은 아랫목에 앉으며 양어깨를 움츠렸다. "침대칸이 없어서 일반석에서 꾸겨 앉아 잤더니 춥군." 따끈따끈한 된장찌개에다 차려 내놓은 조반은 조촐했다. "돈만 있으면 밖에 나와서도 이런 음식 먹을 수 있네요." "당연한 얘기 아니요." "..." "어떤 사태 어떤 시대에도 돈은 행세하게 돼 있는 거지." "돈이 없으면..." "그땐 할 수 없지. 그런 골치아픈 얘기는 관둡시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기분 나빠 하세요?" 최상길은 여옥을 빤히 쳐다본다. "시골 농가의 보리죽이 꽤나 위장에 맞았던 모양이지? 살은 토실토실, 천하 태평한 얼굴이오." 여옥은 픽 웃었다. "이제는 어디 갖다놔도 살겠구먼." "그러지 말아요, 최선생." "어서 식기 전에 들어요. 나는 배고파." 최상길은 김이 나는 된장찌개부터 한 숟갈 떠먹고 밥을 크게 떠서 입속으로 밀어넣는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지요?" "밥 먹고 잠자고, 집안일 보러 다니고 뭐 다른 일이 있겠소. 길여옥 씨처럼 홀몸이니까 생활이야 단조롭지. 집에서 밥 먹기 싫으면 큰집에 가서 먹고, 내가 불편했을까 싶어 물어보는 거요?" "그래요. 불편할까 싶어서." "남자 같은 여자가 별걱정을 다 하는군." "내가 건강해지니까 심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그 꼴 두 번 다시 본다면 못 당할 거요." "..." "어서 들어요. 건강해졌다고 교만 부리지 말고, 어디에 들어도 골병은 들었을 테니." "정말 이제는 괜찮은데." "그 과부는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과부 과부 하지 마세요." "과분데 과부라 하지 뭐라 하나." "그럼 나 없는 데서는 소박데기라 하겠네." "아암, 왜 나쁜가요?" "명희는 요즘 안 좋아요." "건강이 안 좋다는 거요?" "여러 가지로, 집안 사정도 그렇고." "조선 천지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서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지, 임교장은 건강이 나빠졌다며요?" 비아냥거리듯 말했으나 여옥은 최상길의 마음이 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익살스러운가 하면 때로는 가혹하리만큼 냉소적이었고 이죽거리는 말투, 여간해서는 정색을 하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의 소싯적부터의 버릇이었지만 불행한 결혼으로 그러한 경향이 짙어진 것인데 의외로 내성적이며 섬세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최상길의 숨겨진 본성을 여옥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가 봐요. 임교장도 괴로움이 많을 거예요." "그렇다고 피하기만 하면 해결이 되는가요?" "피하지 않는다고 해결이 되겠어요? 해결할 대상이 없지 않아요? 자시 자신 이외는." 그 말에 대해서는 최상길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피하기보다 가족들, 특히 명희한테 거추장스런 자기 자신,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그런 심사 아닐까요? 아무튼 안됐어요." "점수가 후하군." "부모 유산으로 부담 없이 쓰는 최선생 경우하고는 다르니까요." "살려놓으니까 배은망덕, 날 비난하는 거요?" 여옥은 노려본다. "사실인데 비난으로 들려요?" 여옥은 웃었다. "여자가 섬세한 구석이라곤 없고 남의 비윗장 긁은 소리 찾아가며 하는군." 호박전을 간장에 찍어서 먹으며 말했다. "명희한테 그런 유산이 굴러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대로 가난하게 살면서 마음만은 떳떳했을 건데." "결국 소심한 거지 뭐." "명희한테도 그 유산은 악전이었나 봐요." "목을 찌르고 죽은 사람의 유산이니 악령이 붙어 있을 만도 하지." "어제도 악령 같은 얘길 했는데 기분 나쁘게 그 얘기는 왜 해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 좀."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하고 밥이나 먹어요." 최상길은 국에서 고기를 건져 여옥의 국그릇에 옮겨놓으며 말했다. 그는 아직 여옥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돈이란 탐닉해도 해로운 것이지만 결백하게 구는 것도 탐닉을 의식하기 때문이지. 그냥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돼요. 생활을 위한 것이라고, 돈의 혜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소?" 그 말을 할 때만은 오라비가 누이 타이르듯 다소는 진지한 어조였다. "그 후 도솔암에는 가보셨어요?" "지난 겨울에 한 번." "임교장 건강이 그때도 나빴어요?" "좀, 그렇더군." "그 짓궂은 해도산가 하는 사람, 여전히 그래요?" 여옥은 웃으며 물었다. 지난 가을, 산에서 여자 둘, 특히 최상길이 해도사에게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쭈그러든 늙은 호박같이 생겨 가지고 손톱도 안 들어가더구먼." "최선생이 또 많이 당했나 부지요?" "내가 당하기로는, 그놈의 사팔뜨기 김장산가 하는 그 위인이었소." 최상길은 몹시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 사람들 죽이 자알 맞는 것 같던데요?" 최상길이 김장사라 하던 사람에 당하는 장면을 상상하는지 여옥은 계속 웃었다. "죽이 맞기는, 천하 호인 임교장은 중학교에 갓 들어간 소년이구, 지감형은 대학을 갓 나온 청년이구, 혹세무민하는 그 여우 상대가 아니지." "소선생도 그래요?" "명주 포대기에 싸여 자란 출신이니 그렇지 뭐. 세상을 두루 다녀서 견문이 넓다 한들, 개인적인 고뇌가 깊었다 한들, 또 출가하여 불법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역시 외곬의 어리석음이 없지 않으니까. 머리만 살아 있는 거지." "하지만 그 도사 사악해 뵈지는 않든데요?" "그러니까 영악한 거지. 한데 그 험구가 여옥씨는 좀 높이 평가하더구먼. 점쟁이 평가지만 말이오." 이럭저럭 두 사람은 조반을 끝냈다. 그러고도 왠지 꾸물대고 있던 최상길을 부스스 일어섰다. 골목길을 나서려 했을 때 "우리, 한강 쪽으로 나가보지 않겠어요?" 하며 고개를 돌려 최상길은 여옥을 쳐다본다. "그러세요." 아주 엷은 긴장의 빛이 여옥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다. "집안은 두루 안녕하시지요?" 뒤늦게 안부를 묻는다. "네." "마른 생선, 수하물로 부쳤으니까 누구 시켜서 찾도록 하세요." 그러고는 한강 사장에 가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강바람은 쌀쌀했다. 그러나 겨울 바람은 아니었다. 얼음이 녹은 강은 짙푸르고 바람에 잔물결이 일렁이고 있었으며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최상길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조심 바람을 막으며 담배를 붙여문다. 옷자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새벽에 나오려고 세수를 하는데, 무슨 샌지 모르겠어요, 맑고 처량하게 우는소리를 들었어요. 왠지 모르지만 그 밤새가 명희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남의 생각은 그만 하고 자기 자신의 일이나 생각해요." 최상길은 화를 내듯 그리고 덧붙여서 말하기를 "나이가 몇 살인데 사춘기 소녀같이 그런 말하는 거요?" "누가 그런 감상적인 마음으로 말했나요? 그럴 여유가 있다면 세상에 대해서 미안한 거 아니예요?" "그 생각도 버려요." "버릴 필요가 있어요?" "위선이니까." "참, 무안주는 데는 선수네요. 답답하니까 그런 생각도 해보았던 거예요. 자신의 자리를 좁히고 좁히면서 또 숨기면서 남몰래 한반중에 한번씩 자신의 존재를 외쳐보는 그런 밤새 같은 명희의 생애는 도시 뭔가 하구요." "여옥이 당신은 이 순간이 행복한가요?" "...?" "남자랑 함께 강가를 걷고 있는 게 말이오." "그야 행복하지요. 편안하구요." "자신은 행복해하면서 남의 불행을 생각하는 거요? 악취미로군." "최선생!" "왜요?" "왜요, 그건 내가 할 말이에요. 왜 자꾸만 비틀어보는 거지요? 나도 불행하다 해야만 만족하시겠어요? 하지만 아니예요." "허허허허... 허허헛." "웃지 말아요. 다만 나는 한 가지 생각만 안 하지요." 최상길은 물고 있던 담배를 버리고 "여기 좀 앉아요." 두 사람은 나란히 모래밭에 앉아 강을 바라본다. 강 건너 멀리 농부가 소를 몰고 가는 것이 보였다. "여옥이가 그러고 싶으면 우리 함께 살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하고 결혼합시다." "..." "그걸 여옥이 당신은 희망하지 않았소?" "했지요. 지난 가을까지는." "지금은 아니다 그 말인가요?" "네." "어째서?" "억색풀같이 살고 싶어서요." 이상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상길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지나가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데 욕심 더 안 부리겠어요. 나는 길을 걷는 게 좋아요." "전도 사업을 계속하겠다 그 말이오?" "당장은, 그렇지는 않아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말하던 그 할머니, 그곳에서 심경이 변한 거요?" 최상길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나서 물었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 할머니 사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 분은 자신의 불행까지 사랑한다고 할까, 천지만물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어요. 겨울 긴긴 밤에 목화씨를 발가내면서도 밥을 짓고 아궁이에 솔가지를 뿐질러 넣을 때도,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힐 때도, 그 정성이 하나의 의식같이 보이는 거예요. 할머니 자신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나도 저와 같이 시간을 가득하게 살아보고 싶다 그런 생각 여러 번 했어요. 싱그러운 풀 같고 흐르는 강물같이, 뭐라 설명이 안 되지만." "..." "그리고 또 하나 최선생이 왜 결혼하자는 건가 그것을 난 알아요. 확신도 없으면서 결혼이라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끔 이렇게 만나는 것, 이것만으로도 그 어떤 행복한 사람에 못지않은 거 아니예요? 우리가 젊어서 자손을 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구 억새풀같이 단단하고 질기게, 걷고 싶어요. 우리 육신의 마지막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최상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형무소에서 업고 나왔던 것처럼 당신은 그 생각에서 나하고 결혼하려 했을 거예요. 그런 생각 말아요. 사랑하더라도 연민은 갖지 마세요. 그리고 또 서로 가지고 싶어하면 우리는 행복해지지 않을 거예요." "..." "우선은 날이 풀리면 할머니 곁에 가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밑바닥에서, 비로소 나는 해방이 되는 거예요." 하다가 여옥은 별안간 수염이 까칠하게 돋아난 최상길의 볼을 쓸어본다. "내가 죽으면 최선생이 묻어주시고 당신이 먼저 가면 내가 그럴게요." [완결편(16권)으로 이어집니다.] 어휘 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드난꾼(12:16): 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살면서 그 집의 일을 도와 주는 사람. 주로 여자에게 쓰인다. 몸뻬(15:24): 여자들이 일할 때 입는, 통이 넓고 발목을 묶게 된 왜식 바지. 가정부(16:16): 3.1운동 후 상해 프랑스 조계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졸때기(18:17): 낮은 자리의 변변하지 못한 사람. 소개(28:17): 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의한 손해를 적게 하기 위하여 집중되어 있는 사람이나 시설 따위를 분산시킴. 이마작해서(34:4): [방언] 자기가 한 깐이 있어서. '깐'은 마음속으로 헤아려지는 생각이나 가늠을 뜻한다. 심관(37:4): 마음. 삼가람길(38:5): [방언] 세거리. 한곳에서 세 갈래로 난 길. 갈롱을 피운다마는(40:18): [방언] 간릉 피우다. '간릉'의 본뜻은 남의 환심을 사려고 엉너리치는 솜씨가 좋음이다. 여기서는 잘 난 척 까분다는 뜻으로 쓰였다. 연연(43:8): 가냘프고 연약함. 섬약. 풀세게(44:25): 태도나 성질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악지세다. 빳빳하게. 들어푸리 있거라(45:6): [방언] 조용히 엎드려 있으라는 뜻. 기영머리(45:7): [방언] 귀밑머리. 쪽을 찌고 시집가지 전에 처녀 머리. 애댕기는(50:22): [방언] 안기다. 만나다. 솔옵(50:25): [방언] (어떤 물자가) 나오는 곳. 실겁었소(51:21): [방언] 슬기롭다. 마음이 너그럽고 제법 미덥다. 대복을 찌고 나온(52:2): [방언] 큰복을 타고나다. 제금을 나갔이니(52:6): [방언] 분가하다. 거물장(52:15): [방언] 거덜장. 나무 그릇 따위의, 사개를 맞추어 짠 모퉁이에 걸쳐 대는 쇳조각. 뺏독시럽게 해굴어도(54:2): [방언] 표독스럽게 행동하다. 신양(54:2): 신병. 몸의 병. 베밑콩(54:8): [방언] 밥에 두는 풋콩. 성시(55:1): [방언] 형편. 노리(55:6): 늙은이. 여기서는 '늘그막'의 뜻으로 쓰였다. 인야(57:13): 인품. '대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국량(60:13): 도량. 일을 잘 알아서 경영할 수 있는 품성. 매력꿎게(67:15): [방언] 모질게. 자석 질엎(67:16): [방언] 자식의 앞길(앞날). 엄첩게 생각하고(68:17): [방언]어렵게 생각하다. 사초(68:24): 무덤에 떼를 입히고 다듬는 일. 흔히 한식날에 한다. 번걸증(69:18): [방언] 갑갑증. 앤네(72:24): [방언] 여인네. 기떡이 맥힌다(73:7): [방언] 기가 막힌다. 돔바 갔소(73:19): [방언] 훔쳐가다. 생이틀(75:9): [방언] 상여틀. 숭업지요(83:19): [방언] 보기에 흉하다. 보관(96:14): 훌륭하게 만든 보배로운 관. 영락(96:14): 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서 머리. 목. 가슴 따위에 두르는 장신구. 본디 부처의 몸을 장식하 는 것으로 쓰였다. 마디질 못해(130:4): 헤프다. '마디다'는 닳거나 없어지는 동안이 오래다는 뜻이다. 사지(132:18): 서지. 옷감으로 쓰이는 모직물의 하나. 마목 겉은 년(135:12): 악독하고 몹쓸 여자라는 뜻. '마목'은 본디 1. 힘살이 마비되어 나무처럼 뻣뻣해지는 병. 2. 문둥병이 처음으로 살갗에 나타날 때 허는 자리는 뜻한다. 조섭(135:25): 조리. 건강이 회복되도록 몸을 잘 보살피고 다스림. 오동지 섣달(139:15): '동시 섣달'을 강조해서 일컫는 말로. '막바지 섣달'이라는 뜻이다. 장호(140:4): [방언] 인품. 성품. 시적(146:4): [방언] 이제. 곧. 밥산 노릇 못하는(147 :2): 밥값을 못하다. 내지구지(150:9): [방언] 속사정. 내용. 성냥간(153:20): [방언] 대장간. 하시기부시기, 실이 노이 되도록(164:18): [방언] '하시기부시기'는 이것저것' '이말저말'의 뜻. 실이 한올 한올 모여 노끈이 될 만큼, 이말저말을 되풀이한다는 뜻. 가전지물(220:20): 집안에 전하여 내려오는 물건. 깡꽹이(223:8): 양악이 예술로 제대로 대접받기 이전에, 양악하는 사람을 비아냥조로 불렀던 말. 어자(305:8): 말을 부리는 사람. 마부. 다붙고(311:5): 사이가 뜨지 않게 바싹 다가붙다. 붓장(329:21): [방언] 베짱. 비리갱이 겉은(331:10): [방언]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비쩍 말라, 가냘프고 약한. 애참해라(335:17): [방언] 너무도 애처롭다. 야갈리겉이(362:10): [방언] 되바라지고 모르는 것이 없는. 어정개비(370:13): [방언] 어정뱅이. 일정한 일없이 어정버정 지내는 사람. 되나깨나(370:18): [방언] 도나캐나(윷놀이에서의 도나 개). 덮어놓고 마구잡이로. 이분거리고(370:18): [방언] 지분거리다. 집적거리다. 여기서는 '입맛을 다시고'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뉘를 내면(370:26): 흰쌀 속에 있는 '뉘'로서, 두드러진다는 의미. 물독다(377:15): 잘되었다. 배미(378:21): [방언] 뱀. 설동해서(379:14): 앞장서다. 주도적으로 일을 벌여 움직이다. 구새(382:4): [방언] 변소.